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3화 2. 고대의 관문 (1) >
이안과 레미르는 둘 다 ‘망토’를 먼저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안이 설명했듯 화염 피해부터 최소화시키기 위함이었지만, 한 가지의 이유가 더 있었다.
둘이 같은 아이템을 선택한다면, 같은 맵으로 이동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아무래도 까다롭기 그지없는 던전이다 보니, 떨어져서 다른 맵을 공략하게 되면 난이도가 배가될 터.
특히 레미르의 이그라트 아머 없이 던전을 공략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이안의 계산은 정확히 적중하였다.
맵에 들어서자마자, 레미르의 목소리가 그를 반겨 주었으니 말이다.
“작열의 관문이라……. 이름부터 뜨겁다 못해 활활 타오르네.”
그녀의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이안은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관문이라는 이름이 붙은 맵인 것 보니까 돌파 미션 같은 게 뜨겠는데?”
“흠, 그러려나?”
그리고 두 사람이 한마디씩 더 이야기한 순간, 둘의 눈앞에 동시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작열의 관문’에 입장하셨습니다.
-관문돌파 제한 시간 : 900초
-지금부터 모든 화염 속성 피해를 15퍼센트만큼 추가로 입습니다(1분이 지날 때마다, 추가 피해량이 5퍼센트씩 증가합니다).
-지금부터 모든 종류의 화염 속성 공격의 위력이 30퍼센트만큼 강해집니다.
-관문의 끝에 있는 ‘작열의 마법 타워’를 파괴하면, 관문이 클리어됩니다.
-관문에서 낙오된다면 다시는 해당 관문에 도전할 수 없습니다.
-관문을 통과한다면 ‘용암의 망토’를 획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메시지들을 확인한 레미르는 혀를 내두르며 이안을 쳐다보았다.
“귀신같은 놈…….”
이안이 돌파 미션을 언급한 순간 비스무리한 미션이 생성되었으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후후, 카일란 짬밥이 벌써 몇 년인데, 이 정도 예지력쯤은 별거 아니지.”
“군대도 안 다녀온 놈이 짬밥 타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레미르와 피식 웃으며 히죽거리는 이안.
하지만 농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빠르게 정비를 마치고 관문을 걸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같은 길드 안에서 호흡을 맞춰 온 랭커들답게, 둘은 말 없이도 서로의 역할을 척척 준비하였다.
“이그라트 아머 풀리지 않게 신경 써 주고, 광역 마법 위주로 깔아 줘, 누나.”
“알겠어.”
소환수들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없는 던전에서 이안이 주력으로 사용할 전력은 당연히 정령이었다.
특히 화염 마법의 대미지가 증폭되는 맵이기 때문에 이안은 마그번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이었고, 그 말인 즉 이안이 원거리 딜러 역할을 한다는 말이었다.
때문에 이 맵에서 레미르의 역할은, 광역 마법을 활용하여 접근하는 몬스터들을 저지하고 처치하는 것.
허공에서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타탓- 탓-!
15분이라는 제한 시간도 제한 시간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화염 속성 피해량이 늘어나는 맵이다 보니 속도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 * *
처음 던전에 입장했을 때 두 사람이 들어섰던 맵이 찜통 같은 느낌이었다면, 작열의 대지는 마치 불판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용암으로 이뤄진 계단실은 그 안에 있는 것만으로 뜨거운 화염 피해를 입어야 했다면, 지금 두 사람이 들어선 작열의 대지는 용암이 깔린 바닥을 밟지만 않으면 화염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순간, 이안은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면 완전 땡큐지!’
지금까지 부득이하게 잠자고 있던(?) 칭호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올랐으니 말이었다.
이안은 재빨리 상태 창을 열어, 비활성화 시켜 두었던 칭호를 하나 오픈하였다.
-칭호 ‘불 위를 걷는 자(유일)(초월)’를 활성화합니다.
-불 위에서 걷는 고통이 감소합니다.
불 위를 걷는 자 칭호는, 이안이 용암의 마법 장화를 획득하면서 같이 얻었던 칭호였다.
그리고 이 칭호의 효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었다.
