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7화 4. 고대 정령의 비밀 (2) >
* * *
허탈감도 이런 허탈감이 있을까.
머리끝까지 기대가 차오른 시점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메시지가 뜨니, 이안은 허탈감을 넘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오, 어쩐지 잘 풀린다 했더니…….’
대충 몇 번 공방을 나눈 시점에서 이미 이안은 이 고대의 정령이 다른 파생 정령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포획에 성공한다면, 당장 실전에 투입하여 써먹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포획하여 상급으로 진화라도 시킨다면, 이안의 다른 신화등급 소환수들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을 수준의 전투력.
이안은 녀석이 상급 정령으로 진화한다면, 신화 등급 소환수 기준 초월 70레벨 이상의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획 불가라니……. 너무 아까운데.’
조건 불충족도 아니고, 아예 ‘조화의 구슬’을 사용조차 할 수 없는 대상이란다.
이것은 아무리 버그 플레이어(?)인 이안이라 해도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무력으로 녀석을 복종시키려 하더라도 구슬은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예 포획 방법 자체가 원천 차단되어 버리니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안은 쉽게 실망하지 않았다.
‘포획이 불가능한 건 확실히 아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고대의 정령이 필드에 뜨게 해 놓은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야.’
지금까지 이안이 플레이하며 경험한 카일란의 세계에는, 이유 없이 존재하는 콘텐츠가 단 하나도 없었다.
때문에 이안은, 지금 이안의 눈앞에 있는 이 고대의 정령도 분명 뭔가 단서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대의 정령과 관련된 특별한 세트 아이템이라든가, 아니면 고대의 정령을 얻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든가…….’
하여 이안은, 일단 망설임 없이 녀석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몬스터 주제에 감히 허탈하게 만든 대가(?)를 치러 주고 어떤 아이템을 드롭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이언, 폭풍의 숨결!”
캬아아오오-!
‘급가속’ 고유 능력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스피드를 얻은 아이언이, 순식간에 폭풍의 정령을 밀쳐 내고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당황하여 비틀거리는 폭풍의 정령 ‘블레스티아’를 향해, 자신의 가장 강력한 공격기술인 폭풍의 숨결을 뿜어내었다.
-소환수 ‘아이언’의 고유 능력, 폭풍의 숨결을 발동합니다.
-‘바람신의 축복’ 고유 능력으로 인해 상승한 스텟이 적용됩니다.
-‘일체화’ 고유 능력으로 인해 상승한 스텟이 적용됩니다.
-폭풍의 힘이 몰아치기 시작합니다.
콰아아아-!
쩍 벌어진 아이언의 사나운 입 사이로, 강렬한 폭풍의 힘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강력하고 거대한 아이언의 숨결을, 블레스티아는 결코 피할 수 없었다.
넓은 범위로 퍼져 나가는 범위 공격을 너무 가까이서 급작스럽게 맞이했으니, 피할 방법 자체가 없던 것이다.
-크윽, 이런……!
그리고 아이언의 브레스를 맞은 것은, 블레스티아뿐만이 아니었다.
폭풍의 숨결은 부채꼴로 워낙 넓게 퍼져 나가는 범위 공격이었기 때문에, 그 뒤쪽에 있던 정령들 또한 영문조차 모른 채 폭풍의 힘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것이다.
-크어억……! 살려줘!
-도, 도망쳐! 끄아아악!
이어서 블레스티아를 포함해 폭풍의 숨결에 휩쓸린 오염된 정령들은, 제대로 저항조차 해 보지 못한 채 그대로 소멸되고 말았다.
이미 생명력이 바닥나 있던 블레스티아는 그렇다 치고, 생명력 게이지에 흠집 하나 나지 않았던 다른 정령들까지도 한 방에 몰살당한 것이다.
-폭풍의 중급 정령 ‘블레스티아’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블레스티아’의 생명력이 68,984만큼 감소합니다.
-‘블레스티아’의 생명력이 69,105만큼 감소합니다.
-‘블레스티아’의 생명력이 전부 소진되었습니다.
-‘블레스티아’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늪지의 상급 정령 ‘포나토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포나토스’의 생명력이 72,215만큼 감소합니다.
-‘포나토스’의 생명력이 전부 소진되었습니다.
