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4화 4. 아레미스의 악몽 (1) >
토르는 망치질을 제일 좋아한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거대한 망치로 뭔가를 파괴하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파괴의 해골기사’라는, 그 수식어답게 말이다.
쿵- 쾅!
-그워어, 그워어어(신난다, 신나)!
반면에 토르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누군가에게 맞는(?)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래서 토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저항 능력이 없는 무생물을 때려 부수는 것이었다.
-그르륵, 크어엉(망치 맛 좀 봐라)!
쾅- 콰쾅-!
신바람 난 토르가 망치를 내리찍을 때마다 보급 창고의 내구도는 뭉텅이로 깎여 나갔고…….
콰득-
-‘거신족 보급 창고’의 내구도가 97,803만큼 감소합니다.
-‘거신족 보급 창고’의 내구도가 105,123만큼 감소합니다.
……후략……
100만 단위가 넘을 정도로 높은 내구도를 가지고 있던 거신족의 보급 창고는 순식간에 절반 이상의 내구도를 잃어버렸다.
-그르릉- 그워어어!
마치 전장의 선봉에 선 대장군처럼, 망치를 치켜든 채 용맹하게 포효하는 토르.
쿵- 쿵-
무너져 가는 보급 창고를 보며 희열을 느끼는 것인지, 토르의 망치질은 더욱 과격하고 빨라졌다.
쾅- 콰앙- 우지끈!
그리고 그렇게, 5분 정도의 시간이 더 흘렀을까?
콰앙- 와르르르!
결국 망치질을 더 이상 버텨 내지 못한 보급 창고가 우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거신족 보급 창고의 내구도가 전부 소진되었습니다.
-거신족 보급 창고가 파괴되었습니다!
-그워어어, 그워엉(주인, 어디 있냐)? 그어어억(내가 해냈다)!
마치 숙제를 끝내고 칭찬을 기다리는 초등학생처럼 두리번거리며 이안을 찾는 토르.
하지만 이 복잡한 전장에서 이안을 찾아내기에, 토르는 너무 둔하고 느렸다.
-그르르륵(열심히 일했으니, 잠깐 쉬어 볼까)?
성취감(?)에 도취된 토르는, 자신이 무너뜨린 보급 창고의 잔해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물론 능동적으로 주인을 찾아가 다음 임무를 받을 수도 있었으나, 굳이 그렇게까지 일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르륵 그어억(다들 잘 싸우는군).
거대한 머리통을 좌우로 천천히 돌리며, 여유롭게 전장을 스캔하는 토르.
그런데 그렇게 토르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 때.
덜컥- 덜컹-!
토르의 허벅다리 아래에 눌려 있던 커다란 잔해 덩어리 하나가, 미약한 소리를 내며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그에 의아한 표정이 된 토르는 움직이는 잔해를 슬쩍 들춰 보았다.
-그르륵(이게 왜 움직이지)?
하지만 다음 순간, 토르는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켁, 커헉……. 사, 살려 줘!”
들춰낸 잔해 더미 사이로, 붉은 투구를 쓰고 있는 웬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무너진 건물에 온몸이 묻힌 상태로, 얼굴만 빼꼼 나와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
-그륵, 그르르륵(뭐야, 넌 누구냐)?
놀란 토르는 이빨을 딱딱거리며 망치를 치켜들었고, 그에 더욱 놀란 남자는 미친 듯이 고개를 휘젓기 시작하였다.
“아, 아냐, 그러지 마, 친구! 이, 일단 망치 좀 치우고 얘기할까 우리?”
남자의 간절함을 느낀 토르는 일단 치켜들었던 망치를 내려놓았다.
머리 나쁜 토르가 보기에도 건물에 깔린 남자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딱- 따딱.
이빨을 따닥거리며, 생각에 빠진 토르.
-그릉 그그극(이놈을 어떡할까)?
그리고 잠시 동안 머리를 굴린 토르는, 일단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판단을 보류하기로 하였다.
지능 수치가 100도 채 안 되는 토르가 판단하기엔, 너무도 어려운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딱- 따다닥-!
생각을 마친 토르는 다시 건물의 잔해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털썩-!
