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8화 4. 고대 정령의 비밀 (3) >
* * *
우르릉- 쿵- 쿠르릉-!
마치 천둥번개가 내려치기라도 하듯, 커다란 진동음이 던전 내부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커다란 소리를 들은 이안 일행은, 당황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였다.
“뭐, 뭐야 갑자기?”
“던전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건가?”
이제 거의 40시간에 가깝도록, 잠도 한숨 자지 않고 노가다를 감행해온 세 사람.
그 오랜 시간동안 던전을 샅샅이 뒤진 세 사람은, 당연히 던전의 보스가 있을 보스 룸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오염된 고대의 정령수 던전은 특별한 클리어 조건이 걸려 있지 않은 던전이었기 때문에, 분명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면 클리어가 가능할 터.
하지만 그들은 보스 룸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지금 세 사람의 목표는 오로지 폭풍의 정령을 잡는 것이었고, 때문에 던전을 클리어해서는 안 되니 말이다.
하지만 아직 조화의 구슬을 전부 소진하지 못한 이 시점.
던전에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고막을 울릴 정도의 굉음과 함께, 던전 전체가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떡하지? 피해야 하나?”
“피할 곳이 어딨어. 사라는 광역쉴드 마법 캐스팅할 준비 하고, 바네사는 소환수 한 자리로 다 모아.”
“알겠어!”
그리고 그 갑작스런 변화에, 이안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젠장, 뭐지? 아직 오십 마리는 더 잡아야 하는데……?’
목표치를 다 채우지 못한 이 시점에서 노가다를 끝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말이다.
‘딱 5시간만 더 있으면 될 것 같은데……!’
그리고 이안의 불길한 예감은 정확히 적중하고 말았다.
동시에 세 사람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 것이다.
띠링-!
-‘오염된 고대의 신령수’가 80퍼센트 이상 정화되었습니다.
-신령수의 안에 잠들어 있던 ‘오염된 크릭스’가 깨어납니다.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보스가 강제로 깨어나는 거군.’
어떻게든 클리어 시점을 미루기 위해 보스 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세 사람이 너무 오래도록 던전 안에서 노가다를 감행하자 결국 강제로 보스가 깨어난 것이다.
깨어난 보스를 무시하고 노가다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이 시점에서 이안의 노가다는 강제로 마무리된 것.
“보스 페이즈야!”
보스 페이즈를 부르짖는 사라의 목소리가 어쩐지 신나 보였지만, 그와 별개로 이안은 씁쓸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뭐, 좀 아쉽긴 하지만, 잡은 폭풍의 정령들 중에 잠재력 터지는 녀석이 못해도 하나쯤은 있겠지.’
이안의 인벤토리에 모인 폭풍의 정령들은, 총 삼백 마리 정도이다.
그리고 이런 정도의 숫자라면, 잠재력이 뛰어난 개체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일 수도 있었다.
“저쪽에서 보스가 튀어나올 것 같아. 준비해, 이안!”
바네사의 외침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은 이미 이안도 예상하고 있었던 보스 룸의 입구였고, 그 안쪽에서 시커먼 기운이 흘러나오는 게 보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크릭스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정령은 아닌 것 같고……. 정황상 기계 괴수일 확률이 높아 보이는데.’
침착히 상황을 파악한 이안은 들고 있던 창을 다시 고쳐 쥐며 언제든 튀어 나갈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잠시 후.
그륵- 그르륵-!
꿈틀거리는 어둠 속에서 듣기 거북한 기계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 * *
“휘유, 정령계는 오랜만이군.”
“확실히 정령계가 분위기는 좋아. 명계는 너무 축 처지는 느낌이었어.”
“그러게 내가 진작 오자고 했잖아, 랄프 형.”
“그때 왔으면 이렇게 빨리 성장 못했을 걸? 정령계가 좋긴 해도, 경험치 파밍 속도는 명계만 한 데가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미국 서버의 랭커 삼인방, 랄프, 체스크, 그리고 이니스코.
초기에 정령계에서 빠르게 콘텐츠를 선점하던 그들은, 이안이라는 비상식적인 벽에 가로막혀 명계로 다시 선회했었다.
물론 가장 많은 랭커들이 몰려 있는 명계에서의 경쟁도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곳에는 길드의 기반이 있었으니 말이다.
