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9화 1. 호루스 전진기지 (2) >
* * *
정령산의 깊숙한 심처.
작은 거북이 한 마리와 험악하게 생긴 늑대 한 마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래도 균열을 찾으려면, 저 위로 올라가야할 것 같뿍.”
“크릉, 그러려면 고철덩이들과 싸워야 한다, 뿍뿍.”
“알고 있뿍.”
그들의 정체는 바로, 이안의 소환수 라이와 뿍뿍이!
“나는 싸움이 좋지만, 크르릉, 넌 싸움하는 거 싫지 않나.”
“그렇지만 어쩔 수 없뿍. 빨리 찰리스를 찾고 처남을 구하려면, 조금 귀찮아도 싸워야 한다뿍.”
“크릉, 처남이 뭐냐. 미트볼보다 더 맛있는 거냐?”
“먹는 거 아니다뿍.”
“이럴 수가, 먹는 게 아니라고?”
“잔말 말고 따라와라뿍.”
뿍뿍이는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으로 라이를 이끌며, 호루스 전진기지를 향해 호기롭게 걸음을 옮겼고…….
뿍- 뿍-
그런 그의 뒤를 따라오던 라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크릉, 주인도 없는데, 우리 둘이 괜찮겠냐, 뿍뿍?”
“걱정 마라뿍. 주인이 쟤네 허접이라 했뿍.”
“허접은 또 뭐냐. 크릉! 어려운 말 쓰지 마라.”
“아무튼 따라오기나 해라뿍.”
짧은 다리를 쉴 새 없이 놀리며 부지런히 걷던 뿍뿍이는, 전방의 호루스 기지를 올려다 보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뿍, 내가 본체로 싸운다면, 저놈들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뿍.’
뿍뿍이는 본체로 현신하는 것을 싫어한다.
일단 그에게 전지전능한 여신님과 같은 존재인 하린이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본체인 상태로 움직이다 보면 배가 더 빠르게 고프기 때문이었다.
작은 거북의 상태로 미트볼을 먹으면 한두 개만 먹어도 그 맛을 음미하며 행복하게 먹을 수 있는데, 본체인 상태에서는 미트볼 수십 개를 먹어도 간에 기별이 오지 않으니 뿍뿍이가 본체를 좋아할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뿍뿍이는 이안의 명령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진해서 본체로 현신하려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사랑의 힘(?)이 아닐 수 없었다.
뿍- 뿍- 뿌북-!
연신 뿍뿍거리는 소리를 내며, 험준한 지형을 타고 올라가 호루스 전진기지의 바로 앞에 도착한 뿍뿍이!
뿍뿍이가 걸을 때마다 내는 소리는 너무 유니크했고, 때문에 그가 도착하자마자 기지에 있던 기계괴수들이 몰려나왔다.
그 이질적인 소음(?)이, 너무 귀에 거슬린 것이다.
“캬아아오! 왠 못생긴 거북이가 시끄럽게 하는군!”
“그긍- 그그긍! 겁 없는 거북이를 처단하자!”
이어서 그들과 마주한 라이와 뿍뿍이는,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평범한 사냥터에서야 주인 없이도 싸워 본 일이 많았지만, 이렇게 새로운 곳을 주인 없이 쳐들어온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살짝 걱정스런 표정으로, 마치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는 뿍뿍이.
“뿍, 우린 할 수 있뿍!”
하지만 그런 뿍뿍이의 걱정이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후웅- 콰직-!
본체로 현신한 뿍뿍이가 꼬리를 휘두르자,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기계괴수들의 몸이 마치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으니 말이었다.
“크릉! 뿍뿍이 대단하다!”
그리고 라이의 감탄에 더욱 우쭐해진 뿍뿍이는, 더욱 날뛰기 시작하였다.
“캬아아오! 다 부숴 주겠다!”
기계 괴수들이 별것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렇지 않아도 달아올라있던 의욕이 더욱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더해 뿍뿍이의 활약에 감명 받은 라이 또한, 미친 듯이 전장을 휘저었다.
스컹- 콰아앙-!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날카로운 발톱으로 신나게 기계괴수들을 썰기 시작한 것.
그렇게 두 소환수의 본격적인 깽판이 펼쳐졌다.
