< 789화 4. 용암보다 뜨거운(?) 근성 >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관문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깔끔한 두 줄의 메시지와 함께 이안과 레미르의 시야가 하얗게 밝아진다.
그리고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대기실의 전경.
대기실에는 신이 나다 못해 행복에 겨운 레미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자, 세트 효과 전부 열었다!”
레미르는 화염법사이다.
그것도 극딜과 광역딜에 특화된, 강력한 딜러형 화염법사이다.
때문에 용암 세트의 세트 효과들은, 하나하나가 그녀에게 그 어떤 옵션들보다도 소중한 것들이었다.
“이안, 이것 봐! 여기 로브에 화염딜 증폭 20퍼나 달려 있다고!”
“보고 있어, 누나.”
“게다가 5세트 세트효과 다 합하면……! 미쳤다, 미쳤어. 화염 속성 딜증폭 추가 50퍼에, 치피 50퍼까지 붙어 버렸네.”
“그러게.”
“용암셋 전후로 DPS 거의 두 배 가까이 차이나겠는데?”
“행복하지?”
“그럼!”
“고맙지?”
“당연하지!”
“그럼 내일부턴 누나가 길드 파티 캐리 좀 해 줘. 이제 초월 70레벨 대 거인들도 살살 녹아내리겠네.”
“크으으으으!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행복해!”
이미 용암 세트의 효과를 어느 정도 보고 있던 이안과 달리 오늘 하루 만에 모든 세트를 얻은 레미르.
그녀는 기쁨에 겨워 대기실에서 방방 뛰고 있었고, 이안은 피식 웃으며 상태를 정비 중 이었다.
이안 또한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마냥 행복한 레미르와 달리 아쉬움이 공존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라바 드래곤을 첫 트라이에 잡지 못하여 용암의 갑옷을 날려 버린 것도 아쉬웠고, 녀석을 결국 포획하지 못한 것도 아쉬운 이안이었다.
‘휘유, 뭐 라바 드래곤을 잡을 기회가 앞으로 또 있길 바라야지.’
이안과 레미르는 남은 포션까지 체크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금방 정비를 끝내고 다시 관문의 입구 앞에 섰다.
방금 전의 전투는 이미 라바 드래곤의 생명력이 많이 빠진 상태로 시작된 터라 크게 어렵지 않았으니, 정비할 것도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철문의 앞에 선 그때.
우웅- 우우웅-!
갑자기 거대한 공명음이 울려 퍼지더니, 철문으로 시뻘건 빛줄기가 요동치며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콰아아아!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레미르와 이안은,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오오!”
“뭐지?”
철문으로 빨려 들어간 붉은 빛들이, 남아 있는 용암의 장비 문양들로 스며들어 타는 듯한 붉은 빛을 발광하기 시작했으니 말이었다.
지금까지의 도전에서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이펙트와 연출.
그리고 이것은 누가 보아도 어떤 다이나믹한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난이도가 더 올라간다는 뜻인가?”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높겠지?”
긴장과 흥분이 뒤섞인 표정이 된 두 사람은, 연출이 완전히 다 끝날 때까지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았다.
이어서 철문에 황금빛 운무가 스며드는 것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눈 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띠링-!
-용암의 대지, 모든 관문지기를 격파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숨겨진 도전 기회가 개방됩니다.
화아악-!
두 사람을 충분히 빨려들게 할 만큼, 흥미진진한 시스템 메시지의 등장.
이어서 고요하게 멈춘 것처럼 보였던 용암의 장비 문양들이, 원판에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덜컹- 덜컹- 기이잉-!
이안과 레미르가 선택한 문양들이 빠진 자리를 비워 둔 채 듬성듬성 원을 그리며 새겨져 있던 네 개의 문양들이 마치 퍼즐 조각 맞춰지듯 원판의 중심으로 모여들어 작은 원 안에 합쳐진 것이다.
황금빛 원판 안에서 빛나고 있는 대검과 활, 그리고 지팡이와 신발의 문양.
이안과 레미르의 시선은 붉은 빛으로 활활 타오르는 네 개의 문양에 고정되었고, 그 순간 다시 시스템 메시지가 이어졌다.
