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7화 1. 아레미스와의 재회 (2) >
* * *
고요한 적막 속에, 낮게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휘이잉.
붉은 바위산의 깊숙한 곳.
쟈크람 마을의 입구에는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아 있었다.
황량한 풍경의 마을 입구에는 여느 때처럼 마을의 경비병 둘 만이 어슬렁거리고 있었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는 쟈크람 마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스하아아.
그 평화로운 풍경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마을 주변의 거대한 바윗돌 사이사이에 수많은 마족 유저들이 매복해 있었으니 말이다.
“후우, 이안 이놈은 대체 저 안에서 뭘 이렇게 오래 있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설마 저 안에서 로그아웃이라도 해 버린 건 아니겠지?”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붙들어 매시라고. 우리 길드원이 멀리서 이안의 동향을 체크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래? 안에서 대체 뭐 하고 있대?”
“뭐, NPC들이랑 잡담 떠는 것 같던데.”
“왜?”
“왜긴 왜겠어. 어디 주워 먹을 콘텐츠라도 있나 해서 그러겠지.”
마족 유저들이 쟈크람 마을의 입구에 매복한 지도 벌써 한 시간이 다 되어 가는 시점.
그들은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굳건히 이안이 나올 때 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이런 날이 아니면, 세계적인 랭커인 이안을 털어먹을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몰랐으니 말이다.
“후우, 이제 슬슬 나올 때도 된 것 같은데…….”
어둠 속에서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목소리.
그런데 바로 그때, 1시간이 넘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던 쟈크람 마을의 입구가 낮은 공명음과 함께 일렁이기 시작하였다.
위이잉.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마족 진영의 랭커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숨죽이기 시작하였다.
“왔다……!”
누군가의 경직된 목소리만이, 짧게 울려 퍼졌을 뿐.
그런데 그것도 잠시, 마족 유저들은 곧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포롱포롱- 포롱.
공간이 일렁이며 나타난 녀석은, 이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손바닥만 한 날개를 파닥거리며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요상한 외모의 도마뱀 그림자는 어떻게 봐도 이안일 수가 없었다.
“저 이상한 녀석은 대체 뭐지?”
“설마 이안이 폴리모프라도 한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법사 클래스도 아니고 폴리모프를 어떻게 씀?”
“그럼 대체 뭐야?”
매복해 있던 마족 랭커들 중 하나는 호기심이 일었는지, 녀석을 향해 마력의 구체를 쏘아 보냈다.
팡- 파팡-!
하지만 놀랍게도, 그가 쏘아 낸 마력의 구체는 도마뱀에게 맞는 순간 허공에서 소멸되었다.
아무런 대미지도 주지 못한 채 말이다.
“……?”
대신 구체를 맞은 도마뱀이,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마력탄을 쏘아 보낸 랭커를 한차례 째려볼 뿐이었다.
찌릿-!
그리고 이쯤 되자, 마족 랭커들은 어이없는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저건 대체 뭐야? 혹시 쟈크람 마을 NPC라도 되는 건가?”
“생긴 게 요상한 게 마수 같기도 한데……. 딜이 안 들어가는 거 보면 아무래도 NPC인 것 같네.”
하지만 요상한 도마뱀(?)에 대한 마족 랭커들의 관심은, 금방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지금 그들의 목표는 이안이었고, 도마뱀 녀석이 이안이 아닌 것은 확실해졌으니 더 이상 거기에 신경 쓸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20~30분 정도의 시간이 추가로 흘렀을까?
위이잉.
쟈크람 마을의 게이트가 다시 한 번 공명하기 시작하였다.
* * *
마족 유저들의 시야에 들어온 요상한 생김새의 생명체.
그것의 정체는 당연히 카카였고, 이안이 정찰을 위해 카카를 먼저 마을의 바깥으로 내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이안이 먼저 내보낸 것은, 사실 카카뿐만이 아니었다.
카카에게 정신 팔린 마족 유저들이 보지 못한, 작고 느릿느릿한 하나의 생명체.
뿍- 뿍- 뿌북-.
쟈크람 마을의 입구는 고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아래쪽 바위에 숨어있던 마족 유저들은 뿍뿍이의 등장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카카가 시간을 끌며 폴폴 날아다니는 동안 부지런히 움직인 뿍뿍이는, 커다란 바위 사이로 요리조리 이동하며, 마족 유저들의 포위망을 뚫고 넘어갈 수 있었다.
“이 정도 지났으면 됐겠지……?”
