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7화 7. 라카토리움 입성 (3) >
* * *
정령계가 인간 진영에 우호적이듯, 기본적으로 기계 문명은 마족 진영에 우호적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정령계가 무조건적으로 마족에 적대적이고, 기계 문명이 무조건적으로 인간에 적대적인 것은 또 아니었다.
이안은 그것을, 이번에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만약 무조건 적으로 인식되었더라면, 난 도시에 아예 발을 디딜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거신족의 땅 엘라시움에서도, 이안은 그들의 마을인 쟈크람 마을에서 무리 없이 콘텐츠들을 이용했었다.
물론 ‘용맹의 펜던트’라는 특수한 아이템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지만, 어쨌든 진영별로 완전히 막혀 있는 콘텐츠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거신족이 이안에게 적대적이었던 것은 ‘인간 종족’이라서가 아니라, 용족의 가문과 동맹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적대 진영인 양쪽 진영의 메인 퀘스트를 동시에 진행한다거나 하는 건 스토리상 불가능하겠지만 말이지.’
이안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켄토’로부터 받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오염된 대지를 들쑤시고 다녔다.
그리고 그렇게 30~40분 정도 필드를 헤맨 결과, 금방 ‘루칼로스’를 찾아 처치할 수 있었다.
그륵- 크워어어!
쿵-!
처음 만났을 때에는 나름 고생을 하였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소환수를 소환조차 하지 않은 채 능숙하게 루칼로스를 처치하는 이안.
이어서 이안은, 몬스터의 사체를 수집할 때 쓰는 아티팩트를 사용하여 능숙하게 녀석을 인벤토리에 구겨 넣었다.
몬스터의 사체를 봉인하는 아티팩트는 수많은 퀘스트에서 쓰이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레벨이 되는 카일란 유저라면 대부분 휴대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정말 이것만 있으면 생산 로봇의 설계도를 만들어 주겠다는 거지?”
이안의 머릿속에,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물건이 너무 싸면 자연스레 의심이 되듯, 퀘스트 난이도에 비해 과분한 보상이 살짝 이안의 마음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유저도 아닌 NPC(?)가 사기를 칠 리는 없었기 때문에, 이안은 서둘러 약속 장소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루탄의 위성도시 토라프였나? 루탄의 동남쪽에 위치해있다고 했었지?’
그러나 이안이 한 가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전투 능력이 거의 없는 기계 공학자 켄토의 입장에선, 반대로 5티어 기계 괴수의 사체가 훨씬 더 구하기 힘든 것이었으니 말이다.
만약 켄토가 용병을 직접 고용해서 루칼로스의 사체를 구해야 했다면, 몇 배 이상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을 터.
이것은 사실상 양쪽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거래였던 것이다.
“토라프에 가서 켄토를 다시 만나면 기계 문명의 세계관에 대해 좀 물어봐야겠어. 찰리스의 행방도 알아볼 겸 말이야.”
아이언을 탑승한 이안은, 토라프를 향해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켄토가 말했던 것처럼, 이안은 어렵지 않게 위성도시 토라프를 찾아낼 수 있었다.
토라프는 루탄의 위성도시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루탄과 철도로 이어져 있었고, 그것을 따라 내려가니 금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어서 토라프에 들어선 이안은, 켄토의 연구소를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대도시인 루탄과 비교하면 작은 촌락이나 다름없는 토라프는, 조금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면 한눈에 들어올 수준이었다.
‘연구소 겸 기계 제작이 가능한 공장일 테니까, 저기 저쪽에 있는 공장지대에 켄토의 연구소가 있겠군.’
판단을 마친 이안은 아이언의 등에서 내려, 공장지대를 향해 걷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켄토를 만나러 가는 이안은 점점 더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퀘스트(?)로 받게 될 보상인 ‘3티어의 생산 로봇 설계도’ 또한 분명 기대되는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켄토를 통해 본격적으로 기계 문명의 콘텐츠에 대해 알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었다.
* * *
“후우, 이게 무슨 꼴이야. 이 중요한 타이밍에 데스 페널티라니.”
“며칠 날려 버린 거지, 뭐.”
“젠장, 비겁한 마족 놈들. 처음부터 계획된 도발이었어.”
“그러게 말이야. 거기에 그런 함정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균열 전투에서 참패로 인해 고스란히 전멸당해 버린 랄프와 체스크, 그리고 이니스코의 일행들.
데스 패널티가 끝나고 다시 접속한 그들의 두 눈은 분노로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드롭한 아이템들 중에 고가품들도 많았지만, 그것들 때문에 열이 뻗친 것은 아니었다.
그들 개개인이 다 미국 서버에서 알아주는 랭커인 만큼, 잃어버린 아이템들을 제하더라도 자본은 넉넉할 만큼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역시 잃어버린 경험치와 하루라는 시간이었다.
그들이 속한 길드에서 이제 곧 본격적으로 정령계에 입성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안에 미리 길을 닦아 놓겠노라 호언장담하고 넘어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족 놈들한테 당해서 전멸당한 사실이 길드 내에 쫙 퍼졌던데…….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구먼.”
“후우, 그러니까 체스크, 어떻게든 남은 시간 동안, 뭔가 성과를 만들어 내야 해.”
“맞아, 랄프 형. 비록 함정에 빠져서 굴욕을 겪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콘텐츠들을 찾아 놓으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거라고.”