-이제부터의 도전에서는, ‘강화된 용암 장비’를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남아 있는 도전 기회 : 4회
-모든 기회를 전부 소모하거나 도전에 성공하는 경우 더 이상 용암의 대지에 도전할 수 없습니다.
-도전을 포기하고 용암의 대지 바깥으로 나간다면, 다시는 도전할 수 없는 관문입니다.
……중략……
-이제부터의 도전에서는, ‘사망’하지만 않는다면 도전 기회가 소모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의 도전에서는 더 이상 관문지기의 피해가 누적되지 않습니다.
-어떤 문양을 선택하든 ‘파멸의 염옥’ 관문으로 이동됩니다.
시스템 메시지를 전부 확인한 이안과 레미르는 순간 멍한 표정이 되었다.
메시지의 내용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강화된 용암 장비’라는 단어는 두 사람에게 너무도 매혹적인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전설 등급 초월 장비가 더 강화된다는 건…… 설마 신화등급 초월 장비라도 얻을 수 있다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미쳤다, 대박.”
이안은 영롱하게 빛나는 네 개의 문양들을 차례차례 훑어보았다.
둘이 다른 문양을 선택해도 같은 관문에 입장한다는 친절한 메시지까지 확인했으니, 선택에 제약이 거의 사라진 것이다.
‘나머지 장비 네 개 전부 전설등급으로 얻는 것보다 원하는 장비 하나를 신화 등급으로 얻는 게 백만 배 낫지.’
이안은 고심하기 시작했다.
레미르야 생각할 것도 없이 지팡이를 선택하면 되는 문제였지만, 이안의 경우에는 대검과 활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으니 말이다.
‘성능이랑 옵션이라도 미리 볼 수 없나? 정보 창 읽어 보면 미련 없이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랜만에 선택 장애가 걸린 이안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두 개의 문양을 번갈아 응시하였고, 그런 그를 향해 레미르가 재촉하기 시작하였다.
“너답지 않게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 빨리 선택하라고.”
그리고 다음 순간, 이안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래. 아무래도 숙련도가 조금이라도 더 높은 활을 선택하는 게 후회가 없겠지.’
이어서 동시에 원판에 손을 올리는 이안과 레미르.
-파티원 ‘이안’이 ‘용암의 장궁’ 문양을 선택하였습니다.
-파티원 ‘레미르’가 ‘용암의 스태프’ 문양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선택을 받지 못한 두 개의 문양이 하얗게 불타며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고, 선택받은 두 개의 문양이 원판을 반으로 가르며 철문에 커다랗게 새겨졌다.
그리고 잠시 후.
위잉- 철컥-!
그그그긍-!
지금껏 굳건히 닫혀 있던 거대한 철문이, 굉음을 내며 양 옆으로 열리기 시작하였다.
-‘파멸의 염옥炎獄’ 관문에 입장하셨습니다.
-관문돌파 제한 시간 : 3,000초
-‘극열의 한계에 도전하는 자’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후략……
* * *
불안에 떨고 있는(?) 직원들의 수다로 인해, 소란스럽기 그지없던 기획 팀의 모니터링실.
하지만 다시 이안과 레미르의 전투가 시작되자 장내는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고요해졌다.
야근에 대한 불안도 불안이지만, 그와 별개로 이 지옥 같은 난이도의 관문을 이안과 레미르가 어떻게 공략할지 궁금해졌으니 말이다.
‘염옥이라는 이름이 그냥 지어진 게 아니란 말이지.’
나지찬과 기획3 팀이 생각하기에, 그야말로 ‘불지옥’ 같은 난이도의 숨겨진 관문.
언젠가 이 관문을 발견하는 유저가 나타난다면 지옥을 보여 주리라 다짐하며 설계한 관문이었으나, 오히려 지금은 기획 팀이 지옥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관문이 발견된 시점이 너무 빠른 것도 문제였지만, 도전 횟수를 네 번이나 남겨 놓은 시점에 관문을 열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후우, 이안을 위한 난이도를 따로 관리할 수도 없고 참…….’
