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7화 5. 정령산의 아지트 >
카일란을 플레이하는 최상위권 유저들에게 현재까지 가장 보편화된 중간계는 총 세 곳이었다.
가장 처음으로 발견되어 대중에 알려진 명계와 그 다음으로 보편화되어 알려진 차원계인 정령계.
마지막으로 정령계의 등장과 더불어 필연적으로 보편화될 수 밖에 없었던 차원계인 기계 문명의 땅 라카토리움.
용천과 엘라시움 또한 알려져 있기는 하였지만 다른 차원계들에 비해 퀘스트 진입 장벽이 높고 정보가 비교적 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현재 카일란 유저들이 가장 많이 유입된 차원계는 위의 세 차원계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유저들이 유입된 중간계는 단연 명계라고 할 수 있었다.
인간 종족과 마족 양 진영 모두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입장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명계였으니 말이다.
정령계와 라카토리움의 경우에는, 상대진영 유저들이 진입하기에 제약이 많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청개구리 같은 루트로 중간계 콘텐츠를 진행하는 것 같단 말이지.’
중간계 콘텐츠가 본격적으로 업데이트되기 전, 그러니까 ‘용사의 마을’의 오픈과 함께 비로소 초월 레벨 11레벨이 풀린 시점 전까지, 이안은 무척이나 정상적인(?) 루트로 중간계를 탐험했었다.
가장 접근성이 좋은 명계에 먼저 입장하여 휘젓고 다닌 뒤, 정령계에서는 하지 말라고 막아 놨던 퀘스트까지 무자비하게(?) 털고 다녔으니 말이다.
하지만 막상 용사의 마을을 졸업하고 중간자가 되어 콘텐츠가 전부 오픈되자, 명계와 정령계는 이안에게 뒷전이 되고 말았다.
이안에게 가장 우선순위가 루가릭스 테이밍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용천에서의 할 일을 마치고 비로소 다른 두 차원계로 관심을 돌리게 된 지금, 이안은 어째서 명계와 정령계 중 정령계를 우선적으로 선택한 것일까?
거기에는 복합적인 이유들이 존재하였지만, 가장 큰 이유는 확실하게 두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었다.
우선 첫 번째 이유는 정령산의 남부 지역에 있는 성소.
그리고 그곳을 지키는 정령수호자 샬론 덕에 진행할 수 있었던, ‘오염된 광산 정화’ 퀘스트.
정령계에서 진행했던 마지막 퀘스트인 광산 정화 퀘스트를 마친 뒤 이안은 그곳의 터줏대감이었던 ‘P-77호’와 친분을 쌓을 수 있었고, 덕분에 기계 문명이 쫓겨 나간 그 자리엔 지금 이안의 아지트가 만들어져 있었으니 그곳은 이안이 새롭게 차원을 공략하기 위한 훌륭한 거점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지트라기보다는 ‘원소의 정수 채굴공장’ 같은 느낌이었지만.
어찌 됐든 아무런 기반 없고 경쟁만 심한 명계보다는, ‘P-77호’와 ‘로봇머슴’이라는 충복(?)들을 심어 놓은 정령계가 더 끌린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으흐흐, 이거 은근히 설레는데?’
차원 포털에서 튀어나온 이안은, 오랜만에 보는 광산 내부의 전경을 둘러보며 기대에 찬 미소를 지었다.
용사의 마을에서 구르고 또 용천에서 열심히 노가다를 해 온 지난 몇 달 동안.
이안의 광산노예 둘은 열심히 일을 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지금쯤 막대한 원소의 정수들이 광산에 쌓여 있을 터였다.
‘뭐, 감독관 카카의 말에 의하면 칠칠이는 로봇 주제에 열심히 일을 안 하는 것 같지만…….’
이안이 칠칠이로 부르는 로봇인 P-77호는, 사실 로봇이라기보다는 NPC에 가까운 녀석이다.
그리고 이안과 완벽한 주종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 지난 몇 달 동안 얼마나 이안을 위해 정수 채굴을 해 뒀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안이 기계 괴물을 처치하고 얻은 설계도로 제작한 ‘로봇 머슴’의 경우 이야기가 달랐다.