길드에선 확보한 사냥터와 자원을 대놓고 랭커들에게 밀어주니, 세 사람은 당연히 빠르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 결과 랄프의 초월 레벨은 무려 48레벨이었고, 체스크 또한 47레벨까지 경험치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소환술사인 이니스코의 초월 레벨도 45가 넘은 상황이었으니, 확실히 빠르게 성장했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이니스코의 입장에서 아쉬운 것은 정령계의 콘텐츠들 중 소환술사에게 중요한 것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계속 정령계를 뚫었으면 지금쯤 중급 정령술까진 찍었을 텐데…….’
레벨은 높지만 정령과 관련된 콘텐츠의 진행도가 너무 낮았으니, 이니스코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뭐, 이제라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되지. 이번엔 길드에서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기로 했으니까.’
이제 곧 그들을 따라 정령계로 넘어올 길드원의 전력을 생각하며, 이니스코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명계에 집중하고 있던 길드의 전력이 정령계로 넘어오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쭉쭉 진행하고 있던 명계의 콘텐츠가 막혀서 정체되기 시작했고, 때문에 더 이상 길드 차원에서 성장 효율이 나지 않은 것이다.
첫 번째 저승의 강인 아케론을 넘어 에레보스에 진입한 뒤, 시름의 강 코퀴토스와 불길의 강 플레게톤까지는 어렵지 않게 넘었지만, 에레보스를 벗어나 명계의 더 깊은 곳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망각의 강 레테를 넘어야 하는데, 그 방법을 아직 아무도 찾지 못한 것이다.
이안이 용천에서 중천을 넘어 태천으로 진입할 방법을 찾지 못했듯, 명계를 공략하던 최상위권 랭커들도 망각의 강 앞에서 콘텐츠가 막혀 버린 것.
하여 세 사람이 속한 길드들은, 콘텐츠 진행의 단서를 찾기 위한 소수인원만을 남겨 놓은 채 정령계로의 이주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대대적인 길드원의 이주에 앞서 가장 정령계의 경험이 풍부한 세 사람이 먼저 정령계로 넘어온 것이고 말이다.
셋 중에서도 가장 의욕이 넘치는 이니스코가 두 형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전에 미리 와서, 정령산 중턱으로 들어가는 루트를 몇 개 찾아 놨어.”
“오호, 그래?”
“길목에 호루스 전진기지라고 기계 문명 몬스터들이 지키고 있어서 그땐 들어가 보지 못했는데, 아마 지금 우리 전력이면 엄청 쉽게 클리어할 거야.”
“난이도가 어느 정돈데?”
“일반 몬스터들이 초월 30레벨 대였던 걸로 기억해.”
“후후, 그 정도야 가볍지.”
그동안 거침없이 성장한 덕분인지, 자신감이 충만한 랄프와 체스크.
이니스코는 그런 둘을 이끌고 금방 정령산의 깊숙한 곳으로 진입하였다.
그의 주력 소환수 중 하나인 그리핀 킹의 등은 세 사람을 태우기 충분할 정도로 넓었으며, 호루스 전진기지의 위치도 이미 알고 있었으니 그리핀 킹의 빠른 기동성을 이용해 순식간에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다.
하지만 목적지에 다다른 이니스코는 살짝 얼굴이 구겨졌다.
분명 보름 전쯤만 해도 멀쩡히 있었던 호루스 전진기지가 어느새 철거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흐음, 그새 누가 공략에 성공했나 보네.”
이니스코의 중얼거림에, 랄프가 피식 웃으며 대꾸하였다.
“시간이 그만큼 지났는데 아직 30레벨 대 필드가 안 뚫렸겠어? 남아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야.”
“하긴, 그것도 그래.”
“그래도 정령계가 비교적 진도가 느린 편이라니, 한 일주일 안에는 우리가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겠지.”
이어서 정령산 중턱에 무혈 입성한 랄프의 일행은, 그 주변을 빠르게 탐색하며 오르기 시작하였다.
어차피 현재 그들의 레벨에 맞는 사냥터나 콘텐츠를 찾으려면 정령산의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필드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대부분 무시하고 수색에 집중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1시간 정도가 더 지났을까?
그리핀 킹을 타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세 사람은, 잠시 자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콘텐츠인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이한(?) 장면을 발견했으니 말이다.
풀숲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니스코가 옆에 있던 랄프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형, 저게 대체 뭘까?”
“그걸 내가 알겠냐?”
“저 드래곤이랑 늑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근데 저 안쪽에 무슨 아지랑이라도 피어오르는 건가? 왜 이렇게 희미하게 보이지?”