프뉴마 마을의 광장에 모인 세 사람은, 더욱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길드의 손실을 복구하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지난 전투에서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냐, 이니스코.”
“성과라면……?”
“기계 문명 라카토리움으로 통하는 길을 발견했잖아. 비록 거기가 함정이기는 했지만 말이야.”
“아, 그것도 그러네.”
체스크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랄프 형 말이 맞아. 나도 그걸 생각하고 있었거든.”
체스크는 힘주어 말을 이었다.
“녀석들의 함정에 철저히 대비한 뒤에 다시 균열을 공략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야. 균열 너머에 있는 라카토리움까지 길을 뚫어 놓는다면, 길드에서도 우리 공로를 무시하진 못할 거라고.”
이니스코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시간이 부족하진 않을까?”
이번에는 랄프가 대답하였다.
“확실히 넉넉한 시간은 아니지. 아마 일주일 내로 길드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할 테니 말이야.”
체스크가 말을 붙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한 시간도 아니야. 한 이틀 정도 꼼꼼하게 준비하고 다시 도전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다시 의기투합한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틀 동안 어떤 준비를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그들의 스펙을 올릴 수 있을지에 대해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고민을 해 본 결과, 세 사람은 공통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내가 체감하기로, 분명 우리 쪽이 그 마족 랭커들보다 레벨 대는 높았던 것 같아.”
“맞아. 수적으로 불리했는데도 처음에는 확실히 유리하게 밀어붙였으니까.”
“지금 우리가 단기간에 스펙을 올릴 방법은, 역시 상위티어 초월 장비를 파밍하는 게 답이겠어.”
눈빛을 교환한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령계에서 초월 장비를 파밍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명확한 콘텐츠가 세 사람의 머릿속에서 동시에 떠오른 것이었다.
“가자. 지금 우리 레벨 대라면, 60층까진 가볍게 뚫을 수 있을 거야.”
“좋았어. 전설 등급 초월 장비 한두 개만 먹어도, 전력이 훨씬 강화되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세 사람은, 곧바로 정령의 도장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지금, 상위 티어의 장비 상자를 까 볼 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깨어나야 할 꿈이겠지만 말이었다.
* * *
켄토를 만난 이안은, 망설임 없이 인벤토리에서 루칼로스의 사체를 꺼내었다.
그리고 바닥에 축 늘어진 거대한 기계 몬스터의 사체를 확인한 켄토는, 적잖이 흥분하였다.
“오오, 이건 진짜…… 루칼로스의 사체잖아!”
켄토의 반응을 본 이안은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그의 반응이 좋다는 것은 퀘스트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고, 이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었다.
“당연하죠. 제가 금방 구해 오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 하핫. 정말 대단하시네요!”
“자, 그럼 설계도를 주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여기, 이안 님께 드릴 설계도를 미리 준비해 두었지요.”
켄토는 망설임 없이 이안에게 설계도를 건네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 든 이안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행복이 떠올랐다.
설계도의 이름만 보더라도, 고급 설계도라는 것을 곧바로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로봇 기술자 설계도’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로봇 기술자라……. 어쩌면 이건, 77호와 동급 정도 되는 로봇일지도 모르겠는데?’
그리고 생각이 여기까지 떠오르자, 그동안 잊고 있었던 에픽 퀘스트의 존재도 불현듯 떠올랐다.
‘가만. 그럼 혹시 이 친구가 로봇 관리자 설계도도 만들 수 있으려나?’
과거 이안이 처음 77호를 만났을 때, 그로부터 받았던 퀘스트인 ‘P-77호의 우울(에픽)(히든)’퀘스트.
해당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 필요한 아이템이 바로 로봇 관리자의 설계도였고, 켄토에게서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손쉽게 에픽 퀘스트를 클리어하게 되는 것이었다.
루칼로스의 사체를 이리저리 뜯어 보며 기뻐하는 켄토를 향해, 이안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켄토 님.”
“넵?”
“혹시, 로봇 관리자의 설계도도 만들 수 있으신가요?”
그런데 이안의 질문을 들은 켄토의 표정이 돌연 묘하게 변하였다.
“……!”
그리고 적잖이 놀란 표정으로 오히려 이안을 향해 되물었다.
“로봇 관리자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계신 거죠?”
“네……?”
“오래 전에 폐기된, 그 금단의 설계도에 대해 어떻게 알고 계신건지 궁금해서요.”
“그, 그게 금단의 설계도인가요?”
켄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 로봇 관리자는 기계공학자들이 탄생시킨 로봇들 중에 유일하게 자아를 가질 수 있는 로봇이거든요.”
“아……?”
그리고 켄토의 입에서 이어진 다음 말은, 그야말로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찰리스 학파에서 개발했던 로봇 설계도인데, 지금은 아마 폐기되었을 거예요.”
“찰리스…… 학파라구요?”
“네. 설마 찰리스 학파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 겁니까?”
켄토의 입에서 나온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들은 이안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기계 공학자들 안에서도 파벌이 따로 있었어? 이거 약간 정령계의 세계관이랑도 오버랩되는데…….’
흥미가 동한 이안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하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정령계에서 만났던 찰리스와 P-77호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나씩 꺼내 볼 생각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안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켄토 또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에 집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