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4화 3. 오염된 고대의 신령수 >
‘오호라, 시작부터 상급 정령이란 말이지.’
이안 일행의 앞에 등장한 상급 늪지의 정령 포나토스.
심지어 한 번에 대여섯 마리가 무리지어 나타난 것을 보며, 이안은 더욱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토르 정도 빼곤 싹 다 소환해서 총력전을 한번 해 봐야겠는데?’
상급 정령은 이안조차도 처음 보는 등급의 상위 정령이다.
중급 정령인 마그비의 전투력을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등급의 정령인 상급 정령.
하여 이안은 더욱 진지한 표정이 되어 빠르게 오더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현재 운용 가능한 소환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최대한의 전투력을 뽑아 내기 위해서 말이다.
“닉, 이쪽으로 와.”
-끼요오오-!
이안의 전력 구성은 평소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력의 숫자가 많이 줄어 있었으며, 소환수들의 포지션이 변경된 것이다.
균열을 찾기 위해 떠난 라이와 뿍뿍이.
생명의 샘과 나무를 찾기 위해 이동중인 카이자르와 헬라임, 그리고 핀과 까망이.
핵심 소환수 넷과 강력한 가신 둘을 다른 지역에 보내 놓았으니, 확실히 전력구성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강력한 전력이긴 하였지만 말이다.
“뿍뿍이가 없으니, 빡빡이 네가 전적으로 탱킹을 다 해 줘야 해.”
“알겠다, 주인.”
“진영은 전부 빡빡이 중심으로 움직이고, 엘이 바로 뒤에서 서포팅해.”
“알겠어요, 아빠!”
언제나 그랬듯 아이언을 탑승한 이안 본인은, 전장의 가장 선두에서 적 진영을 붕괴시킬 것이다.
빡빡이는 그런 이안에게 너무 공격이 집중되지 않도록 ‘도발’을 활용해서 지속적으로 어그로를 끌어주는 역할이며.
빡빡이의 뒤쪽에는 서포팅능력과 유틸성이 좋은 ‘닉’과 ‘엘카릭스’ 등이 자연스레 포진하였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나머지 강력한 딜러진 들이 소환되었다.
위이잉-!
-소환수 ‘카르세우스’를 소환하였습니다.
-소환수 ‘루가릭스’를 소환하였습니다.
-소환마수 ‘크르르’를 소환하였습니다.
……후략……
이어서 진영이 갖춰진 것을 확인한 이안은, 망설임 없이 아이언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가자, 아이언. 한번 휘저어 보자고!”
-캬아아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안을 태운 아이언의 그림자가 빛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 * *
생명의 샘을 지키는 수호자인 샤르가.
그는 자신의 쉼터이자 자연의 보고인 생명의 샘을, 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안전하게 지켜온 뛰어난 수호 신수였다.
심지어는 균열을 통해 정령산을 침략해 온 기계 문명의 마수들 속에서도, 그는 언제나 생명의 샘을 안전하게 지켜 내었다.
물론 기계 문명의 침략자들 중에는 그보다 강력한 괴수들도 많았지만, 샤르가는 단 한 번도 그들에게 생명의 샘을 내어 주지 않았다.
그의 동료인 몇몇 다른 샤르가들은 기계 문명에 샘을 뺏기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크릉, 누구도 나의 보금자리를 빼앗을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지금, 샤르가는 처음으로 샘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느닷없이 샘을 침략한 이상한 인간에게,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았으니 말이다.
만약 조금만 더 늦게 공간 이동 능력이 발동했더라면, 샤르가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을 터.
‘무서운 인간이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
때문에 생명의 샘과 함께 자신의 구역에서 가장 깊숙한 곳으로 도망친 샤르가는, 정신을 바짝 차린 채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다른 인간들이 나타난다면 혼구멍을 내 줄 생각이었지만, 비룡을 탄 그 괴팍한 인간이 나타난다면 곧바로 도망쳐야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주변을 경계하던 그때.
샤르가의 귓전에 낯선 인간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여, 헬라임, 이쪽으로 와 봐.”
“음?”
“폐하께서 말했던 ‘생명의 샘’이라는 걸 찾은 것 같아.”
“오호, 정말 그렇군. 생명의 샘이 틀림없어.”
이어서 그 목소리들을 들은 샤르가는 두 눈을 치켜뜨며 그 방향을 향해 시야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확인한 그는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내었다.
‘크르릉! 못 보던 인간 놈들이군. 그 괴팍한 인간에게 당한 수모를 여기서 갚아 줘야겠어.’
지금까지 샤르가는, 제법 많은 인간을 만나 보았다.
하지만 비룡을 탄 그 괴물 같은 인간을 제외한다면, 아무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었다.
때문에 샤르가는 새로 나타난 두 인간들을 너무도 쉽게 생각하였다.
“확실히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신비로운 기운을 가진 샘물이로군.”
“잠깐, 카이자르. 폐하께 받아 온 두레박을 사용해야 물을 퍼 올릴 수 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동물(?)과 그리핀을 각각 타고 나타난 두 인간은, 샘물에 다가가 천천히 물을 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샤르가는 샘의 한쪽 구석에 은신한 채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사실 인간들이 물을 푸는 것 자체는 그와 아무 관계가 없었고, 단지 샤르가는 자신의 보금자리 주변에 누군가 접근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때문에 샤르가는 완벽한 기습을 성공시키기 위해, 그들이 물을 퍼 올리는 것을 방관한 채 천천히 뒤쪽으로 접근하였다.
그리고 완벽한 타이밍을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크허엉-!”
날카로운 포효와 함께 인간들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단숨에 이 괘씸한 인간 놈들의 숨통을 끊어 놓을 생각으로 말이다.
