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1화 1. 다시 정령계로 (2) >
* * *
휘이잉-!
살을 에는 듯 차가운 한기와 함께, 거센 강풍이 휘몰아친다.
그리고 그 강풍 속에는 손가락 한마디만 한 커다란 우박이 촘촘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투툭- 툭- 툭-!
카일란. 아니, 그 어떤 가상현실 게임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살인적인 기후의 공격.
“아으으, 추워!”
이안의 구원(?)을 받아 정령계로 넘어온 레미르는 시작부터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야, 북부 대륙보다 여기가 더 심하잖아!”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몰랐으면 다냐?”
“투덜거릴 시간에 불이라도 피워 봐. 추워 죽겠으니까.”
화르륵-!
레미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와중에도 마법을 캐스팅하여 빠르게 불을 피웠다.
일단 불을 피우고 몸을 녹여야 맵의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후우, 진짜 정령산 안에 이런 미친 맵이 있었을 줄이야.”
“내 말이.”
샤이야 봉우리는 정말 여러 모로 최악의 맵이었다.
온몸이 얼어붙게 만드는 한파도 문제였지만, 산줄기를 타고 쏟아지는 강풍이 가장 큰 문제였다.
상공으로 올라갈수록 풍속이 더욱 빨라지는 탓에 비행 소환수를 탑승하여 이동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니 말이었다.
처음에 레미르를 부를 때만 하더라도 아이언을 타고 금방 용암지대를 찾아낼 생각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난관을 만난 셈이었다.
뿌득- 뿌드득-.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눈밭을 겨우 헤집고 올라선 이안이, 레미르가 피운 불길 앞에 손을 가져다 대어 잠시 몸을 녹였다.
“후흐음.”
-따뜻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체온이 올라갑니다.
-한기 저항력이 5퍼센트만큼 상승하였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레미르를 데려온 것은 신의 한 수인 것 같았다.
‘이그라트 아머 때문에 레미르 누나를 불러온 거였는데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을 줄이야…….’
이안은 정령계에 있는 용암지대를 밟아 본 적은 없었지만, 영웅의 협곡에서 겪었던 용암지대와 비슷한 콘셉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말 그대로 용암 그 자체인 맵 안에서 화염 대미지를 버텨 내며, 그곳의 몬스터들을 사냥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때문에 홍염의 군주 레미르만이 가진 스킬인 ‘이그라트 아머’는, 용암 맵에서 필수적인 스킬이라 할 수 있었다.
화염피해 15퍼센트 무효화만 해도 상당한 도움이 되는데, 여기에 화염저항 능력치가 추가로 20퍼센트나 더 붙어 있었으니 말이다.
이안이 준비한 화염저항 장비들에 용암의 마법 장화.
레미르의 이그라트 아머까지 더해진다면 용암 위에서 제법 버텨 낼 수 있으리라.
“불지옥에 대비하려고 누나를 데려왔는데, 그 전에 얼어 죽게 생겼네.”
이안의 말에, 레미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하였다.
“피올란 님도 데려왔어야 했어.”
“하긴, 피올란 님이 있었으면, 한기저항 마법을 덕지덕지 발라 줬을 테니까.”
레미르가 피워 올린 불길 앞에서 잠시 몸을 녹인 두 사람은, 곧 다시 눈보라를 헤치고 걸어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목적지가 명확하지 않았더라면 이 한파에 당황하여 후퇴하였을지도 몰랐지만, 다행히 두 사람은 구체적인 목적지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정상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누나.”
“그래, 조금만 더 버티면서 올라가 보자고.”
마그번은 분명히 샤이야 봉우리의 꼭대기에 용암의 대지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고, 정령이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중간중간 제법 높은 레벨대의 기계괴수들이 두 사람을 공격하기도 하였지만…….
“앗, 저기……!”
“누나, 광역기 캐스팅 시작해!”
“알겠어!”
콰쾅- 쾅-!
이안과 레미르는 깔끔한 호흡을 자랑하며 녀석들을 가볍게 제압하였다.
“그나저나 가신들은 왜 데려오지 않은 거야, 이안?”
“어차피 화염 저항 장비 없이 걔들 데려와 봐야, 별로 도움도 안 될 것 같아서.”
“음…….”
“화염 저항 잘 붙은 장비는 전부 내가 둘둘 두르고 왔거든.”
“그렇다면 뭐…….”
“내 생각인데, 아마 소환수도 거의 소환하지 않고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어.”
“맞아. 괜히 파티 구성원 많으면, 이그라트 아머 쿨 관리도 힘들고 전투가 힘들어질지도 몰라.”
한파를 뚫고 등산하는 와중에도, 용암지대를 공략할 계획을 세우며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이안과 레미르.
그리고 그렇게 2~3시간 정도가 훌쩍 지나고 난 뒤.