* * *
사실 라이와 뿍뿍이가 기계 괴수들을 학살하는 이 상황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호루스 전진기지를 지키는 기계 몬스터들의 평균 레벨은 30 중반 정도에 불과했는데, 두 소환수들의 레벨은 그 두 배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라이의 초월 레벨은 63이었고 뿍뿍이의 초월 레벨은 62였으니, 기계 괴수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괴물들이 따로 없었을 것.
전진기지의 보스로 등장하는 기계 몬스터인 ‘아루스’ 또한 초월 40레벨이 채 되지 않았으니, 둘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뿍뿍이, 라이, 이놈들……. 이제 시키지 않은 짓까지 하네.’
두 소환수들 덕분에 호루스 기지 안쪽으로 무혈 입성한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호루스 기지 정도야 레벨 차이 때문에 전혀 위험하지 않았겠지만, 초월 50레벨 이상의 몬스터들이 등장할 고산지대에서까지 이렇게 휘젓고 다니면, 충분히 위험할 수 있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둘을 불러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뭐, 일단 두고 봐야겠어. 좀 위험하다고 알아서 일하는 착한 녀석들을 제지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두 소환수들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있는 호루스 기지를 지나치며, 이안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직도 영문을 모르는 사라와 바네사는 이안을 향해 계속해서 조잘대고 있었다.
“아니, 이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데?”
“설명 좀 해 주지?”
소환수 둘의 작품이라고 사실대로 얘기해 주면 상대적 박탈감(?)이 너무 클 것 같았기 때문에, 대충 얼버무린 채 아직까지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다.
이안은 두 자매의 궁금증을 풀어 주는 대신, 화제를 돌리기로 하였다.
“그건 됐고, 이제 얼른 생명의 샘이나 찾아보자, 바네사.”
“우씨, 진짜 말 안 해 줄 거야?”
“바네사 너, 조화의 구슬 안 갖고 싶어?”
“…….”
“자꾸 꼬치꼬치 캐물으면, 구슬 제작법 안 알려 준다?”
“우씨!”
조화의 구슬 제작법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바네사의 궁금증을 잠재운 이안은, 빠르게 오더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찾아야 할 건 총 세 가지야.”
“세 가지?”
“응. 일단 가장 우선적으로 찾아야 될 건 당연히 생명의 샘이겠고.”
“그렇지.”
“두 번째로 찾아야 할 건, 전진기지가 아닌 호루스의 새로운 기지.”
“아, 본거지를 말하는 거야?”
“뭐, 그렇다고 보면 돼.”
“그럼 세 번째는?”
“마지막으로 찾아야 할 건, 오염된 신령수야.”
“아하……!”
“상위지역의 오염된 신령수 던전에 들어가면, 더 희귀하고 강력한 정령들이 많겠지.”
“아마 그럴 거야. 지금까지 신령수 세 번 찾았는데, 상위지역 신령수일수록 좋은 정령들이 많이 등장했어.”
“사실 뭘 먼저 찾든 상관은 없어. 어차피 셋 다 결국 찾아야 하는 콘텐츠들이니 말이야.”
이렇게 널따란 오픈필드 맵에서 뭔가를 찾아야 할 때, 가장 좋은 직업은 소환술사와 흑마법사였다.
전 방위로 소환수들을 뿌려 가며 정찰한다면, 다른 클래스들에 비해 효율이 몇 배 이상 높을 것이니 말이다.
게다가 일정 범위 내를 이동할 수 있는 ‘워프 포털’이 소환 가능한 사라까지 함께한다면, 이안 파티의 수색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었다.
‘기왕이면 생명의 샘을 가장 먼저 찾았으면 좋겠는데…….’
이안이 생명의 샘을 먼저 찾고 싶은 이유는 간단했다.
모든 콘텐츠를 진행하기에 앞서, ‘조화의 구슬’을 먼저 충분히 수급하고 싶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수색이 시작된 지 20여 분 정도가 지났을까?
이안이 기대했던 것처럼, 이안 파티는 ‘생명의 샘’을 가장 먼저 찾을 수 있었다.
-파티/ 사라 : 찾았어, 이안!
-파티/ 이안 : 오, 뭘 찾았는데?
-파티/ 사라 : 생명의 샘!
하지만 생명의 샘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곧바로 ‘생명수’를 퍼 올릴 수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하나 생겼으니 말이다.
-파티/ 이안 : 포탈 열어 줘, 사라. 바로 그쪽으로 갈게!