-‘포나토스’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후략……
아이언의 숨결이 정령의 전신을 휘감는 동시에 이안의 눈앞에 주르륵 하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쌍둥이 자매는 입을 쩍 하고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아이언이 브레스를 뿜는 모습을 방금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와, 미친……! 저거 뭔데?”
“하, 한 방에 다 죽였어!”
“말도 안 돼!”
만약 이안의 목적이 던전을 쓸고 다니며 레벨 업을 하는 것이었다면, 이미 폭풍의 숨결을 여러 번 사용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 오염된 고대의 신령수 던전에서 이안의 가장 큰 목표는 정령 포획이었고, 때문에 이 고유 능력을 사용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두 자매가 보고 있다시피 한 방에 다 죽어 버리니 말이다.
하지만 이안이 보기에, 이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현재 아이언에게 걸려 있는 버프 상태만 보더라도, 답은 나오는 것이었다.
-급가속(Max/15Stack)
민첩성 : +112.5퍼센트
*잔여 지속 시간 : 504초
바람신의 축복
모든 능력치 : +15퍼센트
*잔여 지속 시간 : ∞
공격력 : +650(레벨(65)*10)
방어력 : +650(레벨(65)*10)
*전투 상태 해제 시 소멸
일체화
모든 능력치 : +10퍼센트
이동속도 : +20퍼센트
*소환술사 탑승 해제 시 소멸
20레벨은 커버될 정도의 깡 스텟 버프를 받은 상태에서, 다음과 같은 미친 계수를 가진 광역기를 사용했으니…….
-*폭풍의 숨결
(재사용 대기 시간 : 10분)
철갑신룡이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강력한 바람 속성의 숨결을 전방으로 내뿜습니다.
바람의 숨결은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나가며, 범위 내 대상에게 강력한(공격력의 650퍼센트+방어력의 300퍼센트+민첩성의 900퍼센트)바람 속성의 피해를 입힙니다.
전투력으로 환산했을 때 고작 초월 50레벨 대인 정령들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재앙과도 같은 폭풍이었다.
스하아아-!
그리고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
펄럭-!
이안을 태운 아이언이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정확히는 고대의 정령이 소멸하고 난 그 앞에 말이다.
탓-!
이어서 가벼운 몸짓으로 아이언의 등에서 내린 이안은,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물체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고대의 정령이 소멸하면서 남기고 간 정체를 알 수 없는 황금빛의 호리병.
복잡하고 화려한 문양이 양각되어 있는 그 호리병을 손에 쥔 이안은, 기대 어린 표정으로 그것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신비로운 외형도 외형이었지만, 정말 어렵게 찾아낸 녀석이 드롭한 아이템인 만큼 보통 물건은 아닐 것이었다.
-‘고대의 정령혼’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이어서 이안은, 마른침을 꿀꺽 집어삼키며 아이템의 정보 창을 확인하였다.
-고대의 정령혼
분류 : 잡화
등급 : 전설(초월)
고대 자연의 힘이 담겨 있는 진귀한 물건입니다.
정령에게 고대의 정령혼을 사용할 시 일정 확률로 해당 정령을 ‘고대의 정령’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높은 잠재력을 가진 정령에게 사용할수록 성공 확률이 증가하며, ‘파생 정령’에 한해서만 사용이 가능합니다.
폭풍의 정령 ‘블레스티아’가 남기고 간 정령혼으로, ‘폭풍’속성을 가진 정령에 한해서만 사용이 가능합니다.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사용 즉시 소멸되는 아이템입니다.
*유저 ‘이안’에게 귀속된 아이템입니다.
다른 유저에게 양도하거나 팔 수 없으며 캐릭터가 죽더라도 드롭되지 않습니다.
* * *
‘고대의 정령혼’ 아이템의 정보 창을 확인한 순간.
이안은 이 ‘오염된 고대의 신령수’ 던전 콘텐츠의 모든 것을 깔끔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안이 짐작했던 대로 고대의 정령은 곧바로 포획이 가능하지는 않을지언정, 고대의 정령 획득과 연관된 단서를 제공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금부턴 이 던전 안에 있는 모든 폭풍의 정령들을 싹 쓸어 잡으면 되겠네.’
지금까지 이안이 포획한 정령의 숫자는 거의 400개체에 육박한다.
그리고 그 중 폭풍의 정령 블레스티아는 대략 150개체 정도였다.
