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2화 6. 새로운 정령을 만나다 (3) >
* * *
정령의 도장 시스템은 복잡하면서도 심플하다.
‘도장 이용 지침서’에 깨알같이 많은 규칙들이 나열되어 있기는 하나, 큰 맥락은 결국 다섯 가지 명제로 정리되기 때문이었다.
첫째, 도장은 1층부터 100층까지, 총 백여 단계의 층으로 만들어져 있다.
둘째, 도장에서 패배할 시 사망하지는 않지만, 도장의 밖으로 강제 소환된다.
셋째, 도장에는 최대 세 명까지 파티를 이뤄 도전할 수 있으며, 늘어난 인원에 비례하여 난이도가 증가한다.
넷째, 15, 30, 50, 70, 99층에서는 ‘도장사범’을 상대해야 하며, 승리한다면 ‘초월 장비 상자’를 얻을 수 있다. 또, 재도전 시 해당 층의 바로 위층부터 시작이 가능해진다.
다섯째, 다른 도전자들이 도전하고 있는 층에 결투를 신청할 시, 해당 도전자들과 먼저 전투하게 된다.
시간이 제법 지났다고는 하나 이안은 머릿속에 이 규칙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고, 때문에 그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정령의 도장에 들어선 이안은, 위 규칙에 따라 곧바로 16층에 입장하게 되었다.
-유저 ‘이안’ 님의 도전 기록을 검색합니다.
-도전 횟수 : 1회
-최대 클리어 스테이지 : 15층
-현재 클리어 랭킹(글로벌) : 1304위
-15층의 도관을 상대로 승리하셨으므로, 16층으로 입장이 가능합니다.
-정령의 도장 16층에 입장합니다.
다만 도장에 입장하면서, 이안은 한 가지 의아함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니 도장 사범 격퇴 시 보상은 정해져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새 보상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이안이 기억하기로 정해져 있는 층의 도장 사범을 격파했을 때, 획득 가능한 보상은 ‘초월 장비 상자’로 정해져 있었다.
당시 장비 상자를 두 개 받기 위해 15층까지 빠르게 달려 최초 클리어를 달성했던 이안으로선, 그것을 또렷이 기억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샬론은 분명 30층을 클리어하면 괜찮은 소환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 그건 어떤 개념인 거지? 추가 보상 같은 건가?’
이런저런 가정을 떠올리며, 살짝 머리를 굴려 보는 이안.
하지만 그의 생각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클리어하기 어려운 난이도의 층수도 아니고, 직접 가서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니 말이다.
‘머리 굴릴 시간에 빨리 클리어하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게 낫겠어.’
스릉- 척-!
16층의 도관과 마주한 이안은 아이언의 등에 올라탄 뒤 창을 꺼내어 다부지게 움켜잡았다.
다른 소환수들은 애초에 소환할 생각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사실 아이언도 필요 없고 창 한 자루면 30층까지 그대로 돌파할 자신이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빠르게 클리어하기 위해 아이언만 소환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가자, 아이언……!”
-크롸아아-!
그리고 전투가 시작됨과 거의 동시에…….
띠링-!
-수련생을 상대로 승리하셨습니다!
-정령의 도장 16층을 성공적으로 클리어 하셨습니다.
-‘중급 불의 정수’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중급 번개의 정수’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영웅점수 5점을 획득하셨습니다.
이안의 창에 꿰뚫린 수련생 NPC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허공으로 사라졌으며, 이어서 익숙한 시스템 메시지들이 주르륵 하고 떠올랐다.
* * *
영국 서버의 마법사 랭커 제이미는 며칠 전부터 정령의 도장에 오르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진행 중인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정령산 중턱에 있는 호루스 전진 기지를 공략해야 하는데, 그곳에 입성하기에는 아직 스펙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초월 28레벨인 그녀는 세계 랭킹으로 따져도 최상위 그룹에 속하는 수준의 마법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령산의 콘텐츠들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녀를 포함한 초월 20레벨 후반대로 구성된 파티원은 첫 번째 기지조차 제대로 공략해 보지 못하고 후퇴해야 했으니 말이다.
물론 초월 레벨을 더 올림으로써 스펙 업을 하는 것도 방법이었으나, 지금의 제이미와 파티원은 장비부터 바꾸는 것이 급선무였다.
초월 장비가 워낙 구하기 힘든 탓에, 지금까지 그들이 착용 중인 장비들은 죄다 초월 10레벨대 부터 쓰던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30층을 어떻게든 클리어해서 장비 상자를 받아야겠어. 30층의 초월 장비 상자라면 전투력을 대폭 끌어올릴 수 있을 게 분명해.’
하여 제이미를 포함한 파티원 세 사람은, 힘겨운 반복도전으로 정령의 도장 20층 후반 대를 뚫기 시작하였다.
일반 층을 클리어할 때 획득할 수 있는 정수들과 영웅점수들을 팔아 정령계의 화폐인 아스테르를 모으는 것도 제법 쏠쏠하였으니, 한 층 한 층 정복해 나가는 것 자체가 은근히 재미도 있었다.
“좋았어, 제이미! 두 개 층만 더 뚫으면 돼!”
“크! 역시 제이미 님. 마지막에 제이미 님 실드 아니었으면, 또 전멸할 뻔했어요.”
“하하, 별말씀을요. 다들 잘해 주셔서 이길 수 있었던 거죠.”
“이제 29층만 뚫으면 30층이니. 충분히 가능성 보이네요.”
“그렇습니다. 딱 5분만 정비하고 나서, 29층 트라이하도록 하죠.”
클리어에 대한 성취감 때문인지, 파이팅 넘치는 분위기의 제이미 일행들.
