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9화 5. 정령산의 아지트 (3) >
* * *
77호로부터 한 20여 분 정도 설명을 들었을까?
이안은 비로소, 기계 공장의 정보 창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카일란에서 보아 왔던 시스템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새로운 시스템.
‘일단 레벨 시스템부터가 신박하단 말이지.’
처음 기계 공장의 정보 창에 레벨이 있는 것을 보고, 이안은 당연히 공장으로 제작한 로봇이 많아질수록 경험치가 쌓여 레벨이 오를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안의 착각이었다.
기계들의 레벨을 올리는 방식은, 일반적인 레벨업과 완전히 달랐으니 말이다.
“기계를 계속 쓰면 내구도가 닳는 거지, 레벨은 오르지 않아.”
“그……래? 그럼 레벨은 어떻게 올리는데?”
“당연히 ‘개조’를 통해서 올리는 거지.”
공장의 레벨을 올리는 방법은, 많이 사용하는 것이 아닌 개조하는 것이었던 것.
“오호, 그럼 개조를 통해 레벨을 계속해서 올릴 수 있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럼?”
“기계를 처음 만들 때 얼마나 높은 기술력으로 만들었냐에 따라 개조 한계가 정해지기 때문이지.”
그리고 77호는 기계 문명의 NPC답게 구체적인 정보들을 제법 많이 알고 있었다.
“오, 신기하네. 그럼 네가 만든 이 기계는 어디까지 레벨 업이 가능한 거야?”
“흠, 글쎄. 정확히 어디까지 개조될지야 확답할 수 없지만, 그래도 좋은 재료들을 들이부으면 7~10레벨 정도까진 개조될 거라고 생각해.”
“아하, 그럼 그 한계치를 대략적으로라도 알 수 있는 지표는 없을까?”
“그건 기계의 티어를 보면 돼. 아마 3티어 시설물 정도만 되도, 20~30레벨까지 개조가 가능할 거야. 훌륭한 기술을 가진 기술자가 제작할수록 기계의 티어가 더 높아지거든.”
“그렇군. 생각보다 차이가 크네?”
“아마 기계 문명의 핵심 기술력이 동원된 기계들 중에는 50레벨이 넘는 것도 있을걸? 관리 로봇에 불과한 나한테는 꿈도 꿀 수 없는 기술력이지만 말이야.”
“오호, 이거 재밌는데?”
기계문명의 기술력으로 만들어낸 기계 시설물들은, 개조를 통해 차곡차곡 레벨을 올릴 수 있다.
그리고 레벨을 올릴 때 마다, 생산성과 기술력 같은 기계의 능력치가 점점 더 상승한다.
마지막으로 그 레벨업의 한계는, 처음 기계가 제작될 때 태생적으로 정해진 ‘티어’에 따라 정해진다.
“이런 생산 시설 뿐 아니라, 전투병기로 만들어진 기계들도 마찬가지야.”
“그래……?”
“모든 기계들은 방금 내가 말했던 매커니즘으로 만들어진다고 보면 돼.”
“크, 그런 거였군!”
물론 위의 세 문장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계 문명 콘텐츠의 기본적인 골조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계 문명의 약탈자들은, 자원이 풍부한 이 정령산을 계속해서 침략하는 거야. 이곳을 약탈해서 더 많은 자원을 얻을수록, 그들은 점점 더 강해지는 거지.”
그리고 모든 콘텐츠의 구성을 머릿속에 완벽히 입력한 이안은, 이제 다음 스텝이 뭔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우선 가장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은, 새로 얻은 기계를 돌려 로봇을 제작해 보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당연히 로봇의 설계도였다.
“로봇을 만들 수 있는 설계도를 구해야겠어, 77호. 전에 네가 부탁했던 ‘관리 로봇 설계도’부터 시작해서, 최대한 많은 설계도를 확보하는 게 가장 급선무겠네.”