‘크릉! 감히 나의 영역을 침범한 대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첨벙!
샤르가는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 이상한 고양이는?”
“폐하께서 말씀하신 그놈인 것 같은데.”
당연히 그의 강력한 앞발에 맞아 고꾸라질 것이라 생각했던 인간 놈이, 너무도 쉽게 기습을 피해 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푸르릉- 푸릉-!
공격 실패로 인해 잃었던 균형을 가까스로 다시 잡으며 돌아선 샤르가에게, 괴상하게 생긴 까만 친구가 쏜살같이 달려든 것이다.
그것은 피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빨랐고, 강력하였다.
쐐애애액- 퍼퍽-!
마치 어둠의 그림자가 덮쳐 오기라도 하듯, 순식간에 샤르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간 까만 친구의 공격!
심지어 그것은 제법 아팠기에, 샤르가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크허어엉-!
생각지 못했던 상황에 분한 표정이 되어 인간들을 노려보며 힘껏 포효하는 샤르가.
그런데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 샤르가는 또 한 번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두 명의 인간이 있었는데, 그 사이 한 놈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크헝?
당황한 나머지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확인하는 샤르가.
하지만 그와 거의 동시에.
퍼퍽-!
샤르가의 뒤통수에 둔탁한 타격음이 울려 퍼지며, 엄청난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크헝- 크허엉-!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진 인간 한 놈이, 어느새 그의 뒤에 나타나 머리통을 후려갈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두 인간 놈들의 일방적인 구타가 시작되었다.
퍽- 퍼퍽-.
퍼퍼퍽-!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끼며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은 사이, 나머지 한 놈까지 다가와 무식하게 큰 대검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크허엉! 크허허엉!(살려줘! 잘못했어!)”
이번에야말로 정말 사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샤르가.
하지만 무식해 보였던 인간들은 생각보다 자비로웠고, 덕분에 샤르가는 또 한 번 살아남을 수 있었다.
“폐하께서 죽이진 말라고 하셨어.”
“아 참, 그랬지.”
“물이나 빨리 퍼 올리자, 헬라임. 폐하께서 하얀 빛이 가득 차면 샘이 사라진다고 그랬어.”
“알겠어, 카이자르.”
샤르가를 구타하던 두 인간은 다시 샘물의 옆에 다가 앉았고, 열심히 물을 퍼 올리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아예 포대자루(?)까지 준비해온 두 인간은,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단숨에 퍼 올렸다.
그리고 목숨을 건진 샤르가는 그 ‘폐하’라는 인간에게 무척이나 고맙다고 생각하였다.
* * *
던전의 초입부터 나타난 상급 정령들은, 분명히 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투력은 이안이 예상했던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상급 정령이니 마그비보다는 강력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약하잖아?’
마그비는 중급 정령이고, 늪지의 정령인 포나토스들은 상급 정령이다.
분명히 등급은 포나토스들이 더 높았지만, 이안이 간과한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포나토스는 평범한 파생 정령에 불과한데 비해 마그비는 사대 정령이었으며, 그중에서도 고대의 소환 마법진으로 소환된 고대의 정령이었던 것이다.
‘짹이가 상급 정령이 되었으면 이 정도 전투력이었겠어.’
하여 순식간에 포나토스들을 정리한 이안은, 더욱 과감히 던전의 안쪽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런 그를 뒤에서 서포팅해 주던 쌍둥이 자매는 더욱 입이 쩍 벌어졌고 말이다.
“뭐, 뭐야? 상급 정령이 이렇게 쉽게 잡을 수 있는 거였어?”
“중급 정령만 되도 제법 세던데…….”
“와, 이거 경험치 뭐야? 나 10분이면 레벨업도 가능하겠어, 언니.”
“미쳤다……!”
사라와 바네사는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며, 이안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왔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이안을 서포팅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의 콩고물이 떨어진다면 힘들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였다.
오히려 초고속 버스기사인 이안에게 절이라도 해야 할 판.
콩고물에 조금 더 욕심이 생긴 바네사가 이안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아직 제대로 된 중급 정령조차도 운용해 보지 못한 바네사로서는 이안의 창질에 픽픽 쓰러져 버리는 상급 정령들이 아까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안, 혹시 상급 정령들 포획은 안 할 거야?”
하지만 이안의 대답은 무척이나 간결하였다.
“이렇게 약한 애들 잡아서 뭐 하려고?”
“…….”
“기다려 봐, 괜찮은 놈들 찾으면 노가다 시작할 테니 말이야.”
“아, 알겠어, 이안.”
그리고 이안의 대답에, 바네사는 곧바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괜히 이안의 심기를 건드려 버스에서 하차라도 하게 된다면, 아쉬워서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음, 이번에는 중급 정령인가? 포나토스랑 비슷한 급인 것 같은데…….”
사라와 바네사를 끌고 다니며, 정말 던전의 구석구석까지 깨끗하게 청소하기 시작하는 이안!
전장에서 쌍둥이 자매의 역할은 온간 버프와 유틸기 위주로 이안을 서포팅하면서, 잡템을 수거하는 것이었다.
“여기 중급 정수야, 이안!”
“이쪽에 하급 정수도 널렸어.”
“하급 이하는 다 너희 가져.”
“저, 정말?”
“난 중급 이상만 있으면 돼.”
“오오, 이안갓……!”
지금까지 본 적 없었던 이안의 대인배 같은 면모에, 쌍둥이 자매는 깊은 감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이안을 따라다니는 게 최고였어.’
‘사냥 끝나면 바로 이안 팬 카페부터 가입해야지.’
하지만 이때만 해도 두 자매는 알 수 없었다.
이안이 두 자매에게 씀씀이를 크게 쓰는 것이 처음부터 계획되었던 설계였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