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8화 3. 용암 속의 비밀 (2) >
* * *
-크롸아아!
좁고 길게 이어진 미로.
그 끝에 나타난 광활한 화산지대.
부글거리는 용암을 품고 있던 거대한 드래곤이 양 날개를 쫙 펼치며 이안과 레미르를 향해 포효하였다.
-캬아아오! 이곳에서 다른 어떤 존재를 만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군.
그리고 녀석과 눈이 마주친 이안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라바 드래곤이라…….’
지금까지 용암 세트 아이템의 아이템 정보 창에서만 봐 왔던 존재를 드디어 눈앞에 마주하게 되었으니, 감회가 새로웠던 것이다.
-용암의 장비들을 전부 모을 수만 있다면, 용암지대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는 ‘라바 드래곤’을 처치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안은 라바 드래곤에게서, 지금까지의 보스들과는 다른 느낌을 받고 있었다.
지금까지 용암 수호자들이 기계적으로 관문 도전자를 막는 ‘가디언’같은 느낌이었다면, 이 녀석에게서는 절대자의 분위기가 느껴졌으니 말이었다.
이안과 레미르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적대감보다는 호기심과 여유가 느껴졌던 것.
때문에 두 사람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이야말로 용암지대의 끝판왕이 분명하였으니 말이다.
“남은 시간은 700초 남짓……. 대충 12분 정도 남은 건가?”
“그런 것 같아. 미로 찾는 데 시간을 너무 오래 써 버렸어.”
라바 드래곤이 등장한 다섯 번째 관문.
이 관문에 주어진 시간은 무려 33분 20초였다.
‘미로’라는 맵의 특성 때문에 다른 관문들보다 훨씬 긴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안과 레미르는 미로를 찾는 데에 거의 20분 이상을 소모해 버렸다.
이제 10분이 조금 넘는 시간 내로, 저 괴물 같은 녀석을 처치해야 하는 것이다.
‘라바 드래곤을 만난다면 포획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스로 등장해 버린 이상 포획은 물 건너간 건가?’
우람한 라바 드래곤의 위용을 보면서, 이안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딱 이렇다 아니다 정해진 것은 없었지만, 카일란의 세계관에서 보통 보스로 등장하는 몬스터는 포획이 불가능하도록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흐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쉬워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녀석을 처치하고 다섯 번째 용암장비를 얻는 것도, 라바드래곤을 테이밍하는 것만큼이나 스펙 업에 도움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일단 패턴 파악이 우선이야. 알지, 누나?”
“걱정 마시라고!”
이어서 호기롭게 대답한 레미르가 각종 보호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하였다.
우웅- 위이잉-!
그리고 꼿꼿한 자세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라바 드래곤을 향해 칠흑빛 창을 치켜 든 이안이 쏜살같이 파고들었다.
퍼퍽- 퍽-!
덩치가 커다란 만큼 둔한 녀석의 지근거리까지 순식간에 접근을 성공한 이안.
-용암의 수호자 ‘라바 드래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라바 드래곤’의 고유 능력, ‘라바 스킨’이 발동합니다.
-‘라바 드래곤’의 생명력이 1,398만큼 감소하였습니다.
녀석의 옆구리에 창격을 성공시킨 이안은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뒤 어이없다는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뭐야, 딜이 왜 이거밖에 안 들어가?’
약점 포착을 활용해 정확히 약점을 공격하였고, 분명히 ‘치명타’까지 발동하였건만, 1천 단위를 간신히 넘는 수준의 약소한(?) 숫자가 눈에 들어왔으니 말이었다.
‘드래곤 스킨도 아니고 라바 스킨은 또 뭐 하는 더러운 패시브지?’
보스가 가진 고유 능력들의 정확한 스펙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 번 헤딩(?)을 해야만 한다.
저 라바 스킨이라는 패시브를 뚫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공격을 해야 하는지, 이런저런 시도를 해 가면서 알아내야 하는 것이다.
-캬오오, 쥐새끼 같은 인간 녀석이군.
재빠르게 옆구리를 가격하고 빠져나가는 이안을 보며, 슬슬 노기 어린 표정이 되는 라바 드래곤.
그런데 그때, 이안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의구심이 스쳐 지나갔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따지고 보면 보스는 아니잖아?’
어지간한 던전 보스와 비교하더라도, 전혀 꿀리지 않는 위용을 지닌 라바 드래곤.
하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녀석의 직책(?)은 결국 관문지기일 뿐이었고, 그렇다면 자연스레 한 가지 의심을 다시 한 번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녀석을 포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혹은 이안의 미련.
‘그래, 한번 시도나 해 보자. 밑져야 본전이니까, 뭐.’