이안의 말에 77호는 화색을 띄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로봇 설계도를 구할 수만 있다면 내장된 악성코드를 제거하고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맞아, 이안. 설계도를 구하기 전까지 이 공장으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야.”
관리 로봇 설계도를 얻게 되면, 77호는 그것을 분석하면서 자신에게 심어진 악성 코드를 제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설계도를 이용해 새로운 관리 로봇을 제작한다면, 그것은 이제 NPC가 아닌 이안의 소유가 될 것이었다.
그런데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하던 77호의 얼굴이 다시 살짝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렇게 방법을 알아도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네.”
그리고 뜬금없는 77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이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근본적인…… 문제? 그게 뭔데?”
잠시 뜸을 들인 77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설계도를 구하려면 정령산 중턱까지 올라야 하거든. 평범한 기계 괴물을 처치해서는 설계도를 얻을 수 있는 확률이 너무 낮으니 말이야.”
77호의 이야기를 듣던 이안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가 말하는 ‘문제’라는 게 뭔지, 곧바로 이해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결국, 본격적인 정령산을 공략하기에 내가 아직 너무 약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보네.’
77호가 알던 이안은, 사실 중간자의 위격도 달성하지 못했던 풋내기였다.
때문에 몇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고 한들, 이안이 초월 50레벨에 육박하는 기계 괴물들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물론 ‘상식’이라는 단어와 평소에 거리를 두는 편(?)인 이안으로서는 그런 77호의 염려가 어이없을 뿐이었다.
‘예전에 77호가 했던 말에 의하면, 정령산 중턱부터는 초월 30~40레벨 정도의 기계괴수들이 출몰한다 했었지. 아주 귀엽겠어.’
한편 이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77호는,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기계 문명의 작은 전진기지라도 털어야 설계도를 구할 수 있을 텐데, 아무리 작은 곳이라도 캘리클롭스보다 강력한 괴물들이 득실거릴 거야 이안.”
“아하, 그렇구나.”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 이안. 설계도를 구하는 건, 좀 더 준비해서 천천히 해도 될 일이잖아?”
“알겠어, 77호.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77호의 충고에 일단 고개를 끄덕인 이안.
그리고 설계도를 구할 계획까지 머릿속에 떠올리고 나자, 이안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다.
“그나저나 77호.”
“응?”
“설계도만 구해 온다면 제작에 필요한 재료들은 충분히 있는 거야?”
그 말에 77호는 가슴을 팡팡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동안 광석과 정수들은 창고가 가득 찰 정도로 모아 뒀다고.”
“흐흐, 그래?”
“뭐, 좀 더 높은 티어의 생산 시설이나 로봇을 만들고 싶다면 원소 결정이나 마력석은 따로 구해 와야 하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77호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들은 이안은 씨익 웃으며 그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77호, 내가 사흘 뒤에 다시 찾아올게.”
“으응?”
“설계도 왕창 들고 다시 찾아올 테니까, 그동안 광물이나 많이 캐 놓고 있으라고.”
“……?”
이안의 허세(?)에 순간 당황한 77호는 말을 잃은 채 멍한 표정이 되었고, 그는 그런 77호에게서 시선을 돌린 뒤 빠르게 다시 광산을 빠져나갔다.
‘아마 카일란 세계관 상 중천과 정령산의 난이도는 비슷할 거고, 그렇단 말은…….’
기분이 좋아진 이안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어쩐지 정령산에서의 파밍은 중천에서 했던 노가다보다 더욱 즐거울 것 같다는 좋은 예감이 들었으니 말이다.
* * *
땅- 땅- 땅-!
그그긍- 쾅-!
까만 연기와 아지랑이들 사이로,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쇳소리들.
부지런히 움직이는 기계 공장 사이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저벅- 저벅-.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라한.
그는 열심히 굴러가는 공장을 보며, 뿌듯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크으, 드디어 생산 공장이 굴러가기 시작하는구나! 이거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기분인 걸?”