-파티/ 바네사 : 아니, 잠깐만. 문제가 하나 있어, 이안.
-파티/ 이안 : 응? 무슨 문제?
-파티/ 사라 : 그냥 핀이나 아이언 타고 빨리 날아 와, 이안. 포탈을 열 수가 없는 상황이니까.
-파티/ 이안 : 몬스터라도 만난 거야?
-파티/ 사라 : 생명의 샘을 지키는 정령이 하나 있어.
쌍둥이 자매의 메시지를 받은 이안은 미니 맵에 표시된 좌표로 빠르게 이동하여 날아갔다.
하지만 이안이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단지 허탈한 표정이 된 사라와 바네사가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사라? 여긴 그냥 공터잖아?”
이안의 물음에, 사라 대신 바네사가 대답하였다.
“원래는 이 공터만 한 생명의 샘이 분명히 있었어.”
“뭐……? 몬스터도 아니고 지형지물이 사라졌다고?”
이번에는 사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정말 땅으로 꺼지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 버렸어.”
바네사가 거들었다.
“우리가 정령을 상대하는 사이에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무슨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니까?”
들을수록 기가 막히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이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었을 뿐더러, 그럴 사람들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대체 뭐지? 처음 보는 종류의 콘텐츠인가?’
한차례 입맛을 다신 이안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생명의 샘을 너무 금방 찾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순조롭게 풀렸다고 생각했던 것이 한번 꼬이기 시작하니 오기가 생긴 것이다.
‘다른 콘텐츠 하기 전에 생명의 샘부터 먼저 찾아서 해결해야겠어.’
마음을 다잡은 이안은, 두 자매를 향해 다시 묻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생명의 샘을 찾아 움직이기 전에, 일단 좀 더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다.
“사라, 바네사, 너희가 상대했다던 그 정령은 대체 어떤 정령이야?”
두 자매를 한 차례씩 응시한 뒤, 가장 궁금한 부분부터 질문을 꺼내는 이안.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안의 질문을 받은 두 자매는 머뭇거리며 쉽게 대답하지 못하였다.
“저, 그게…….”
“그러니까…….”
“음?”
먼저 입을 연 것은, 잠시 뜸을 들이던 사라였다.
“어떤 정령인지 설명할 수가 없어, 이안.”
생각지 못했던 대답에, 이안이 더욱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응? 어째서?”
사라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뭔가 네 발 달린 표범처럼 생긴 녀석이었는데, 엄청 빠르고 강력했거든.”
“표……범?”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기묘해지는 이안의 표정.
그런 그를 보며, 이번에는 바네사의 말이 이어졌다.
“응. 그런데 그것도 사실 정확하지 않아.”
“왜?”
잠시 머뭇거리던 바네사가, 자존심 상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녀석이 너무 강력해서, 우리는 거의 도망 다니기만 했거든.”
“맞아. 내가 기억하기로 초월 레벨이 거의 60이었어.”
“어쩌면 정령이 아닐지도 몰라.”
두 자매의 이야기를 듣던 이안의 표정이 점점 더 흥미롭게 바뀌기 시작하였다.
“오호, 그러니까 엄청 강력한 표범 같은 녀석이 생명의 샘을 지키고 있었고, 녀석을 피해 도망 다니는 동안 생명의 샘은 사라져 버렸다는 말이지?”
정곡을 쿡쿡 찌르는 이안의 말에, 입이 삐죽 나온 바네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뭐, 그런 셈이지.”
“생명의 샘이 사라지면서, 녀석도 같이 사라졌겠고?”
사라가 대답하였다.
“맞아.”
그리고 머릿속에 두 자매로부터 들은 정보들을 대략 정리한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한번 다시 찾아보자고. 이번에는 찾으면 좀 멀리서 포탈 열고 나올 때까지 대기해. 알겠지?”
이안의 말에, 바네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뭐, 그래 볼게.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이어서 사라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이안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안, 네가 온다고 해서, 초월 60레벨에 가까운 괴물을 잡을 수 있을까?”
사라의 말을 들은 이안이 씨익 웃으며 대꾸하였다.
“당연히 난 할 수 있어.”
“……?”
“왜냐면…… 난 버그 유저잖아?”
그리고 이안의 그 뻔뻔한 대답에, 사라와 바네사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