콰앙-!
라바 드래곤의 거대한 꼬리를 재빨리 피해 낸 이안은, 다시 녀석을 향해 쇄도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포획’스킬을 발동시키려면 일정 거리 안으로 접근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녀석의 입에 용암의 불길이 끓어오르기 시작할 때…….
쿠르르르-!
브레스를 뿜어내기 위해 역동작이 걸린 녀석의 뒤쪽으로, 이안은 재빨리 신형을 움직였다.
드래곤 브레스야 수없이 봐 왔기 때문에, 미약한 움직임의 변화만으로도 패턴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라바 드래곤의 뒤로 돌아간 이안은 녀석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어서 이안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의 시동어가 울려 퍼졌다.
“포획……!”
너무도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번 시도로 이안이 포획에 성공할 확률은 제로였다.
다만 이안이 확인하고 싶은 것은 포획 시도와 함께 떠오르게 될 시스템 메시지.
우우웅-!
이안의 손에서 뻗어 나간 새하얀 빛이 드래곤의 등을 향해 쏘아져 나갔고, 녀석에게 채 도달하기도 전에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이안의 눈앞에, 기다렸던 한 줄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포획에 실패하였습니다.
* * *
꿀꺽.
마치 생사를 건 일전을 앞둔 전장의 무사들처럼, 극도의 긴장감 속에 스크린을 바라보는 기획 팀의 사원들.
지금 기획 팀의 모니터링실에는 30분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이 모여 있었다.
오늘 이 라이브 방송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다음 달의 야근일수가 결정될지도 모르니, 1팀과 3팀 뿐 아니라 퇴근하지 않고 남아 있던 거의 모든 기획 팀 사원들이 모여든 것이다.
다섯 번째 트라이에 라바 드래곤을 만나 버린 이안과 레미르.
두 랭커들을 보는 기획 팀 사원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염혼의 마도사가 원트에 잡혔다는 게 사실이야?”
“그렇다니까. 방금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그거 3팀에서 실험할 때 거의 10트라이 정도 했다고 들었었는데…….”
“정확히 16트라이에 겨우 잡았음요.”
“스펙은?”
“당연히 최상위랭커 평균스펙으로 트라이했지.”
“하……. 뭐지? 이안 스펙이 다른 최상위 랭커들 세 배쯤 되는 건가?”
“놉. 이건 스펙 차이라기 보단 피지컬 차이인 듯.”
“하긴……. QA(Quality Assurance) 팀 피지컬이 아무리 좋아도, 랭커들과 비교하면 어린아이 수준일 테니까 뭐.”
“그래도 그렇지. QA팀 재훈 씨나 승윤 씨는 거의 랭커급 피지컬이라고 알고 있는데…….”
“랭커 위에 이안이라고, 좀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해야 할 듯.”
직원들은 작은 목소리로 수근 대면서도, 스크린에서 결코 눈을 떼지 못하였다.
악마 같은 이안을 상대로 고군분투하는 라바 드래곤에, 제대로 몰입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한일전 스포츠 경기를 응원할 때보다 더욱 간절한 마음이 담긴 직원들의 응원!
“그렇지! 캐스팅 잘 끊었어, 라바 드래곤!”
“아오, 저걸 왜 못 피하냐? 방금 꼬리치기만 맞췄어도 이안 잘라 버릴 수 있었는데!”
“벌써 생명력이 20퍼센트나 까이면 어떡해? 네가 10라운드 까지 이안을 막아 줘야 한다고.”
“아니, 10라운드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딱 7라운드까지만 막자, 라바야.”
그리고 직원들의 그 목소리를 듣는 나지찬과 김의환 또한, 지금만큼은 마찬가지의 심정일 수밖에 없었다.
“나 팀장, 메이지 어렵게 잘 만들었다며.”
“그랬죠…….”
“드래곤은 믿어도 되는 거야?”
“…….”
“제발 대답해 줘, 나 팀장…….”
“…….”
“나 다음 달에는 진짜로 휴가 써야 된다고.”
“히든 스테이지에선 막힐 겁니다, 팀장님.”
“후우…….”
“일단 좀 더 지켜보죠.”
“…….”
드래곤과 분투하는 이안을 보며, 나지찬은 침음성을 삼켰다.
‘이안 스펙이 못 본 사이에 언제 저렇게 올라왔지?’
처음부터 이안이 드래곤까지 잡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적어도 열 번의 기회 중 아홉 번 이상은 소모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었다.
‘메이지에서 6트라이까지 가고. 드래곤에서 9~10트라이쯤 비벼질 줄 알았는데…….’
나지찬이 이안에게 허락(?)하고 싶었던 보상은 용암 5세트까지였다.
