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5화 4. 중간자의 사명 (2) >
* * *
태고부터 존재해 왔던, 서로 다른 수많은 차원계들.
그들 사이에는 지금까지 많은 갈등과 반목, 그리고 교류가 이어져 왔으며, 그 과정에서 지금의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해 온 것은, 다름 아닌 ‘중간자’들이었다.
“지상계부터 시작하여 중간계까지. 창조신께서는 그 어떤 차원계도 멸망의 길을 걷길 원치 않으셨네.”
“멸망이라……. 그렇군요.”
“하지만 이안 자네도 알다시피, 창조신뿐 아니라 모든 신들은 차원계에 직접 관여할 수 없지.”
“지상계뿐 아니라 중간계도 마찬가지인가요?”
이안의 물음에, 그리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그렇다네. 신께서 온전한 힘을 발휘하실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신계뿐이지.”
“아하.”
목이 타는지 차를 한 차례 홀짝인 그리퍼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여, 차원계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창조신께서 생각해 내신 개념이 바로 중간자라네.”
“음…… 중간자들이 차원 사이를 움직이며, 차원계 간의 밸런스를 잡는 역할을 하길 바라신 거로군요.”
“뭐, 완전히 맞다고 할 순 없겠으나,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군.”
NPC인 그리퍼는 창조주라 이야기하지만, 사실 게임의 창조주는 너무 당연히도 개발사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리퍼가 이야기한 창조주의 의도라는 것은, 곧 개발사와 기획 팀의 의도일 수 밖에 없었다.
“창조주께선 어떻게 중간자들을 움직이시나요? 아, 아니……. 이건 물어볼 필요가 없었군.”
때문에 한 가지 질문을 하던 이안은, 스스로 그에 대한 답을 깨닫고는 말끝을 흐렸다.
“으음? 그것은 나조차도 모르는 사실인데, 혹시 알고 있는가?”
창조주인 개발사가 유저들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도구는 바로 퀘스트.
그것을 깨달은 이안은 질문을 흐렸고, 그리퍼의 물음에도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그리퍼 또한, 개발사의 손에서 탄생한 NPC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아닙니다, 그리퍼. 제가 뭔가 좀 착각했던 것 같군요.”
“흐음…… 그렇군.”
이안의 대답에 대충 수긍한 그리퍼는, 다시 중간자의 사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야기는 제법 방대하고 길었지만, 결국 요점은 한 가지였다.
‘결국 성운이라는 건, 중간계에 존재하는 차원의 벽을 좀 더 손쉽게 넘어 다닐 수 있는 지름길 같은 거네. 하지만 세계관 상으로 그 성운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각 차원계의 인정을 먼저 받아야 하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안은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것은, 퀘스트나 콘텐츠 때문이 아닌, 순수한 세계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그렇다면 그리퍼…….”
“이야기해 보시게.”
“차원 사이를 이어 주는 성운을 밟기 위해서 각 차원계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건 이해했는데요.”
“그래.”
“그리퍼의 말에 따르면 용비늘 신발은 용천의 인장, 원소의 목걸이는 정령계의 인장. 그리고 혼령의 날개는 명계의 인장이잖아요?”
“바로 그렇지. 정확히 이해했군.”
“그런데 제가 알기로, 중간계에는 더 많은 차원계들이 있다고 알고 있거든요. 당장 제가 확인한 거신족들의 땅 엘라시움이라든가, 일전에 그리퍼가 말씀해 주셨던 기계문명이라든가…….”
“맞네.”
“그리퍼의 말대로라면, 그런 곳의 인장도 필요한 것 아닌가요? 결국 성운이라는 것이 모든 차원계를 이어 주는 끈 같은 것이라면 말이죠.”
이안의 말을 듣던 그리퍼는,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이안이 궁금증은, 사실 당연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잠시 뜸을 들인 그리퍼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나도 성운을 밟아 본 적은 없어서 정확히 모르네만, 아마 자네에게 제시된 그 세 개의 인장들은 최소한의 요건이지 싶네.”
“그게 무슨……?”
“이건 내 추측인데, 아마 자네가 저 세 개의 인장을 모아 성운을 처음 밟는다 해도, 아마 모든 차원계로 바로 통할 수는 없을 게야.”
“아……?”