“사실상 29층만 뚫으면 30층은 오히려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그건 왜죠?”
“제가 알기로 지금 30층에는 독일 서버의 쌍둥이 랭커라는 ‘사라’와 ‘바네사’가 파킹되어 있는데, 둘이 강력한 랭커들이기는 하지만 파훼 법을 미리 찾아 두었거든요.”
“오오, 역시 제이미 님!”
“오히려 29층보다 30층이 수월할 수도 있으니, 조금만 더 힘내자고요.”
“좋습니다!”
세 사람은 서로를 독려하며 정비를 시작하였고, 오래지 않아 정비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빠르게 정비를 마쳐 갈 무렵.
우우웅-!
그들로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좋지 않은 변수가 하나 생겨나고 말았다.
그들의 뒤쪽에 있던 공간이 공명하며 누군가의 그림자가 대기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그를 발견한 제이미 일행은, 순간 긴장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령의 도장에서 이렇게 다른 팀을 만나는 것은 무척이나 민감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젠장. 이러면 또 눈치싸움이 시작되는 건가?’
먼저 도전하게 되면 뒤에서 대기하던 팀의 난입으로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기 때문에 서로 먼저 도전하지 않기 위해 눈치싸움을 벌이게 되는 것.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제이미 일행은 자신들의 걱정이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스륵-!
28층을 통과하여 대기실로 들어온 의문의 남성은, 대기실에 있던 제이미의 일행들을 신경 쓰지도 않고 곧바로 29층을 향해 들어가 버렸으니 말이었다.
“응……?”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동시에 벙 찐 표정이 되어 버린 세 사람.
“저 사람 대체 뭐죠?”
“파티도 아니고 혼자 28층까지 뚫었다고?”
사실 그들이 당황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기준 정령의 도장 최고기록이 30층 중반 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 솔로 플레이로 28층까지 뚫고 나온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악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여럿이 도전할수록 관문의 난이도가 올라가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혼자 공략하는 것보다는 셋이 공략하는 게 훨씬 더 쉬웠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놀람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와, 대체 누굴까? 아무리 날고 기는 랭커들이 많다지만, 이건 좀 충격적이잖아?”
“게다가 정비도 없이 바로 29층으로 뛰는 걸 보면, 28층도 엄청 손쉽게 클리어했나 본데…….”
“그것도 그렇지만, 방금 우리 무시당했다고요.”
“맞아. 대기실에 누가 있으면 보통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데, 힐끔 보더니 그냥 가 버렸어.”
방금 지나간 남자는 분명히 한 팀이 대기실에 있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언반구 말조차 없이 그대로 29층으로 향했다.
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다고 해도, 대기실에 누가 있다면 몇 분 뒤에 도전해 달라고 이야기라도 해 놓고 가는 것이 정상적인 케이스.
특히 저렇게 솔로 플레이를 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래야 하는 것이다.
“정말 누구지? 설령 이안이 온다고 해도 29, 30층을 혼자 뚫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저 친구, 괘씸한데, 지금 따라 들어가서 확 미끄러뜨려 버릴까요?”
“이길 자신은 있고?”
“뭐, 우리보다 고 레벨 랭커인 것 같긴 하지만……. 우린 셋이잖아요.”
“하긴, 그것도 그렇지.”
도장의 난이도는 사람 숫자에 따라 조정되지만, 도전 중인 도전자끼리의 전투에선 따로 전투력 보정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정령의 도장을 솔플로 도전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고 말이다.
남자가 들어간 29층의 입구를 응시하던 제이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속으로 생각하였다.
‘괘씸한 걸 떠나서 뭐 하는 놈인지 궁금한데……. 한번 따라 들어가서 확인해 봐?’
이어서 제이미는, 다른 두 파티원을 번갈아 응시하였다.
그리고 그들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인지, 제이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번 따라서 들어가 보죠.”
“그래요, 제이미 님. 얼마나 대단한 랭커인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3 : 1로 지지는 않겠죠, 뭐.”
“도전자 상대로 승리해도 보상이 제법 짭짤하다고 들었는데, 한번 질러 봅시다.”
빠르게 의견을 모은 세 사람은, 마지막으로 상태 창을 싹 한번 점검하였다.
어차피 시간을 좀 끌고 들어가야 더 유리하게 전투할 수 있을 테니, 서두를 필요는 없는 것.
“좋아, 다들 준비 끝나셨죠?”
“옙!”
“갑시다!”
이어서 준비를 마친 제이미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한 뒤 29층으로 이어지는 입구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정령의 도장, 29층에 도전합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제이미와 파티원은, 처음 남자가 대기실에 나타났을 때보다도 더욱 당황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
“어어? 미친……?”
당연히 ‘다른 도전자가 도전 중인 관문입니다’라는 메시지가 떠올랐어야 하는데, 정상적으로 29층의 관문이 진행되었으니 말이었다.
-곧 전투가 시작됩니다.
-3…… 2…… 1…….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남자가 29층에 진입한 것은 고작 2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고, 이렇게 그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둘 중 하나라는 이야기였으니…….
‘2분 만에 패배해서 도장 밖으로 튕겼거나, 아니면 클리어해서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갔거나인데…….’
그중 어느 쪽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9층 난이도가 28층에 비해 엄청나게 어려운 건가? 아니면 설마 그 남자가 2분 만에 여길 깨고 올라간 건가?’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더욱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고 만 제이미와 파티원.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이 결코 알 수 없는 두 가지의 사실이 있었다.
첫째, 남자를 만나지 못한 것이 그들에겐 행운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는 사실과…….
둘째, 방금 그에게 추월당함으로 인해서, 그들의 목표였던 정령의 도장 30층은 깰 수 없는 스테이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