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5화 4. 아레미스의 악몽 (2) >
* * *
아레미스는 당황했다.
어쩌면 전장에 이안이 나타났을 때보다도 더, 숨어 있던 보급 창고가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보다도 더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이안이 언급한 쟈크람 마을은, 전 세계 모든 유저들 중 자신 혼자만 아는 곳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쟈, 쟈크람 마을이라고 했어 지금?”
너무도 놀란 나머지 아레미스는 거의 반사적으로 반문했고, 그에 이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하였다.
“왜? 싫어?”
“……!”
“싫으면 그냥 죽든가.”
“아, 아냐! 잠깐만!”
아레미스는 빠르게 손을 휘휘 저으며 창을 휘두르려던 이안은 저지시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대체 이안 이놈이 쟈크람 마을에 대해 어찌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건 기회일 수도 있어.’
쟈크람 마을은 지저로 통하는 균열의 입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찾기 쉬운 곳에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쟈크람 마을은 균열 입구 남동쪽에 있는 붉은 바위산 깊숙한 곳에 위치하는데, 그곳은 시뻘건 용암이 흐르는 험준한 지형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붉은 바위산에는 사나운 용암 거인들이 서식하는데, 이들은 다른 거신족들과 달리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전투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아무리 이안이라 하더라도, 쉽게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일단 이안을 쟈크람 마을 쪽으로 유인할 수 있으면, 역으로 녀석을 처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 염왕의 가문 조력자인 나는 용암거인들에게 공격받지 않겠지만, 이안은 다를 테니 말이지.’
일차적으로 빠르게 계산을 마친 아레미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이안을 향해 물었다.
“쟈크람 마을에서 뭘 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데려다줄 순 있어.”
그리고 아레미스의 긍정적인 대답에, 이안의 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오호, 그래……?”
아레미스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다만, 하나는 확실해야겠지.”
“뭐가?”
“쟈크람 마을에 데려다 줬을 때, 내가 확실히 살아 돌아갈 수 있게 뭔가 장치가 필요하지 않겠어?”
아레미스의 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 그의 생명력은 이안이 대충 한 대 치면 사망할 정도로 바닥 수준이었는데, 만약 이안이 쟈크람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공격한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리 아레미스에게 자유(?)를 줄 순 없었다.
이안 또한 약속 불이행에 대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아레미스를 인질로 잡고 있어야 했으니 말이다.
“흐음…….”
이안은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서로 윈윈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좋아, 아레미스. 네 말에도 일리가 있군.”
“그럼…… 어떻게 할 거야?”
“쟈크람 마을에 데려다 달라던 요구 사항은 일단 보류할게.”
생각지 못했던 이안의 답변에, 아레미스는 또 다시 당황하였다.
“그, 그럼……?”
더해서 이어진 이안의 말을 들은 순간, 표정이 확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대신 네가 가진 지저 세계의 월드 맵을 공유해 줘. 그럼 여기서 꺼내서 곧바로 살려 보내 주도록 하지.”
“……!”
카일란에서는 다른 유저에게 자신의 월드 맵 일부를 공유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그리고 맵을 공유 받은 유저는 본인이 가지고 있던 월드 맵을 자동으로 업데이트할 수 있게 된다.
본인이 밝혀 놓은 맵에 공유받은 맵이 더해지면서, 가보지 않은 맵의 구조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안의 제안을 들은 아레미스는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맵을 공유해 달라는 것 자체가 오히려 요구 사항은 더 커진 것인데, 리스크는 하나도 줄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대체 뭐가 달라진 건데?”
“음……?”
“이 제안도 마찬가지로, 맵만 공유받은 다음 네가 날 죽여 버릴 수도 있는 거잖아.”
물론 아레미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월드 맵이 아닌 지저세계의 맵만을 이안에게 공유해 주는 것이었지만, 지금까지 지저세계에 들어온 마족 유저가 거의 없는 만큼, 아레미스의 월드맵이 가진 가치는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이안 완고하기 그지없었다.
“싫어?”
“으응……?”
“그럼 죽든가.”
“하아…….”
이안이 또다시 창을 들이밀자, 아레미스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순간적으로 그냥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하였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잃어버리게 될 퀘스트 보상도 보상이지만 데스 페널티도 엄청날 테고, 동맹 가문 퀘스트까지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테니까…….’
여기서 죽는다면 적어도 일주일 이상의 손해를 보게 될 것이고, 그 정도 손해를 본다는 것은 후발 주자들에게 콘텐츠 선점 기회를 전부 헌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족 랭커들이, 하나 둘 지저세계에 진입하고 있을 테니 말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혼돈에 빠져 있는 아레미스의 의사 결정을 돕기 위해, 이안이 슬쩍 다시 입을 열었다.
“여, 아레미스.”
“왜?”
“정 불안하면 내가 계약서 하나 써 줄게.”
“계약서?”
“왜 카일란 계약서 있잖아. 잠깐만 기다려 봐.”
이안은 인벤토리를 열어, 항시 상비하고 다니는 카일란 계약서 아이템 하나를 꺼내 들었다.
라오렌에게 임무(?)를 줄 때마다 애용하는 아이템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인벤토리에 구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슥슥-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계약서를 써 내려가는 이안.
그리고 잠시 후, 이안은 아레미스에게 계약서 내용을 보여주었다.
-카일란 계약서.
-이 계약서에 갑과 을 모두가 사인을 한 시점부터, 갑과 을은 2시간 동안 서로 공격할 수 없다.