이안 같은 최상위의 톱 티어 랭커들은, 언제나 기획 팀에게 골칫거리였다.
그들의 능력을 고려한답시고, 무작정 난이도를 올리기만 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었다.
유저가 그들만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난이도를 어렵게 올릴수록 보상도 그에 맞춰 올라가야 하기 때문.
사실 이 불지옥 관문도, 본래 기획팀의 기획 의도보다 한참 어렵게 설계된 관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시점에서는 결코 등장해선 안 될, 신화 등급의 초월 장비가 보상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보스 피해가 누적되지 않도록 바꿔 놓은 게 신의 한 수였어. 원래 룰대로 피해가 누적되는 설정이었으면……. 이안은 분명 네 번의 트라이 안에 클리어했을 거야.’
보스 피해누적이라는 룰이 사라진 대신 관문 낙오 조건 또한 완화되었다.
시간이 다 지나도 관문 안에서 죽지만 않는다면 낙오 판정이 나지 않도록 바뀐 것이다.
사실상 죽지만 않는다면, 무한하게 트라이할 수 있도록 바뀐 것.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원래의 룰보다 클리어가 훨씬 어려워진 것은 틀림없었다.
한참 모자라는 스펙과 실력으로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클리어가 불가능한 것은 매한가지일 테니 말이다.
게다가 스펙을 더 올리고 다시 관문에 들어올 수 없도록, 한 번이라도 용암의 대지에서 나간다면 기회가 소멸되도록 설정하여 놓았으니, 이 관문이 결코 쉽게 클리어할 수 없도록 촘촘하게 구멍을 막아 놓은 것임은 틀림이 없었다.
‘이안은 활을 선택했고, 레미르는 지팡이를 선택했군. 저 둘에게 강화된 용암 장비가 들어간다면 중간계 콘텐츠 수명이 두 달 정돈 줄어들겠어.’
나지찬이 판단하기에, 지금의 상황은 반반 정도였다.
아무리 이안이라 해도 첫 번째 트라이에선 사망할 수밖에 없겠지만, 두 번째 세 번째 트라이가 진행되는 동안 죽지 않고 버티는 방법을 알아낼 확률이 매우 높았으니 말이다.
일단 50분이라는 제한 시간 동안 죽지 않고 버틸 수 있게 되면 트라이 횟수는 무한에 가까워지니, 그때부터 이안은 분명 미친 듯이 반복 노가다를 시작할 게 분명했다.
다른 랭커면 몰라도 이안의 근성이라면, 보나마나 될 때 까지 트라이할 터였다.
‘기왕이면 네 번 모두 깔끔하게 전멸해서 빠르게 상황이 종료됐으면 좋겠는데…….’
모니터링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한 나지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고…….
“오늘 다 같이 밤샘은 거의 확정이로군.”
옆에서 그 목소리를 들은 김 대리가 화들짝 놀란 것은 물론이었다.
“바, 밤샘이라뇨, 팀장님. 그 무슨 끔찍한 말씀이신지…….”
나지찬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손가락을 들어 스크린을 가리켰다.
그리고 김 대리의 물음에,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이안이 생존법을 알아내서 무한 트라이 시작하면…… 우리 퇴근할 수 있겠어?”
“…….”
“당직실에 이불이라도 깔아 두고, 돌아가면서 모니터링해야 할 판이야 지금.”
“살려 주세요, 팀장님…….”
“왜 나한테 살려 달라고 해? 이안한테 얘기해야지.”
“크흑.”
나지찬과 김 대리는 다시 입을 꾹 다문 채,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스크린에는 어느새 관문 끝까지 돌파해 보스 룸에 도착한 이안과 레미르가 보였다.
‘역시 용암 풀세트 착용하니 잡몹들을 그냥 쓸어 버리는군.’
하지만 사실 이 용암의 대지에서, 관문 돌파 과정은 형식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관문의 끝에 등장하는 관문지기가 사실상 관문의 전부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어서 잠시 후, 커다란 굉음과 함께 스크린이 진동하기 시작하였다.
고오오- 콰아아아-!
이어서 용암으로 만들어진 바닥이 쩍쩍 갈라지며 지옥의 관문지기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