근성으로 눈보라를 뚫은 두 사람은, 구름이 걸려 있는 최정상까지 꾸역꾸역 도착할 수 있었다.
휘이이잉- 펄럭-!
어마어마한 강풍에 나무가 활처럼 휘어지는 것을 보며, 이안은 혀를 내둘렀다.
“와씨, 꼭대기라 그런가, 바람이 아까보다 더 세네.”
“그래도 뭔가 기분 탓인지, 추위는 좀 덜해진 것 같지 않아?”
“어, 누나 말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레미르의 이야기를 들은 이안은, 뭔가 직감적으로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옷 사이를 파고들던 차가운 한기가 급속도로 줄어드는 것을 느낀 것이다.
‘정말 이 냉골 가운데에 용암의 대지가 있었다니…….’
평범한 유저였더라면 도착하기도 전에 얼어 죽었거나 기계괴수들에게 맞아 죽었을 험난한 코스.
히말라야 산맥도 울고 갈 험준한 등반코스를 클리어한 두 사람의 눈앞에 드디어 붉은 대지가 펼쳐졌다.
부글- 부글부글-!
시뻘겋게 끓어오르는 용암들과 마치 징검다리처럼 그 사이에 듬성듬성 솟아 있는 달궈진 바윗덩이들.
“누나, 준비됐지?”
“잠시만, 정비 한 번만 할게.”
“오케이.”
용암 안에서 빼꼼 머리를 내민 라바 스폰들을 보며, 이안은 길잡이(?)를 소환하였다.
화르륵-!
-화염의 정령 ‘마그번(상급 정령)’을 소환하였습니다.
-소환 지속 시간 : 674분 59초/675분
-정령을 소환하였습니다.
-정령 마력이 소모되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눈앞에 나타난 마그번에게 이안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마그번, 여기가 네가 말한 그 용암의 대지가 맞지?”
그리고 다행히도 마그번은, 이안의 기대에 부응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그렇다 주인. 이 험지를 용케도 찾아내었군.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기다렸다는 듯 다시 입을 여는 이안.
“그럼 이제 ‘그것’들이 어디 있는지 알려 줘.”
-극열(極熱)의 힘이 담긴 고대의 아티팩트를 말함이겠지?
“당연하지.”
이안의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인 마그번은, 고개를 휙 돌리며 허공으로 가볍게 날아올랐다.
정상에 오른 순간 거짓말처럼 강풍은 사라졌기 때문에, 마그번은 어렵지 않게 허공을 부유할 수 있었다.
-저기 저곳, 보이는가, 주인?
“응?”
-저 분화구의 한 가운데, 계단처럼 생긴 곳 말이다.
마그번의 말을 들은 이안은, 곧바로 아이언을 소환하여 날아 올랐다.
지상에서는 마그번이 말한 위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레미르를 뒤에 태운 뒤 허공으로 살짝 날아오른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아래를 내려다 본 두 사람은, 적잖이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저게 뭐야……?”
“미친, 진짜로 계단이 있잖아?”
용암으로 가득 찬 분화구의 한 가운데, 마그번의 말처럼 정말로 계단이 있었으니 말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것은 어딘가 위층으로 이어진 계단이 아니었다.
물리법칙을 완전히 무시한 채, 용암 아래쪽으로 뻔뻔하게(?) 이어져 있는 계단 통로.
계단은 보는 것만으로도 뜨거움이 느껴질 만큼 새빨갛게 달궈진 바위들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것을 본 이안과 레미르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집어삼켰다.
“영웅의 협곡에 있던 용암지대는 양반이었네…….”
“저건 아예 불지옥 안으로 들어가란 얘기잖아?”
두 사람의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린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두 사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곳이 바로 용암지대 세트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는, 숨겨진 던전의 입구일 것임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마그번이 입을 열었다.
-저 안에 들어간다면, 주인이 원하는 고대의 아티팩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들어가서 냅다 뒤지면 돼?”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주인이 말한 방법은 아닐 것 같다.
“…….”
아이언의 위에서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한 이안과 레미르는, 서로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고생을 해 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잖아?”
“후우, 그것도 그러네. 일단 한번 해 보지, 뭐.”
퀘스트 지옥을 피하기 위해 이안의 부름에 응했다가 싱크로율 100퍼센트짜리 불지옥을 만난 레미르.
하지만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이안은 비록 그녀를 불지옥에 데려왔을 지언정, 달콤한 사탕발림도 빼놓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용암장비 중에 완드나 지팡이라도 나오면, 무조건 누나한테 줄게.”
“그 약속, 믿어도 되는 거지?”
“당연하지! 로브가 나와도 누나 줄게.”
“……!”
이안이 신고 있는 용암의 장화가 어떤 성능을 지녔는지 알고 있는 레미르는, 그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그리고 다음 순간.
“자, 이제는 준비됐지?”