그리고 일부러 그랬는지 우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건물 밑에 깔린 남자가 나올 수 없도록, 정확히 그의 머리 옆을 엉덩이로 눌러 버렸다.
“야, 이 미친 해골바가지야, 살려 달라고!”
남자는 절규했지만, 거대한 해골은 이제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다만 앉은 자세 그대로 마치 석상이라도 된 듯 몇 분이 더 지날 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을 뿐이었다.
* * *
거신족 전진기지에 진입한 지 대략 1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띠링-!
기분 좋은 시스템 메시지들이 우르르 떠오름과 동시에, 용족 진영은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거신족 자경단장’을 성공적으로 처치했습니다!
-전진거점을 지키는 ‘거신족 자경단’을 모두 섬멸하였습니다!
-조건을 충족하여, 추가 보상을 획득합니다.
-경험치를 127,500만큼 획득하였습니다.
-가문 ‘암천’에 대한 공헌도가 1,000만큼 증가합니다.
-‘지저금화’ 재화를 3,500만큼 획득했습니다.
……후략……
‘후후, 레벨이 또 올랐네. 조만간 60레벨도 충분히 찍을 수 있겠어.’
추가 보상으로 떠오른 경험치와 재화를 확인한 이안은, 히죽 히죽 웃으며 승리의 기분을 만끽하였다.
지금까지 얻은 보상들도 충분히 훌륭했지만 아직 진행 중이던 퀘스트의 메인 보상이 남아 있었으니, 더욱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전장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두 개의 보급 창고만 뚝딱뚝딱 파괴해 버리면, 이대로 퀘스트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터였다.
‘기다려라, 루가릭스! 형이 간다!’
신이 난 이안은 토르를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최근 들어 많이 게을러진 토르 녀석은 분명 시킨 일만 마친 뒤 가만히 있을 게 분명하였다.
그리고 토르를 발견한 이안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토르 녀석, 아예 자리 잡고 주저앉아 있네?’
이안은 바로 아이언의 고삐를 잡아당겨 토르가 있는 곳을 향해 비행하였다.
이안이 도착하기 전 전장에서 싸우던 여러 용족들이 이안에게 말을 걸어왔지만, 그것들을 일단 못 들은 척하기로 하였다.
“오, 그대는 정말 대단한 용맹을 가진 전사로군. 우리 빙해의 가문과 동맹으로서 함께하는 건 어떠한가!”
“무슨 소리! 이런 뜨거운 용맹을 지닌 용사라면, 응당 우리 홍염의 가문과 함께해야 하는 법.”
“어허, 이거 왜들 이러시나. 이안, 우리 성토의 가문으로 찾아오시게. 천주께서 암천 녀석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잘해 주실 테니 말일세.”
지금 이안에게는, 이들의 관심에 일일이 대응해 줄 시간 같은 것이 없었다.
“토르, 다음 건물 부수고 있었어야지! 태평하게 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이안의 부름에 화들짝 놀란 토르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안을 향해, 뭐라 변명하기 시작하였다.
-드륵- 그드득, 그르르륵(여기 수상한 놈이 있어서 지키고 있었던 거다, 주인아).
물론 이안은 토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아리송한 표정이 되었다.
“음? 뭐라는 거야?”
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다고 토르의 말을 무시해 버리기에는, 지금껏 토르가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이안이었다.
-그륵, 그르륵(여기 이놈이다, 주인아).
토르는 망치를 들지 않은 왼손으로 자신이 깔고앉아 있던 자리를 가리켰고, 이안의 시선은 자연히 토르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
그곳을 확인한 이안은, 당황스러운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뭐냐, 마족이 왜 여기서 나와?”
이안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는 아레미스와 달리 이안은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가 마족이라는 정도는 외모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족을 발견하자, 이안은 토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했었는지 대략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짜식, 잘했어. 어떻게 이런 기특한 생각을 했대?”
-드르륵, 드르르륵(내가 이 정도다, 주인아)!
“못 본 사이 머리가 많이 좋아졌는데?”
-그워어어(더 칭찬해 줘라)!
“그러니까 저쪽으로 가서, 보급 창고 두 개도 마저 부수고 있어. 이번에도 잘할 수 있지?”