녀석은 마치 아이템과 마찬가지로 이안의 ‘소유물’이었고, 명령을 한 번 내려 두면 착실하게 반복수행하는 진짜 로봇이었으니 말이다.
‘으흐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최상급 정수로다가 한 서른 개 정도만 쌓여 있었으면 좋겠네. 상급 이상 원소 결정도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건 좀 욕심이겠지?’
저벅저벅.
그리고 이안이 정령계를 먼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이유이자, 어찌 보면 가장 결정적이었던 이유.
조용한 광산 안쪽을 걷던 이안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뒤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안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작은 소년의 형상을 하고 있는 불의 정령 마그비가 있었다.
이안이 망설임 없이 정령계에 먼저 온 것은 마그비를 진화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냐?”
이안의 물음에, 마그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평소에는 무표정한 녀석이었으나, 오랜만에 정령계를 밟은 탓인지 마그비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물론이야, 주인. 이곳이라면 나도 더 강해질 수 있을 것 같군.”
의욕 넘치는 마그비를 보며 이안은 피식 웃음 지었다.
‘녀석, 그동안 좀 답답했나 보네.’
두어 달 전 용천에 처음 진입했던 이후.
이안이 마그비를 전투에 활용하는 빈도는 점점 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용사의 마을에서까지도 이안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였던 마그비였지만, 초월 레벨이 30이 넘어가고 40을 초과하기 시작하니 자연스레 마그비의 효용도가 떨어졌던 것이다.
정령에게는 레벨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니, 이것은 사실 당연한 순서.
물론 이안의 정령술 숙련도가 계속 오르면서 어느 정도 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중급’ 정령으로서 커버가 가능한 레벨은 높게 잡아줘도 초월 50레벨 정도가 한계였는데, 이안이 최근까지 노가다하던 균열은 초월 70레벨에 가까운 사냥터였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급 정령인 마그비는, 아직까지 상급정령이 되기 위한 정령력을 전부 모으지 못한 것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아니었다.
‘어디 오랜만에 마그비 정보 창이나 한번 확인해 볼까?’
이안의 눈앞에, 오랜만에 보는 정령 정보 창이 슥 하고 떠올랐다.
-마그비(화염의 정령)
정령력 : 100,000/100,000(Max)
속성 : 화염
등급 : 중급 정령
소환 지속 시간 : 450분 (재소환 대기 시간 : 600분)
공격력 : 2,325
방어력 : 1,317
민첩성 : 1,795
생명력 : 28,750
*고유 능력
-불의 악마
정령술사가 사용한 화염 속성의 공격 마법이 치명타로 적중할 시 마그비가 해당 마법을 한 번 더 시전합니다.
-도깨비불
마그비가 던지는 불꽃이 적에게 적중할 시 주변에 있는 다른 적에게로 튕겨 나갑니다.
튕겨 나간 불꽃은 최초 피해량의 80퍼센트만큼의 피해를 입히며, 최대 다섯 번까지 튕길 수 있습니다.
-홍염의 방패
마그비가 지속 시간 동안 양손을 교차시키며, 일시적으로 범위 내의 모든 피해를 흡수합니다(흡수율 : 90~99퍼센트).
*흡수된 피해량의 30~40퍼센트만큼을 화염 피해로 전환하여 적에게 다시 돌려줍니다.
*홍염의 구슬에 화염의 기운이 가득할 때만 고유 능력을 발동할 수 있습니다(충전된 화염의 기운 : 0.25/100).
*마그비가 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때마다 화염의 기운이 조금씩 충전됩니다.
*정령력이 Max가 되면 상위 정령으로 진화합니다.
-화염 속성을 필요로 하는 소환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일정량의 정령력이 차오릅니다.
-화염 속성의 정수(혹은 대자연의 구슬)를 사용하여 정령력을 채울 수 있습니다.
최하급 정수 : 12
하급 정수 : 84
중급 정수 : 588
상급 정수 : 4,116
최상급 정수 : 28,812
*소환술사의 소환 마력이 높을수록 정령의 소환 지속 시간이 길어집니다.