그리고 중얼거리듯 이야기하는 이라한의 뒤쪽으로, 한 여성이 따라 나와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렇습니다, 마스터. 그동안 수급한 설계도들을 전부 전투로봇으로 제작해 낸다면, B급 이상의 광산을 점령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여성의 이름은 세이루.
오랫동안 다크루나 길드를 이끌어 온, 수뇌부 중 한명이었다.
“후후, 아무래도 그렇겠지. 3티어 로봇들이 양산된다면, 어지간한 랭커들보다 훨씬 강력할 테니 말이야.”
용사의 마을을 졸업하자마자 기계 문명의 콘텐츠를 진행해 온 이라한은, 제법 높은 수준까지 섭렵한 상태였다.
그는 이미 3티어 이상 전투 로봇의 설계도를 대량 보유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한두 기 정도는 제작에 성공한 적도 있었다.
‘지난번에 만들었던 R-14호만 해도 정말 물건이었지. 20레벨 정도의 전투 로봇이 그렇게 강력할 줄은 몰랐어.’
이라한이 체감하기에 전투 로봇들은, 대략 자신의 레벨보다 1.5배 정도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 준다.
그리고 3티어의 설계도로도 30레벨대 전투 로봇까지는 생산이 가능했으니, 그쯤 되면 초월 40레벨 초반인 이라한 자신보다도 더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는 로봇인 것이다.
‘게다가 이번 퀘스트 보상에 4티어의 설계도가 포함되어 있으니, 그것까지 손에 넣는다면 정령계는 우리 다크루나의 차지가 되겠지.’
“후후후.”
기분 좋은 상상을 해서인지, 저도 모르게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는 이라한.
세이루를 향해 시선을 돌린 이라한이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혹시 솔린으로부턴 아직 연락 없나 세이루?”
이라한의 말에, 세이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마스터. 아마 이틀 내로는 뭔가 결과가 나올 테니, 너무 걱정 않으셔도 될 겁니다.”
“흐음, 한시라도 빨리 정령계에 공장을 세워야 하는데…….”
지금 이라한과 세이루가 서 있는 다크루나 길드의 공장은, 기계 문명의 땅 ‘라카토리움’의 길드 거점에 세워져 있었다.
물론 생산 공장을 길드 자체적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이나 앞서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라한은 아직 만족할 수 없었다.
‘결국 재료 수급이 가장 좋은 곳은 정령계야. 그곳에 거점을 세워서 공장을 짓고, 재료 수급과 생산을 동시에 진행해야 해.’
현재 다크루나 길드는, 로봇을 제작하기 위해 수급한 재료를 ‘균열’을 통해 라카토리움까지 운반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봇이 완성되면 다시 그 로봇을 데리고 정령계까지 가서, 새로운 광산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콘텐츠를 공략하고 있었던 것.
물론 지금까지야 이 방식으로도 빠르게 성장해 왔지만, 길드 마스터인 이라한으로서는 더 효율적인 길을 찾는 것이 당연하였다.
‘마족이 정령계에 거점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긴 하겠지만, 어떻게든 해내야만 하는 과제야.’
지잉- 지잉- 쿵-!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전투 로봇들을 살펴보며, 이라한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정령산에서 균열로 통하는 인근 지역에 자리를 잘 잡고 거점을 완성하면, 차후에 콘텐츠를 진행한 인간 종족 유저들이 공격해도 거뜬히 방어해 낼 수 있겠지.’
아직까지 정령계에 있는 인간 종족 랭커들은, 라카토리움과 이어지는 균열 근처까지 콘텐츠를 진행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난다면 인간종족 랭커들도 균열을 발견할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정령계에 거점을 세우려는 이라한의 계획은 더욱 어려워질 게 분명했다.
‘시간이 생명이야. 거점을 빨리 짓고 방어 시설까지 완비해야 해.’
충분히 그럴싸하고, 성공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 이라한의 마스터플랜!
하지만 그 계획이 그의 생각대로 진행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