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1화 2. 거신 섬멸전 >
파죽지세라는 말을 온몸으로 보여 주기라도 하듯 마족 랭커들을 상대로 몸을 푼(?) 이안은, 균열 안에서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하였다.
차원 마력 저항력을 150까지 달성한 시점부터 균열 전체가 이안의 놀이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는데, 이제 루가릭스에 더해 강력한 9서클의 언령 마법까지 얻었으니 이안의 앞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적어도 이 균열 안에서만큼은 말이다.
“으흐흐, 여기가 바로 노다지구나!”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거신들을 상대로 광역 공격스킬들의 효율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점이었다.
거대한 덩치 때문에 각을 아무리 잘 재서 광역 마법을 써도 다섯 개체 이상 맞추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덩치에 비례하여 육중한 무게 때문인지 소울 스톰의 인장력에도 끄떡없는 거인들.
물론 끌려 들어가지 않는다 뿐이지 다른 부가 효과와 어둠 속성 대미지는 그대로 들어갔기 때문에, 상대하는 것 자체는 이전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그저 생각했던 것만큼 사냥 속도가 빠르지 못하다는 점이 이안에게 아쉬운 부분일 뿐이었다.
하여 이안은, 아예 기존의 전투 방식을 살짝 바꾸었다.
“좁은 지형으로 끌고 들어와서 하나둘씩 상대하는 게 오히려 수월하겠어.”
이안의 이야기에, 옆에 있던 헬라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렇습니다, 폐하. 워낙 덩치가 큰 녀석들이라, 협소한 지형에서 싸운다면 제대로 된 전투력을 보이지도 못할 것입니다.”
잔뜩 약이 오른 거신들을 유인한다면, 원하는 지형을 전장으로 가져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터.
쿵- 쿵-.
“저 건방진 인간을 잡아라!”
“겁을 상실한 인간이로구나!”
적당히 협소한 지형으로 거신들을 유인한 이안은 카카의 ‘꿈꾸는 악마’부터 차례대로 스킬을 연계하기 시작하였다.
“어둠이…… 내린다…….”
“소울 스톰!”
“어둠의 날개!”
브레스 한 방에 몰살당해 버린 마족 유저들이야 당연히 알 리 없지만, 당시 그들과 싸울 때 이안의 화력은 100퍼센트 발휘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차원마력 디버프와 소울 스톰의 인장력.
그리고 저항력 붕괴 마법을 조합시키는 전략으로, 그들을 무력화시켰던 것일 뿐.
이렇게 꿈꾸는 악마와 소울 스톰이 중첩해서 깔린 전장 위에 까망이와 헬라임까지 곁들여져야, 이안이 가진 진정한 폭딜을 맛볼 수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둘의 어둠 속성 공격력은, 어지간한 흑마법사 랭커 정도는 가볍게 찜 쪄 먹을 정도였으니까.
콰콰쾅-!
“다크 비전!”
퍼엉-!
어둠에 대한 저항력을 바닥까지 깎아낸 뒤 퍼붓는 까망이와 헬라임의 폭격.
이것은 거신들의 AI가 당황할 정도로 막대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 함정이다! 피해라!”
“인간 놈이 이상한 수를 쓴다!”
물론 어둠속성에 전장을 특화시켰다고 해서, 다른 소환수들이 가만히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라이와 할리, 그리고 크르르 등은 이안의 소환수들답게(?) 허둥대는 거신들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물어뜯었으니 말이다.
커허엉-!
크르르릉!
그리고 마지막 마무리는 역시 이안의 몫이었다.
-‘거신족 정찰병’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소환수 ‘아이언’의 고유 능력 ‘급가속’이 발동합니다.
-소환수 ‘아이언’의 민첩성이 증폭되었습니다.
-‘거신족 돌격병’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소환수 ‘아이언’의 고유 능력 ‘급가속’이 발동합니다.
……후략……
거신들은 덩치가 큰 만큼 둔했고, 아이언을 탄 이안은 극한의 스피드를 자랑했다.