“인정을 받은 세 개의 차원계가 아닌 다른 차원계로는, 성운을 타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겠지.”
게임 콘텐츠에 한해서는 머리가 번개같이 돌아가는 이안은, 그의 이어질 말을 곧바로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그럼 인정받지 못한 다른 차원계로의 이동을 위해선, 해당 차원계의 인장이 필요하겠네요?”
그리퍼가 손뼉을 치며 대답하였다.
짝!
“바로 그거일세. 자네가 차원의 인장을 하나 획득할 때 마다, 성운을 활용하여 이동할 수 있는 활동 반경이 넓어진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그리퍼의 마지막 이야기까지 들은 이안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성운이라는 콘텐츠의 개념에 대한 것은 이제 대략적으로 정리가 되었고, 아직까지 남아 있는 몇 가지 의문들은 직접 콘텐츠를 접해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것들이리라.
‘일단 지금까지 그리퍼에게 들은 이야기만을 놓고 따져 보면. 성운의 역할은 교통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지만……. 분명 그 안에 들어가 보면 그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하겠지. 중간계에서도 상위 콘텐츠 중에 하나인 것 같으니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골몰히 생각에 잠겨 머릿속을 정리하는 이안을 보며, 그리퍼가 흡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래전부터 느껴 온 사실이지만, 자네는 정말 대단하단 말이지.”
뜬금 없는 그리퍼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하였다.
“뭐가 말입니까?”
그리퍼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인간 세계에서도 헷병아리였던 시절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중간자로서의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해 내고 있으니 말일세.”
“하핫.”
“나 또한 이 세계를 중재하는 중간자 중 하나이지만, 머지않아 자네가 내 역량을 뛰어넘게 되겠구만.”
그리퍼의 이야기에, 이안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하였다.
“에이, 그건 과장이십니다.”
그리퍼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결코 그렇지 않네. 아까도 말했지만, 성운은 나조차도 밟아 본 일 없는 성역이니 말일세. 중간자 중에서도 중재자의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은 존재만이, 성운을 밟을 자격을 가지는 것이니까.”
“하하, 아직 세 개의 인장 중 하나도 얻지 못했는데, 너무 앞서 나가시는 것 아닙니까?”
그리퍼의 주름진 얼굴에, 푸근한 미소가 걸렸다.
“후후, 자네라면 머지않아 모든 인장을 들고 다시 나타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라네.”
그리퍼와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눈 이안은, 다시 용천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원의 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얻은 정보만 놓고 보면……. 성운이라는 건 이 차원의 문만도 못한 것일 수도 있겠는걸.’
물론 페널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충전된 마력만 충분하다면 언제든 원하는 위치로 이동할 수 있게 해 주는 차원의 문.
실없는 생각을 떠올린 이안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리퍼에게 작별인사를 건네었다.
“그럼 그리퍼, 조만간 다시 또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하시게.”
“다음에 올 때는, 말씀하신 것처럼 세 개의 인장을 전부 모아 오도록 하죠.”
“후후, 무운을 빌겠네.”
위이잉!
그리퍼와 인사를 마친 이안은, 망설임 없이 다시 차원의 문을 밟았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선, 노가다를 하면서 좀 생각해 봐야겠어.’
이안의 기준에선, 잡념을 떨쳐내고 머리를 비우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인 노가다.
‘다른 차원에도 중천처럼 균열 맵이 있으면 좋겠지만, 아마도 그렇지 않을 확률이 더 높겠지. 여기만큼 효율 좋은 사냥터도 없으니, 못해도 65레벨 이상은 찍고 움직여야겠어.’
-‘용천’ 차원계의 ‘중천’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균열 입구’ 동 : 2094, 남 : 1129 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균열의 앞에 도착한 이안은, 소환수들을 전부 소환한 뒤 환하게 웃었다.
“다들 푹 쉬었지?”
크릉. 푸르릉…….
물론 그 물음에 힘차게 대답한 소환수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이안이 아니었다.
“한 이틀 쉬었으니, 보름 정돈 열일 할 수 있겠지. 열심히 일한다면 하루 정도는 줄여 줄지도 몰라.”
악덕 고용주의 말에, 소환수들의 다크서클이 짙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착각이 아닐 것이었다.
* * *
용천과 엘라시움의 주인.