숲속에 모여 있는 열댓 마리가 넘는 기계 괴수들.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이며, 마치 종잇장 찢듯 기계 괴수들을 분해(?)시키는 푸른 비늘의 드래곤과 붉은 갈기의 펜리르.
그것은 분명 쉽게 이해하기 힘든, 진귀한 장면이 분명하였다.
“간혹 필드 몬스터끼리 전투하는 경우가 있긴 하던데……. 그런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체스크의 말에, 랄프와 이니스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은데…….”
“모르긴 몰라도, 아마 저 드래곤이 필드 에픽 몬스터인 것 같아. 최소 전설 등급이겠지.”
사실 그 둘은 분명 랄프 일행과 마주한 적 있었던 소환수들 이었지만, 그들은 낯익다는 정도로만 생각할 뿐 두 소환수의 정체를 떠올리지 못하였다.
마주했던 역사가 너무 오래되었을 뿐더러, 소환술사 없이 알아서 전투 중인 소환수는 상상하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기운 때문에, 전장이 자세히 보이지도 않았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니스코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싸움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리가 한번 덮쳐 볼까?”
이니스코의 물음에, 랄프가 씨익 웃으며 대답하였다.
“이니스코 너, 저 드래곤이 탐나서 그러지?”
“그렇지, 뭐.”
“나도 한번 공략해 보고 싶긴 한데…….”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드래곤과 펜리르의 전투를 잠시 지켜보던 세 사람.
그런데 다음 순간…….
“……!”
탐욕어린 표정으로 전장을 지켜보던 랄프 일행은 순간 당황했다.
갑자기 전장의 공간이 일렁이더니, 주변의 환경이 바뀐 것이다.
“뭐,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눈앞에 보이던 드래곤과 펜리르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은 물론 미니 맵까지 깜깜하게 변해 버린 랄프 일행들.
하지만 그들의 당혹스러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들이 우왕좌왕하던 그때, 상황을 친절히 설명해 주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 것이다.
띠링-!
-‘아로니에의 미로’ 맵에 입장하셨습니다.
-제한 시간 내에 길을 찾지 못하면, 미로의 밖으로 강제로 소환됩니다.
-남은 제한 시간 : 90분
이어서 까만 숲속의 어둠을 뚫고, 세 사람의 눈앞에 두 개의 포털이 생성되기 시작하였다.
* * *
“이 정도면 준비는 다 끝난 것 같군.”
“그렇습니다, 마스터.”
“우리가 없는 사이, 정령계 쪽에 별일이 생기지는 않았겠지?”
“걱정 마십시오, 마스터. ‘아로니에의 미로’ 안쪽에 거점을 설정해 두었으니, 쉽게 인간진영 랭커들에게 발각되지 않을 겁니다.”
“하긴, 그 더러운 미로에서 길 찾는 게 보통 일은 아니지.”
“그렇습니다. 게다가 3티어의 기계 괴수들을 제법 많이 보내놓았으니, 혹여 발각된다 하더라도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정령계에 있을 허접한 인간계 랭커들의 실력으로는, 3티어 기계 로봇을 상대할 수 없을 테니 말이야.”
마족 진영의 길드들 중 최초로 정령계로의 대 이주를 진행 중인 다크루나 길드.
림롱과의 갈등 이후 호왕 길드에서 떨어져 나온 다크루나 길드는, 이미 보름 전부터 많은 전력을 정령계로 이주시킨 상태였다.
균열을 통해 기계 공장을 운반하고, 미리 제작해 둔 기계로봇들을 이동시켜서 자원 수급이 용이한 정령계에 아예 살림을 차릴 생각으로 말이다.
그리고 지금 그 대대적인 이주 계획은 막바지 단계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 이라한과 함께 이동 중인 이 기계 공장들만 전부 옮긴다면, 라카토리움에 차려 두었던 모든 기반이 싹 다 옮겨가는 셈이니 말이다.
“좋아, 좋아. 이주 끝나면 방어 타워부터 쫙 깔아 버리자고.”
“알겠습니다, 마스터.”
“준비해 둔 자원 싹 다 소모해서 방어 타워로 도배한다면, 호루스 본진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할 수 있을 거야.”
“후후, 물론입니다.”
수많은 기계 문명의 자원과 공장들을 대동하여 균열을 통과하기 시작한 이라한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찬란한(?) 미래를 생각하니 온몸을 짓누르는 차원 마력 속에서도 절로 흥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이라한과 솔린은 알 수 없었다.
이 균열을 통과하여 거점에 도착한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을 마주하게 될 것임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