‘남은 조화의 구슬이 200개니까, 이건 싹 다 폭풍의 정령으로만 채워야겠어.’
이안이 얻은 고대의 정령혼은 폭풍의 정령으로부터 나온 정령혼이다.
때문에 폭풍의 정령에게밖에 사용할 수 없었고, 그 중에서도 잠재력이 가장 뛰어난 녀석에게 사용해야만 했다.
기왕이면 잠재력 높은 고대의 정령을 얻는 것이 좋은 것도 당연했지만, 잠재력이 높을수록 고대의 정령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고 정보 창에 명확히 명시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까지 잡은 백오십 마리 중에도 충분히 좋은 녀석들이 있었지만, 이안은 만족할 수 없었다.
‘실패는 없어. 무조건 성공해야 해. 고대의 정령혼을 언제 또 얻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던전 최초 발견 버프를 받았음에도 겨우 한 마리 찾은 고대의 정령인데, 아마 버프 없이 던전에 진입하면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터.
게다가 ‘고대의 신령수’를 또 찾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으니, 이안의 생각은 사실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사라, 바네사.”
이안은 나직한 목소리로 쌍둥이 자매를 불렀고, 둘은 두려움에 찬(?) 표정으로 슬금슬금 이안을 향해 다가왔다.
“왜……?”
“무슨 일이야 또?”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이안은,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딜 하나만 할까?”
“뭐?”
“무슨 딜?”
“내가 앞으로 폭풍의 정령으로만 이백 마리를 더 잡을 계획이거든.”
“……!”
이안의 말이 떨어지자, 쌍둥이 자매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정령이 보이는 대로 싹 다 잡아도 이백 마리를 잡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 폭풍의 정령만 골라서 이백 마리를 채워 잡겠다니.
지옥 같은 노가다의 길이 너무 뻔히 보인 것이다.
당황한 바네사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 그건 너무 힘들어.”
사라도 서둘러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 꼭 그래야 할 이유도 없잖아? 블레스티아 말고 다른 정령들도 충분히 좋아 보인다고.”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두 자매는 이안의 딜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안은 힘든 일을 시킬 때면, 항상 그보다 더 달콤한 보상으로 유혹하기 때문이었다.
“바네사.”
“응……?”
“지금 내 인벤토리에 정령 사백 마리 있는 거 알지?”
“다, 당연히 알지.”
정령이 갇혀 있는 조화의 구슬을 하나 꺼내 든 이안이, 씨익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중에 폭풍의 정령 빼고 나머지 전부 다 너희한테 줄게. 어때?”
“……!”
“저, 정말?”
“대신 남아 있는 모든 조화의 구슬을 전부 폭풍의 정령으로 채웠을 때의 이야기야. 물론 그때까지 너희 둘이 열심히 서포팅해 줘야겠지.”
꿀꺽-!
이안의 말을 들은 바네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이것은 정말이지, 거부할 수 없는 너무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저 정령들 중에는 분명 잠재력이 엄청 뛰어난 녀석들도 많을 거야. 그 녀석들은 내가 쓰고 나머지는 전부 경매장에 팔아 버리면……!’
지금 경매장에서 정령의 시세는, 대략 영웅(초월) 등급의 소환수와 비슷한 정도였다.
물론 경매장에 올라와 있는 평범한 소환서들과 달리 계약서가 있어야 계약이 가능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제법 괜찮은 가격에 금방 팔려 나갈 것이 분명하였다.
때문에 바네사는, 결국 지옥문에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 해 보지, 뭐.”
“바네사!”
“대신 약속은 꼭 지켜야 돼, 이안!”
“당연하지. 날 믿으라고.”
바네사의 대답을 들은 이안은, 곧바로 인벤토리에 있던 정령 백 마리를 먼저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노동 중에 혹시 딴소리(?)를 할까 싶어 먼저 입막음을 하는 차원이었다.
“하아…….”
정령에 비교적 욕심이 없을 수밖에 없는 사라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새어나왔지만…….
“자,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좋아!”
이미 탐욕 충전(?)이 끝난 바네사는 눈을 반짝거리며 이안을 따라 쪼르르 뛰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데자뷔처럼 느껴지는 장면을 시작으로 두 자매의 노가다 지옥은 다시 시작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