*화염 속성인 ‘자연물’로 인한 피해를, 80퍼센트만큼 감소시켜 줍니다(인위적인 마법이나 몬스터의 공격으로 인한 화염 피해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화염을 밟을 시 이동속도가 2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화염을 밟을 시 화염 저항이 15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화염 위에서 도약할 시 도약 능력이 5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화염 위에서 적을 처치할 시 대상에게 3분 동안 입힌 피해의 15퍼센트만큼을 생명력으로 회복합니다.
마치 이 작열의 대지를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 듯, 이 맵에서만큼은 화려하기 그지없는 스펙을 자랑하는 칭호.
그렇다면 이안은, 지금까지 이 칭호를 왜 쓰지 않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였다.
이제까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불구덩이 안에 있으면서도 칭호 효과가 발동하지 않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뜨거운 건 마찬가지인데……. 뭔가 많이 불합리하지만, 게임이니까 어쩔 수 없지, 뭐.’
작열의 대지에 들어오기 전, 계단실의 경우.
지속적으로 화염 피해가 들어오기는 하지만 이안이 ‘불’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변이 용암으로 펄펄 끓고 있을지언정 정작 이안이 밟는 땅은 뜨거운 돌(?)일 뿐이었고, 어쨌든 불을 밟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칭호가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맵이 이렇게 바뀐 이상, ‘불 위를 걷는 자’칭호는 거의 치트키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다.
여기에 이제 용암의 발걸음까지 켠다면, 이안은 정말 날개를 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용암의 발걸음
지속 효과
‘화염’ 속성을 가진 모든 대상을 밟을 때마다, ‘불의 힘’ 버프(공격력 3퍼센트 상승)가 생성됩니다.
버프는 20초 동안 지속되며, 최대 20회까지 중첩이 가능합니다.
용암을 밟을 때마다 ‘용암의 발걸음’ 재사용 대기 시간이 1초씩 감소합니다.
사용 효과
‘용암의 발걸음’을 활성화시킬 시 이동속도가 15퍼센트만큼 증가하며, 발을 디딜 때마다 그 자리에 용암이 생성됩니다.
생성된 용암은 주변으로 조금씩 흘러내리며 15초 뒤에 사라집니다.
용암에 닿은 적들은 매 0.3초마다 350만큼의 화염피해를 입게 됩니다.
‘용암의 발걸음’이 활성화되어 있는 동안은, 어떤 곳을 밟더라도 ‘불의 힘’ 버프가 중첩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 180초)
용암의 발걸음은 원래, 성능이 좋은 만큼 무척이나 활용하기 까다로운 고유 능력이었다.
용암을 생성하고 그 위를 걸어야만 공격력 버프가 중첩되는 데다, 지속 시간이 20초밖에 되지 않았으니.
아무리 이안이라 하더라도 평소에 20스텍을 풀로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작열의 대지에서는 달랐다.
바닥 자체가 용암으로 이뤄져 있었기 때문에 버프 효과를 마치 패시브처럼 이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던전 전체가 이런 식이면 아주 꿀이겠는데…….’
타탓-!
이동속도 버프 중첩에 몸이 가벼워진 이안은 순간적으로 전방을 향해 튀어 나갔다.
그러자 뒤따라 오던 레미르는 당황했지만 일단 마법을 캐스팅하며 이안을 서포팅하기 시작하였다.
“너무 무리하는 것 아냐?!”
“괜찮아, 상황이 좀 달라졌거든.”
“……?”
이안은 당황스런 표정이 된 레미르를 뒤로한 채 강화된 도약 능력을 활용해 마치 활처럼 튀어 올랐고, 그와 거의 동시에 용암 속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활시위를 퉁기기 시작하였다.
팅- 티팅-!
그리고 이안의 활에서 쏘아진 불화살들은, 여느 때처럼 깔끔하게 표적에 명중하며 표식을 쌓아올려 터뜨렸다.
펑- 퍼펑-!
이어서 새로 얻은 마그번의 고유 능력, ‘화염인火焰印’이 라바 스폰들을 향해 작열하였다.
-화염의 정령 ‘마그번’의 고유능력 ‘화염인’이 발동되었습니다.
-‘라바 스켈레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라바 스켈레톤’의 생명력이 12,958만큼 감소합니다!
-‘라바 스켈레톤’에게 화염의 인장을 각인하였습니다.