카카의 시야를 통해 바깥 상황을 확인한 이안은, 본격적으로 움직일 준비를 하였다.
‘대충 봐도 한 이삼십 명은 모인 것 같은데……. 역시 정면 승부는 위험하겠어.’
분명 이안의 전투력은, 바깥에 있는 마족 랭커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수십의 랭커들을 상대로 혼자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할 수 있었다.
‘균열까지 끌고 가서 각개격파 해야겠어. 아니, 균열 안에서라면 한 번에 쓸어 버리는 게 가능할지도…….’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이안은, 성큼성큼 마을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 * *
위이잉.
척-!
게이트가 일렁이면서, 한 남자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어서 그는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천천히 전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저벅저벅.
마치 동네 마실이라도 나온 듯,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이안.
그리고 그를 발견한 마족 유저들은, 계획해 두었던 대로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퇴로를 막아! 다시 마을로 들어갈 수 없게 해!”
“순식간에 제압해 버리자고!”
하지만 갑작스런 마족 유저들의 등장에도, 이안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어휴, 많이도 몰려왔네.”
다만 마족 유저들이 쏘아 보낸 투사체가 날아들기 직전.
“공간 왜곡! 소환 해제!”
빠르게 시동어를 외치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어서 이안이 서 있던 자리에는, 희미하게 거북 모양의 잔영이 생겼다가 사라졌을 뿐이었다.
“뭐, 뭐야? 이놈 어디 갔어?”
“빨리 찾아! 도망가지 못하게 쫓아!”
이안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자, 마족 유저들은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어렵지 않게 이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저기, 저기다! 이안이 비룡을 타고 도망간다!”
“비행 가능한 사람부터 놈을 쫓아!”
“어차피 녀석이 갈 곳은 정해져 있어! 다들 균열 입구로 뛰어!”
공간 왜곡을 활용해 가볍게 포위망을 벗어난 뒤, 아이언을 타고 빠르게 도주하기 시작하는 이안.
마족 유저들은 약 오른 표정으로 우르르 이안을 쫓아가기 시작하였고, 개중에는 이안처럼 비행형 몬스터를 타고 있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그리고 느긋하게 속도를 조절해 가며 균열을 향해 비행하던 이안은, 힐끔 뒤를 돌아보며 사악하게 웃었다.
“후후, 잘 따라오고 있는데?”
아이언의 민첩성 능력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가속 고유 능력을 굳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지금 이안을 쫓는 마족 랭커들 중 그 누구도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빠른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애초에 아이언의 민첩성 능력치가 신화 등급 중에서도 높은 편인 데다, 초월 레벨까지도 50레벨이 넘는 수준이었으니 평균 30레벨도 채 안 되는 마족 랭커들로서는 따라잡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지금 마족 유저들이 조금이라도 따라붙을 수 있는 이유는, 이안이 그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연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디 보자……. 이 페이스면 균열 입구까지 10분 정도면 도착할 것 같고. 이제 슬슬 마을 안에 있던 헬라임과 카이자르도 바깥으로 나왔겠네.”
이안의 작전은 간단했다.
본인이 먼저 마을에서 빠져나와 마족 랭커들을 유인한 뒤, 마을에 남아 있던 카이자르와 헬라임이 각각 핀과 까망이를 타고 뒤따라 나오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균열의 안쪽까지 성공적으로 마족 유저들을 유인한 뒤에는, 헬라임과 카이자르로 하여금 그들의 퇴로를 막아 버리게 할 생각이었다.
마족 랭커들이 다시 지저 세계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계획을 세운 것이다.
‘한 놈당 금화 3~5만 정도만 드롭해도 방금 쟈크람에서 쓴 만큼 금방 복구하겠는 걸?’
모든 상황이 계획대로 흘러가자 더욱 기분이 좋아진 이안은, 바위산 봉우리들 사이로 빙글빙글 비행하며 마족 유저들을 농락하기 시작하였다.
“야, 저 미친 놈 좀 잡아 봐! 대체 뭘 타고 있길래 저렇게 빠른 거야?”
“저거 아무래도 비룡인 것 같은데……. 제가 알던 비룡보다 훨씬 빠른데요?”
“잘 보면 생김새도 좀 다른 것 같기도…….”
“됐고, 균열로 못 들어가게 막아야 해! 빨리 뛰어 다들!”
마족 랭커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이안의 꽁무니를 쫓아왔다.
그리고 그렇게 10분 정도가 더 지났을 무렵.