“그래. 한번 가 보자. 이그라트 아머!”
화르륵-!
레미르의 화염저항 버프를 둘둘 두른 두 사람은 그대로 아이언의 위에서 뛰어내렸다.
분화구의 한가운데 보이는 어두운 계단실을 향해서 말이다.
이어서 두 사람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타는 듯한 강력한 열기가 느껴집니다.
-‘용암의 대지’ 던전을 최초로 발견하셨습니다.
-화염 저항력이 3퍼센트만큼 영구적으로 증가합니다.
-앞으로 일주일간 ‘용암의 대지’에서 획득하는 모든 경험치가 두 배가 됩니다.
-명성을 10만 만큼 획득하셨습니다.
……중략……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은…….
-용암의 열기로 인해 화염 피해를 입었습니다.
-생명력이 154만큼 감소합니다.
-생명력이 178만큼 감소합니다.
……후략……
제 발로 불지옥(?)에 입성하고 말았다.
* * *
기잉- 철컹-!
덜그럭- 쿵- 쿵-!
기름칠한 쇠뭉치가 맞물려 돌아가며, 규칙적인 기계음이 동굴 안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에, 작은 그림자 하나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왼쪽부터 재료를 채워 넣어야지, 멍청한 로봇 놈들아. 순서가 틀렸다고.”
기이잉!
“빨리 시키는 대로 움직여! 오늘 내로 공장 티어 한 단계는 올려야 해.”
드륵- 드르르륵-!
본인도 충분히 로봇처럼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로봇 놈들(?)을 열심히 굴리는 작은 그림자.
그의 정체는 바로 이안의 공장을 열심히 굴리고 있는, 성실한 로봇 관리자 P-77호였다.
“흐음, 그나저나 이안 이 친구는. 대체 어디서 이렇게 양질의 설계도들을 많이 구해 온 거지?”
처음 이안에게 찰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을 때만 하더라도, 77호는 그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찰리스가 얼마나 강한 힘을 갖고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77호의 생각은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이안이 구해 오는 기계설계도들의 수준이, 적어도 호루스 기지를 지키고 있을 기계 로봇들을 처치할 수 있어야만 획득 가능한 도안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77호는, 이안을 돕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찰리스의 기계군단에 맞서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높은 티어의 기계 로봇을 한 기라도 더 많이 생산해야 했으니 말이었다.
뚝딱- 뚝딱-.
스물 네 시간 중에 네 시간이나 되던 쉬는 시간도, 두 시간으로 줄여가며 업무량을 늘린 77호!
그런데 오늘도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던 77호에게, 오랜만에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이안 외에 유일하게 77호와 친분이 있는 존재들.
그들은 바로 이안의 가신들과 한 마리의 거북이였다.
“뿍, 우리가 왔뿍.”
“열심히 일하고 있었나, 77호?”
헬라임과 뿍뿍이의 등장에, 77호는 반가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맞았다.
한 번씩 그들이 이안의 심부름을 올 때면, 무지막지한 양의 자원들과 설계도를 가지고 오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연히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뿍뿍, 너도 그동안 열심히 이안을 도왔겠지?”
77호의 물음에, 뿍뿍이가 커다란 머리를 힘차게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물론이다뿍. 얼마 전에는 주인이랑 같이, 라카토리움에도 다녀왔뿍.”
“그게 정말이야?”
“그렇뿍. 찰리스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 주인이랑 같이 대도시 루탄을 열심히 돌아다녔뿍.”
“……!”
뿍뿍이의 이야기에, 77호는 적잖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이안이 범상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라카토리움의 대도시인 루탄까지 벌써 걸음을 했을 줄은 몰랐으니 말이었다.
“주인은 찰리스의 로봇군단과 싸우기 위해, 힘을 키우고 있뿍.”
“오오……!”
“반드시 주인과 함께 찰리스를 처단하고, 처남의 복수를 해낼 꺼다뿍.”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뿍뿍이와, 그를 마주보며 덩달아 진지한 표정이 된 77호.
“그래, 난 너희를 믿어. 너희라면 분명 찰리스를 처치하고 내게 자유를 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두 친구(?)의 끈끈하고 진지한 대화는 그리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아쉽게도 둘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실패한 헬라임이, 둘의 대화를 끊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노닥거릴 시간 없다, 뿍뿍. 폐하께서 다음 주까지 전원 70레벨을 달성하라고 하셨다.”
“뿍. 헬라임의 말이 맞뿍. 찰리스와 싸우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뿍.”
머리털 나고 처음 찾아온 사랑(?) 앞에서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거북이가 되어 버린 뿍뿍이.
77호에게 가져온 설계도들을 전부 인계한 뿍뿍이와 헬라임은, 서둘러 기계공장을 빠져나왔다.
이렇게 이안이 없는 곳에서도 그의 가신들과 소환수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