-만약 계약을 어길 시 상대에게 10만 차원코인을 지급하도록 한다.
-단, 을이 갑에게 ‘지저 세계의 월드 맵’을 공유했을 시에만, 이 계약서는 유요하다.
갑 : 이안 / 을 : 아레미스
계약서의 내용을 확인한 아레미스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LB사의 공증을 받을 수 있는 이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면, 이안이 함부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계약서의 내용대로라면, 오히려 이안이 약속을 어겨서 10만 차원코인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준.
“조, 좋아. 알겠어, 이안.”
“후후.”
“네 제안을 수락하도록 하지.”
일단 생각을 결정하자, 계약은 금방 진행되었다.
슥- 스슥-
이안의 서명이 들어간 계약서를 건네받은 아레미스는 곧바로 계약서에 서명을 한 뒤, 이안이 요구한 대로 월드 맵을 공유한 것이다.
띠링-!
-마족 유저 ‘아레미스’로부터 ‘지저地底’의 월드 맵을 공유 받았습니다.
-마족 유저 ‘아레미스’의 맵 정보가 동기화됩니다.
그리고 아레미스에게 맵을 공유받은 이안은, 약속대로 토르를 시켜 건물 잔해를 치우기 시작하였다.
그그긍- 쿵-!
그리고 그 안에서 빠져나온 아레미스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이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근시일 내로 쟈크람 마을에 오길 바라.”
“음……?”
“다음에 만났을 땐, 내 손으로 네놈을 죽여 줄 테니 말이야.”
비장한 표정으로 말하는 아레미스를 보며, 이안은 피식 웃었다.
“뭐, 건물에 깔려 죽을 뻔한 실력으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좋을 대로.”
“후우…….”
이안의 말에 얼굴이 시뻘개진 아레미스는 곧바로 걸음을 돌려 달리기 시작하였다.
이안에게 공격받지 않는다 하여 다른 용족들에게까지 안전한 것은 아니었으니, 한시라도 빨리 이 위험한 전장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아레미스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던 이안은, 실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흐흐, 토르 덕분에 생각지도 못했던 꿀을 얻었어.”
이안은 아레미스에게 받은 지저세계의 월드 맵을 오픈해 보았다.
지저세계는 이안이 아직 발조차 들여 보지 못한 새로운 맵이었으니, 그냥 지도 한 장을 통째로 얻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아레미스, 네 말대로 근시일 내에 다시 만나자고. 그땐 더 큰 걸 뜯어내 줄 테니 말이야.’
히죽히죽 웃은 이안은, 접어 두었던 퀘스트 창을 다시 오픈해 보았다.
거점 하나를 싹 털면서 보급 창고는 네 개나 부숴 버렸으니, 퀘스트 완료 조건이 다 충족되었는지 확인해 본 것이다.
-클리어 조건 : 거신족 보급 창고 파괴 (4/3)
‘마력의 심장’ 아이템 회수 (2/5)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이안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쩝, 비어 있는 보급 창고가 두 개나 되어서, 마력의 심장은 아직 다 회수하지 못했나 보네.’
이안이 거점을 파괴하면, 라페르 일족 전사들이 그 안에 있는 물품들을 회수한다.
때문에 마력의 심장이 몇 개나 회수되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조금밖에 달성되지 않아서 아쉬웠던 것이다.
“뭐, 거점 하나 터는 데 1시간도 채 안 걸린 것 같은데, 몇 군데 더 털면 마무리할 수 있겠지, 뭐.”
긍정적으로 생각한 이안은 걸음을 돌려 폐허가 된 전진 거점을 통과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전진 거점은 분명 이곳 한 군데가 아닐 것이었으니,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다음 맵으로 이동하는 도중 이안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정신없이 싸우느라 생각지 못하고 있었던 내용이 문득 생각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방금 쓸어버린 여기가 거점 진지였던 것 같은데, 장로들이 조심하라 했던 마력의 거인은 아직 그림자도 못 만났네? 마강석인지 뭔지도 아직 한 개도 못 찾았고…….’
라페르 일족 장로들과 같이, 최상위 퀘스트를 주는 메인 NPC들은 결코 실없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들이 퀘스트를 주며 하는 말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요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퀘스트에 전부 도움이 되는 말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안은, 마력의 거인이라는 녀석을 적어도 한 놈 이상은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동안 한 녀석도 만나지 못할 개체였다면, 장로들이 그렇게 심각하게 언급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저쪽에 거신족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안.”
“테사르의 말대로군. 저쪽이 거신들의 주력부대가 있는 본거점이야.”
라페르 전사들 중 우두머리격 NPC인 테사르의 말에, 이안의 시선이 그가 가르친 방향으로 자동으로 움직였다.
이어서 아이언을 타고 조금 높은 곳으로 움직이자, 거대한 목책으로 둘러져 있는 거신들의 기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가 본 거점……. 어쩐지 전진거점의 난이도는 너무 낮은 느낌이었어.’
이어서 조금 더 거리가 가까워지자, 이안은 처음 보는 외형을 가진 거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덩치는 오히려 다른 거신들보다 조금 작은 느낌이지만.
거신들이 피륙으로 만들어진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다면, 녀석들은 마치 로봇처럼 철갑으로 온몸을 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발견한 이안은 본능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녀석들이 바로 라페르 장로들이 말했던, ‘마력의 거인’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