-그허엉! (물론이다! 맡겨 줘라!)
토르와 의미 불명의 대화를 나눈 이안은 녀석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한 뒤, 잔해에 깔려 있는 마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히야, 토르 이놈은 대체 마족을 이 안에 어떻게 가둔 거지? 신통하네.’
마족은 거의 망연자실, 해탈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이안은 빠르게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그냥 죽여도 되지만, 그건 재미없고…….’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띤 이안이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저놈을 어떻게 써먹을 방법이 없을까?’
그리고 다음 순간.
“……!”
뭔가를 떠올린 이안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 * *
인간 유저들에게 기사 클래스가 있다면, 마족 유저들에게는 ‘마령 기사’ 클래스가 있다.
그리고 마계의 최상위 랭커인 아레미스는 전 세계 마령기사 클래스 유저들 중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최상위의 실력을 가진 랭커였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건물 잔해에 깔린 채로 무력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사, 살려 줘라, 이안.”
그와 눈이 마주친 아레미스가 불쌍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고, 그 목소리를 들은 이안은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너, 날 알아?”
그리고 이안의 이 반문은, 아레미스에게 깊은 내상(?)을 안겨 주었다.
“크윽, 설마 네놈은 내가 기억나지 않는단 말이냐!”
“음……? 우리 아는 사이였나? 어디서 만났는데?”
“신의 말판 전장에서…….”
“아, 그래? 그때 내가 한두 명이랑 싸웠어야 기억을 하지.”
“…….”
“아예 기억에 없는 걸 보면,오래 싸우지도 않았나 보네.”
“후우…….”
이안의 강력한 팩트 폭력에, 잠시 말을 잃어버린 아레미스.
하지만 구겨진 자존심은 이미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지금 아레미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크흑, 이 수모는 언제고 반드시 갚아 주리라!’
속으로 깊게 다짐한 아레미스는, 이안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과거의 인연을 생각해서 한 번만 살려 줘라, 이안.”
“흐음…….”
“살……려 준다면, 내가 갖고 있는 지저금화를 좀 나눠 줄게.”
“지저금화?”
“그래. 너는 용족 진영이라 모르겠지만, 이거 되게 귀한 거라고.”
아레미스의 말에, 이안의 두 눈이 반짝였다.
애초에 이안이 아레미스로부터 뜯어 보려고 했던 것도 이 지저금화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으래? 지저금화 얼마나 줄 수 있는데.”
솔깃해 보이는 이안의 표정에, 아레미스는 마른침을 꿀꺽 집어삼켰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금화가 3천 냥 정도에, 살아남으면 얻을 수 있는 금화가 2,500냥 정도 되니까…….’
빠르게 계산을 마친 아레미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800냥 정도 줄 수 있어.”
“800……?”
“아니, 1천!”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그, 그럼 1,200!”
아레미스의 말을 들은 이안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아레미스가 제안한 액수가 이안의 입장에서는 너무 푼돈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레미스로선 살아남아서 얻을 수 있게 될 금화의 절반 가까운 큰 액수를 주겠다는 나름 파격적인 제안이었지만, 그것은 그저 아레미스의 기준일 뿐이었다.
‘이 친구가 지금 장난하나. 내가 오늘 파밍한 금화만 2만 냥은 되는 것 같은데.’
하지만 애초에 금화 자체를 뜯어낼 생각은 별로 없었던 이안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딱히 금화는 필요 없어, 친구.”
“이, 이거 진짜로 귀한 거라니까?”
“귀한 건 알겠는데, 난 지금 다른 게 더 필요하거든.”
이안의 말에, 아레미스의 동공이 살짝 확대되었다.
필요한 게 있다는 말은, 그것을 충족시켜 주면 자신을 살려 줄 수도 있다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그 필요한 게…… 뭔데?”
이안을 향해 되물은 아레미스는, 긴장으로 인해 마른침을 다시 한차례 꿀꺽 집어삼켰다.
그리고 잠시 후.
뜸을 들인 이안의 입이 다시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지저세계에 쟈크람 마을이라는 곳 있지?”
“……!”
“거기에 날 데려다 줘. 그럼 살려 주도록 하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들은 아레미스의 두 눈이 더욱 크게 확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