-‘라바 스폰’의 생명력이 10,892만큼 감소합니다!
……후략……
마치 화려한 서커스단의 폭죽놀이를 보기라도 하듯, 여기저기서 펑 펑 터지며 작열하는 불꽃의 향연.
이안과 레미르를 가로막는 몬스터들의 초월 레벨은 60레벨 후반 정도로 결코 만만한 레벨 대가 아니었지만, 라카토리움의 오염된 괴수들을 상대하던 이안에게는 손쉬운 잡몹(?)들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물론, 아예 긴장감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안, 좌측!”
“알고 있어!”
쿠릉- 쿠르릉-!
던전 측후방에서부터 굴러 떨어지는 거대한 용암덩이를 본 레미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이안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불덩이가 떨어지는 방향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핑- 피핑-.
그리고 굴러 떨어지는 불덩이를 피하는 대신 재빨리 마그번을 불렀다.
“마그번!”
-알겠다, 주인.
그러자 굴러 내려온 불덩이가 이안을 집어삼키기 직전.
콰아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집채만 한 크기의 불덩이가 허공에서 터져 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어느새 양팔을 교차시킨 마그번이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화염의 정령 ‘마그번’의 고유 능력 홍염의 방패가 발동합니다.
-화염 폭발로 인한 피해가 97.5퍼센트만큼 흡수됩니다.
여기저기 새겨진 화염의 인장 덕에 마그번의 ‘홍염의 구슬’은 이미 가득 차오른 상태였고, 완벽한 타이밍에 ‘홍염의 방패’가 발동한 것이다.
그 모습을 바로 뒤에서 지켜본 레미르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와,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면 간 떨리지 않아?”
“그냥 최대한 효율적으로 움직인 것뿐이야.”
“…….”
하지만 이안의 움직임에 감탄하고 있다고 하여, 레미르의 활약이 별 볼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교적 순발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마법사 클래스임에도 불구하고, 그녀 또한 이안 못지않게 부지런히 움직이며 길을 열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5분여 정도가 지났을 때.
“찾았다!”
두 사람은 처음 시스템 메시지가 알려 주었던 ‘작열의 마법타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시간 많이 남았지?”
“대충 9분 정도 남은 것 같은데.”
“생각보다 더 여유롭게 도착했네.”
“아직 방심하긴 일러, 누나. 어쨌든 저걸 부수지 못하면, 리타이어니까 말이야.”
“그거야 그렇지.”
멀찍이 보이는 마법 타워를 발견한 두 사람은, 마치 약속하기라도 한 듯 자리에 멈춰 섰다.
이어서 레미르는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하였고, 이안은 그녀를 엄호하였다.
타워가 아직 두 사람을 인지하지 못하였으니,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한방을 먼저 먹여 준 뒤 공략을 시작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장비부터 시작해서 초월 레벨까지, 이안이 레미르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이었지만, 아이언의 브레스 같은 것을 쓸 수 없는 지금 한 방 공격력만큼은 레미르의 마법보다 강력하기 쉽지 않았다.
레미르는 지금, 화염법사들에게 꿈의 마법인 메테오를 캐스팅 중이었으니 말이다.
고오- 고오오오-!
수십 초나 되는 긴 캐스팅 시간 때문에 몬스터들을 상대로는 사용하기 어려웠지만, 저렇게 움직일 수 없는 타워 같은 대상을 파괴할 때에는 최고의 위력을 자랑하는 메테오.
레미르가 캐스팅한 메테오는 던전의 허공에서 생성되기 시작하였고, 이안은 눈에 이채를 띈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론 레미르의 캐스팅이 끊이지 않도록, 잡몹(?)들의 접근을 막으면서 말이다.
콰아아아-!
그런데 잠시 후.
레미르의 메테오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할 무렵.
쿠르릉- 콰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타워 주변의 대지가 요동쳤다.
“뭐, 뭐지?”
“뭐야?”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워어어-!
갈라진 용암의 대지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
떡대는 물론, 토르보다도 더욱 거대한 덩치의 괴물 같은 그림자.
이어서 갑자기 튀어나온 녀석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레미르의 메테오를 향해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그리고 그 광경을 본 레미르와 이안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자리에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저 괴물은…… 대체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