때문에 거신들이 이안의 창을 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할 수 있었다.
쐐애애액- 퍼억-!
날카로운 파공성이 일고 나면, 어김없이 터져 나오는 둔탁한 파열음.
이안은 아이언을 타고 거신들의 사이를 날아다니며, 능숙한 창질로 거신들을 하나씩 쓰러뜨렸다.
“크허억-!”
“말도 안 돼…….”
이안을 그저 전장에 난입한 날파리 정도로 생각했던 거신들은 동료들이 당하는 것을 보며 망연한 표정이 되었다.
거신들의 연합군 병력은 천 단위가 넘을 만큼 많았고, 이안에게 당한 거신들은 이제 고작 십수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그 숫자가 점점 더 늘어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일단 퇴각! 진영으로 돌아가 다시 재정비한다!”
“이 좁은 곳에서는 저놈을 잡을 수가 없어!”
때문에 정신없이 이안을 따라왔던 거신들은 다시 진영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고, 생각보다 빨리 빠져나가는 거신들의 모습을 보며 이안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역시 인간형 몬스터들이라 그런가 AI가 아주 멍청하지는 않네.”
아무리 이안이 강하다고 한들, 본진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싸울 수는 없는 노릇.
이안은 퇴각하는 거신들을 응시하며, 어떻게 하면 최대한 많은 거신들을 끌어내 처치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라이, 할리, 쫓아가진 말고 대기! 잠시 정비하고 다시 움직일 거야.”
“크허엉-!”
“크릉, 알겠다, 주인.”
그런데 그렇게 파티를 정비하며 연합군 진영을 공략하기 위한 계획을 떠올리던 그때…….
“……?”
뭔가를 발견한 이안의 두 동공이 살짝 확대되었다.
* * *
서른 명의 마족 랭커들이 전멸하던 그때.
죽은 척하기까지 사용한 아레미스마저 헬라임에 의해 적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부지한 마족 유저가 한 명 있었다.
그는 바로, 단 한 번도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던 인물.
전장을 방송하기 위해 멀찍이서 은신하고 있었던, BJ 레이콥스였다.
만약 그가 단 한 번이라도 모습을 드러내고 이안을 공격했더라면 그 또한 살아남을 수 없었겠지만. 그는 끝까지 은신 상태를 유지하며 숨죽인 채 방송에 충실(?)하였고, 때문에 이안에게 걸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에서 지켜본 레이콥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안, 이놈은 진짜 미친놈이야. 카이? 류첸? 올리버? 누가 와도 이안한텐 한 수 접어 줘야 할 것 같은데…….’
마치 석상이라도 된 듯 전장의 구석에 은신한 채, 그대로 굳어 버린 레이콥스.
그는 전장이 다 마무리되고 이안이 사라질 때까지도 자리에 굳은 채 가만히 있었고, 그런 그를 향해 시청자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아니, 레이콥스 형,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임?
-지금 이안갓이 거신족 연합군 잡으러 떠나셨잖음. 빨리 안 따라가고 뭐 하는 거임 대체?
-아, 나 현기증 난다고. 빨리 이안갓이 뭐 하는지 보여 달라고……!
당황한 레이콥스는 말까지 더듬으며 변명하였지만, 그런 것은 소용없었다.
-저, 오늘 방송 콘텐츠는 여기까진데요?
-하, 이 형 프로의식이 부족하네.
-그런 거 없고, 빨리 따라가기나 하셈. 여기서 방송 멈추면 나 앞으로 형 방송 안 본다.
-난 오늘부터 안티할 거임.
-나도.
-하아……. 형님들, 방금 같이 보셨잖아요. 저 괴물 따라가다가 걸리면 바로 사망이에요, 저.
-다른 마족들은 이미 다 사망했음. ㄱㅊ.
-솔직히 레이콥스 형 죽어도 이득 아님? 이안 따라다니면 시청자 계속 불어날 텐데. 그 정도 리스크는 감수해 보자, 우리.