고오오오-!
커다란 마력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균열의 입구가 이안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좋아, 마지막으로 상태 한 번씩 체크 좀 하고…….’
마족 랭커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카드인 루가릭스와 엘카릭스.
두 소환수들의 상태를 빠르게 점검한 이안은, 아이언의 고삐를 움켜쥐며 더욱 속도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아이언, 전속력으로 날아!”
그러자 마치 부스터라도 켜진 듯, 이안을 태운 아이언의 신형이 균열 안으로 쏘아져 들어갔고…….
쐐애애액-!
균열의 입구를 지나치는 순간, 이안의 눈 앞에 익숙한 시스템 메시지들이 주르륵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북부 균열’ 지역에 입장하셨습니다.
-차원의 균열로 인해 생성된 거대한 차원 마력이 온몸을 엄습합니다.
-차원 마력에 대한 적응 능력이 한계 이상을 달성하여, ‘마력 충전’ 효과가 발동됩니다.
-차원 마력의 힘을 받아들여 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마력 충전
-모든 움직임 가속 : +25퍼센트(+10퍼센트)
-모든 종류의 마력 회복 속도 : +50퍼센트(+20퍼센트)
-일반 공격 시 25퍼센트(+25퍼센트)의 확률로 공격력의 100퍼센트만큼의 차원 마력 피해를 추가로 입힙니다.
-차원 마력 공격은 대상의 방어력을 무시합니다.
……후략……
“좋아, 이제 판은 깔렸고……!”
이안은 이제 수십의 마족 랭커들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하기에 가장 좋은 판이 바로, 차원마력이 넘쳐흐르는 이 균열 안이었다.
강렬하게 쏟아져 나오는 차원 마력이 이안에게는 강력한 힘을 더해 줄 것이었으며, 마족 랭커들에게는 단단한 족쇄를 채워 줄 것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렇게 깔린 판에 몇 가지 양념을 첨가한다면…….
“루가릭스, 엘카릭스 소환!”
위이잉-!
그야말로 잘 차려진 밥상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나의 충신 루가릭스, 첫 출정에서의 활약을 기대하도록 하지.”
이안의 장난기 어린 말에 루가릭스는 심통 난 표정으로 대꾸하였다.
“뭘 하면 되는데?”
“못생긴 마족 녀석들을 싹 다 쓸어 버리면 되는 거야.”
“오호, 좀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들의 화목한 대화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하였다.
위이잉-!
방금 이안과 아이언이 통과해 들어온 균열의 입구가 또다시 꿀렁거리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손님들이 왔나 본데?”
이어서 게이트를 열고 나타난 첫 번째 마족 유저는, 이안에게 있어 무척이나 반가운 친구라고 할 수 있었다.
“이안,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쳤겠다!”
이를 뿌득뿌득 갈며 나타난 마족 랭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아레미스.
이안은 어깨를 으쓱 하며, 아레미스의 말에 대꾸하였다.
“어허, 도망이라니. 여기서 이렇게 널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지.”
그런데 어쩐 일인지, 어느새 아레미스는 여유를 찾은 표정으로 씨익 웃고 있었다.
“웃기는 소리.”
“……?”
“저 뒤쪽에 새로 생겼을 거신족 야영지 때문에, 여기에 고립된 걸 잘 알고 있는데…….”
“응?”
“능청스레 연기도 잘하는구나!”
아레미스의 이야기에, 이안은 살짝 당황하였다.
이것은 이안조차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뭐? 이 뒤편에 거신족 진영이 새로 생겼다고?’
하지만 곧 이안의 입가에는 다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거신족 야영지고 나발이고, ‘루와 엘’의 언령 마법이 있는 이안에게는 더 먹음직스런 밥그릇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뭐,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라고. 그건 네 자유니까 말이야.”
“뚫린 입이라고……!”
그리고 이안과 아레미스가 대화하는 동안에도, 균열의 입구를 타고 마족 유저들의 유입은 계속되었다.
비행 능력이 없어 뒤늦게 따라온 랭커들이 차례로 합류한 것이다.
위잉- 위이잉-!
그리고 마족 유저가 한 명씩 늘 때마다 이안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이어서 창대를 꽉 움켜 쥔 이안이 아레미스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자, 그럼 이제 보여 달라고.”
“……?”
“지난번에 네가 말했었던, 그 진짜 실력을 말이야.”
“건방진 놈,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했구나!”
그리고 그것으로, 마족 랭커 30인과 이안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