즉, 용족들과 거신족들은, 균열을 사이에 두고 대립 구도를 이루며 끊임없이 치고받으며 싸우고 있다.
물론 규격 밖에서 날뛰는 이안 때문에 전황은 용천 쪽으로 살짝 기울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균열 안에서 어느정도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중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 구도는, 비단 이 두 차원계만의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정령계를 침략해 온 기계문명과, 그들의 침략으로 오랜 시간 앓고 있는 정령계의 존재.
그리고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는 용천과 엘라시움 사이와는 달리, 정령계와 기계문명의 전장은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 있었다.
기계문명의 침략으로, 정령계는 이미 절반 이상의 지역이 점령당한 상태였던 것이다.
때문에 이곳은, 기계문명 진영의 중간자들인 ‘마족 랭커’들의 놀이터나 다를 바 없었다.
“으하하핫, 역시 기계문명 쪽으로 가닥을 잡은 건 신의 한 수였어. 괜히 경쟁 심한 다른 차원으로 갔다간 본전도 못 찾을 뻔했군.”
한때 한국 서버 최고의 랭커였던 이라한.
그리고 아직까지, 분명히 글로벌 기준으로도 손에 꼽을 만큼 뛰어난 전사클래스 랭커인 그.
마족 유저들의 메인 퀘스트가 이어지는 명계와 엘라시움을 포기하고 아무 연고 없는 기계문명부터 공략을 시작한 이라한은, 요즘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기계문명의 퀘스트들은 난이도가 낮은 만큼 보상이 크게 좋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자가 거의 없다 보니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부터도 게임에 재능이 있던 랭커인 만큼, 한번 성장하기 시작하자 빠르게 가속도를 붙인 이라한.
그의 현재 초월 레벨은 무려 40레벨을 넘어선 상태였다.
“솔린, 이번에 넘어가서 한 일주일 빡세게 퀘스트 하면, 빛의 봉우리까지는 전부 점령할 수 있겠지?”
이라한의 물음에, 그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던 솔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마스터. 정령계 쪽에 있는 인간족 유저들이 저항하긴 하겠지만, 아마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겁니다.”
솔린의 이야기에, 이라한은 흡족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그렇겠지. 정령계에 있는 랭커 녀석들 자체도 별 볼일 없는 친구들이 많지만, 이번에는 우리한테 비밀 병기도 있으니까 말이야.”
지난 주 숨겨진 에픽 퀘스트를 클리어한 뒤, 기계문명의 세력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기 시작한 이라한과 타이탄 길드원들.
지난 주까지만 해도 ‘시온’의 정령들 때문에 뚫지 못하고 있었던 빛의 봉우리지만, ‘마력의 심장’으로 만들어진 기계 괴수들과 함께라면 이번에는 분명히 뚫어 낼 수 있을 터.
때문에 그들의 표정에는, 적잖은 기대감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흐흐, 림롱 이 바보 같은 친구는 우리 따라서 이쪽으로 오지, 왜 쓸데없이 명계로 가서 힘 빼면서 경쟁하고 있는지 몰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어두운 통로를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타이탄 길드의 길드원들.
그런데 그때, 그들의 대화 주제가 바뀌기 시작하였다.
“그나저나 균열인지 뭔지 이 맵은 대체 왜 이렇게 긴 거야 짜증 나게.”
이라한의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솔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마스터. 매번 여기 지나가다가 힘만 빠지고 시간도 너무 많이 소요되는 것 같아요.”
“어후, 빨리 정령계에 거점이라도 하나 만들든지 해야지. 매번 균열 통해서 움직여야 하니 낭비가 너무 심한 것 같군.”
수많은 거신족들과 용족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용천과 엘라시움 쪽의 균열과 달리, 텅텅 비어 있는 동공이기는 하였지만, 정령계와 기계문명을 잇고 있는 통로 또한 ‘균열’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
“이번에 정령계 도착하면, 차원 사이에 워프 탈 방법이 있는지 한번 알아봐야겠습니다.”
“그래, 대체 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는 이런 맵에서 힘 좀 그만 빼고 싶군.”
앞으로 균열이 얼마나 지옥 같은 악몽을 선사할지 알 길이 없는 이라한과 타이탄 길드원들은, 투덜거리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