-후우…….
레이콥스는 이안이 진심으로 무서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안에게 몰살당한 랭커들 중 레이콥스보다 약체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이 계속해서 부추기자, 마음 한편에서 조금씩 욕심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 젠장. 밑져 봐야 죽기밖에 더 하겠어? 한 3시간만 잘 따라다니면서 방송해도 본전 이상은 충분히 뽑을 텐데, 해 볼 만한 모험일지도 몰라.’
그래서 결국,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긴장감을 감수하며, 이안을 따라붙기 시작한 레이콥스.
덕분에 가장 신난 것은, 당연히 수백만 시청자들이었다.
-캬, 역시 레이콥스 성님. 방송을 아시는 분이네.
-너무 빨리 들키면 실망할 거야, 형. 못해도 3시간 정도는 방송 분량 뽑아 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방송이 이어질수록 시청자들의 반응은 더욱 뜨거워져 갔다.
-오, 지져스. 거신들 차원 레벨 50쯤은 되는 것 같은데, 그냥 다 터뜨려 버리네.
-대체 이안은 초월 레벨이 몇인 거지?
-초월 레벨도 초월 레벨인데, 장비가 예사롭지 않음.
-후, 이안은 오늘도 혼자 다른 게임 하고 있네.
달아오르는 시청자들의 반응 때문인지 레이콥스는 점점 더 대담해져 갔다.
처음에는 멀찍이서 카메라의 줌 기능을 이용해 이안의 전투 장면을 촬영하는 것이 전부였는데, 다이내믹한 장면을 위해 조금씩 더 전장에 가깝게 다가붙은 것이다.
‘그래, 이안이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특별한 디텍팅 마법 없이 은신을 찾아낼 수는 없을 거야. 거신들 중에 은신 능력이 있는 개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뜬금없이 그런 마법을 쓸 이유는 없겠지.’
나름대로 합리적인 계산을 한 레이콥스는 슬금슬금 이안의 바로 지근거리까지 쫓아 들어왔다.
처음에는 한 50~80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촬영했었다면, 이제는 거의 20~30미터 반경까지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이쯤 되자, 암살자의 본분을 잊지 말라는 시청자들까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야, 레이콥스 형 대담한거 보소. 역시 아까는 그냥 엄살이었던 거지?
-크, 저 형 이러다가 이안 암살이라도 시도하는 거 아님? 이안갓 암살 성공이라도 하면, 마족 진영 영웅 될 텐데 말이야.
-모르긴 몰라도, 전장 공헌도도 엄청 먹을 걸?
-그래, 가즈아, 레이콥스! 암살자면 암살을 해야지. 넌 BJ이전에 암살자 랭커라고!
-형들, 이러지 말자. 나 방송 오래 보고 싶어.
-레이콥스가 지금 아무리 흥분했어도, 최소한의 분별력은 있을 거임. 걱정 마셈.
그런데 그렇게, 방송의 분위기가 달아올라 절정에 달했을 무렵.
이렇게 오래도록 이어질 줄만 알았던 레이콥스의 방송에 커다란 변수가 하나 생기고 말았다.
“……!”
한차례 대규모 전투를 마치고 소환수들을 정비하던 이안이 돌연 레이콥스가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휙 하고 돌린 것이다.
심지어 레이콥스와 이안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고, 덕분에 화면을 보던 수백만의 시청자들 또한 이안과 강제로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자, 잠깐. 이거 방송 콘셉트가 혹시 호러였음?
-이안 쟤 왜 저래? 설마 은신 상태인 레이콥스를 보기라도 한 거야?
-뭐야? 이거 그냥 우연이겠지?
이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대로 돌처럼 굳어 버린 레이콥스.
불타오르던 채팅 창은 거짓말처럼 차갑게 얼어붙었고, 시청자들은 숨죽인 채 화면을 응시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저벅- 저벅-
조금씩 가까워지던 이안의 그림자가 점점 화면을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