그것만 해도 현 시점에 어마어마한 수준의 보상이었지만, 그래도 거기까진 이안이라면 가져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래. 아무리 이안이라 해도, 히든 스테이지는 어림없을 거야. 서너 번 트라이로 깰 수 있게 만들어진 스테이지가 절대로 아니니까…….’
나지찬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시나리오들을 열심히 굴리며, 이안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10분쯤 지났을 때.
-캬아아오오!
“와아아!”
“드디어 해냈어!”
“첫 번째 승리라고!”
마치 축구경기에서 골이라도 터진 듯 모니터링실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라바 드래곤이 이안과 레미르를 저지하는 데 가까스로 성공한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을 처치한 것은 아니었지만, 12분이라는 시간을 버텨 냄으로서 그들의 도전 횟수를 차감시키는 데 성공한 것.
“와 씨, 라바 드래곤까지 원트에 잡아 버리는 줄 알고 간 떨려서 혼났네.”
“휴우, 근데 한 번 막은 게 의미가 있나? 어차피 다음 트라이에선 잡는 거 확정이잖아.”
“그렇긴 하지. 첫트에 생명력을 70퍼센트나 까 버렸으니, 다음 트라이에선 무조건 클리어하겠지.”
“아오, 미리 야근 준비하러 가야 하나.”
“아냐, 기다려 봐. 드래곤이 도전 횟수 2회 까줬으니까, 히든 스테이지에서 둘한테 남은 도전 횟수는 4회 뿐이라고.”
“흐음…….”
이어서 까맣게 변했던 스크린의 화면이 다시 도전 대기실을 비추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안과 레미르가 다시 스크린 정중앙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 * *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최선이었던 것 같지?”
“그러게. 확실히 빡센 녀석이었어.”
“이번 트라이에선 잡을 수 있을까?”
“어떻게든 잡아야지. 패턴은 미리 다 파악했으니,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그건 그래.”
대기실에서 빠르게 정비를 마친 레미르와 이안은, 곧바로 다시 도전을 시작하였다.
역시나 ‘갑주’ 문양의 도전 기회는 사라져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선택한 것은 로브.
로브가 두 사람이 같이 쓸 수 있는 마지막 장비였기 때문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똑같이 미로 맵이려나? 맵을 빨리 뚫는 게 관건일 텐데…….’
이제까지 관문 낙오를 해 본 적이 없는 이안과 레미르는 보스의 피해가 누적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하여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빠르게 관문을 돌파하였고, 최대한 빠르게 라바 드래곤을 다시 찾아내었다.
물론 다시 만난 라바드래곤의 생명력 게이지를 확인하고는, 당황하였지만 말이다.
“쟤, 시작부터 왜 저렇게 비실거려?”
“방금 전 걔랑 똑같은 녀석인가 본데?”
“오호, 이러면 꿀이지!”
해서 이안과 레미르는 순식간에 녀석의 생명력을 빈사 상태까지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무려 5분이 넘는 시간이 남은 상태에서, 녀석의 생명력을 바닥까지 깎아 버린 것이다.
‘좋았어! 이러면 정말 포획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이안은 녀석에게 미친 듯이 포획을 시도하였다.
“포획!”
“포회엑!”
“좀 잡혀라!”
하지만 5분이라는 시간은 야속하게도 금방 흘러가 버렸고, 이안은 결국 녀석을 포획할 수 없었다.
“이제 보내 주자, 이안.”
“…….”
“분명히 또 잡을 기회가 있을 거야.”
“크흑…….”
보스의 피해가 누적된다는 것을 안 이상, 한 번의 도전 기회를 일부러 날릴 생각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버리면 남은 기회는 4회뿐이었고.
그 안에 포획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도전 기회는 각각 용암 장비 1파츠라고 할 수 있었으니.
라바 드래곤이 아무리 탐나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 오늘은 보내 준다, 짜식.”
-캬아아오! 캬아악!
“하지만 다음에 만난다면, 절대로! 잡아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라고.”
-키야악! 괴팍한 인간 놈, 꺼져라!
이어서 관문 제한 시간이 정확히 30초가 남은 시점.
콰앙-!
이안과 레미르는 결국 녀석을 처치하였다.
-‘용암의 마력원’을 파괴하셨습니다!
-‘용암의 마력 관문’을 성공적으로 돌파하였습니다!
-‘용암의 로브(전설)(초월)’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캬아악! 다시는 만나기 싫은 놈이다!
이안과 눈이 마주치자, 부르르 고개를 떨며 용암 속으로 사라져 가는 라바 드래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안과 라바 드래곤의 만남은,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다시 이뤄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