정보 창의 가장 상단에도 떡하니 표기되어 있듯, 마그비의 정령력은 이미 한계치까지 차올라 있었다.
지금까지 이안이 알고 있던 이론상으로는 이미 진화를 했어야 한다는 뜻.
이안 또한 당연히 마그비의 정령력이 다 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으니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라도 정령계에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그비의 정령력이 맥스가 된 것이 바로 엊그제였다는 것.
아마 한창 언령 마법 퀘스트를 진행하던 중에 마그비의 정령력이 맥스가 되었더라면, 이안은 안절부절못했을 게 분명했다.
정령력이 가득 찬 마그비가 진화하지 못한 채로 전투한다는 것은 전투할 때마다 조금씩이라도 쌓일 정령력이 허공으로 증발한다는 것이니 이안 같은 성향의 플레이어에게는 참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공장 잘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 곧바로 샬론을 만나러 가야겠어. 그라면 분명 마그비를 진화시킬 방법을 알고 있겠지.’
모든 기관들이 부서져 휑한 광산의 안쪽으로, 이안의 걸음이 점점 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지금 이안이 들어온 광산의 위치가 정령산 남부 성소의 인근이었으니, 아지트에서의 볼일을 전부 보고 나면 그곳의 정령 수호자인 샬론이 있는 곳까지도 금방 찾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 * *
깡- 깡- 깡-!
경쾌한 쇳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는, 벽걸이 유등만이 작게 일렁이는 어두운 동굴.
“흐으아암, 일이 없다는 게 이렇게나 행복한 일일 줄이야.”
광산을 벗어날 수 없는 P-77호는 오늘도 동굴 안에서 빈둥거리며 쉬는 중이었다.
“일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은데,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면 얼마나 더 행복할까?”
기계공학자 찰리스에 의해 광산을 관리하도록 설계된 로봇인 P-77호.
그는 광산 관리 로봇들 중 최초로 ‘자유’를 꿈꾸고 있었다.
“이안이라고 했었지? 그가 과연 관리 로봇 설계도를 구해 올 수 있을까? 확실히 대단한 인간이기는 했지만…….”
깡- 깡- 까강-!
오늘도 어김없이 곡괭이질 중인 머슴 로봇을 보며, 77호는 이안을 자연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머슴 로봇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안 때문이었으며, 이안이야말로 그를 이 어두운 광산 바깥으로 인도해 줄 유일한 희망이었으니 말이다.
이안이 관리 로봇의 설계도를 가져와야만 그의 내부에 기계 공학자 찰리스가 내장시켜 놓은 악성 코드를 제거할 수 있으니, 77호의 유일한 희망이 이안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정령산 중턱까지 오를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호루스 지하기지는 정말 위험한 곳일 텐데…….”
아침부터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자유라는 망상과 함께 나태한 일상을 시작하는 77호!
그런데 잠시 후.
하루 종일 뒹굴기만 할 것 같던 77호가 어쩐 일인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공장 안쪽으로 몸을 움직인 77호는, 뭔가를 하려는 것인지 연장을 하나씩 챙기기 시작하였다.
“오늘도 아침부터 15분이나 게으름을 피웠군. 만족스러워. 이제 다시 작업을 한번 시작해 볼까?”
태어나서 이안으로부터 구출되기 전까지 1분 1초도 쉬지 않고 일했던 77호에게, 15분이나 쉬었다는 것은 엄청난 수준의 게으름이었던 것.
사실 그가 게으른 로봇이라는 카카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로봇 기준이었던 것이다.
지직- 지이이잉-!
공장 한쪽에 완전히 자리 잡은 77호는, 땜질을 하며 뭔가를 열심히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용도가 뭔지 짐작하기 힘든 그 쇳덩이는, 그리 커다랗지는 않았지만 마치 독수리를 연상케 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기억을 최대한 되살려 보자, 할 수 있어 77호. 이제 거의 다 됐어!”
낑낑거리며 땜질을 하면서도, 쉴 새 없이 알 수 없는 내용의 말을 중얼거리는 77호.
그런데 그렇게 공장의 하루일과가 시작되려던 그때.
저벅저벅.
뭔가 낯익은 발소리를 들은 77호는 땜질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