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3화 1. 용족과 거신족 (1) >
전투는 힘들고, 또 싱거웠다.
누가 듣는다면 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정말 딱 그 말 그대로의 상황이었다.
둘의 거신족을 상대하면서 이안은 진이 다 빠져나갈 정도로 전력을 쏟아부어야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처치하는 데 크게 어려움을 겪은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었다.
“휴우, 이 피 돼지들. 느려 터진 것들이 맷집은 엄청 좋네.”
쿵-!
바닥에 쓰러져 내리는 거신족 정찰병을 보며 이안은 한 차례 깊게 심호흡하였다.
이마에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는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이안의 생명력은 100퍼센트를 유지하고 있었다.
단순히 처치하는 것보다도 녀석들의 공격 패턴이나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에, 이안은 아이언을 제외하고는 소환수나 가신들의 도움조차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거신족의 공격을 단 한 번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안은 어떤 부분에서 힘들었다는 것일까?
그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균열 안으로 들어오면서 맵 전체에 깔린 ‘디버프’ 때문이었다.
움직임을 50퍼센트 가까이 둔화시켜 버리는 이 디버프를 받고 나니, 반사 속도가 빠른 이안조차도 거인의 느린 공격을 피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본다면 한차례도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느려진 움직임에 적응하는 동안에는 녀석들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히지도 못하였다.
피하는 데 급급하여, 한동안 이안 또한 공격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온몸을 짓누르는 듯 느껴지는 이 디버프의 효과 때문인지, 평소보다 전투로 인한 피로도가 배 이상으로 누적되는 느낌이었다.
똑같은 움직임을 구사해도 힘은 두 배 넘게 드는 것.
이안이 힘들었다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물리적인 힘듦이었다.
때문에 이안은 이 균열이라는 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오, 이건 진짜 내가 지금까지 겪어 본 디버프 중에 최악이잖아.”
이안이 가장 좋아하는 사냥 법은 ‘무한 노가다’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무지막지하게 피로도를 소모하면, 오랜 시간 사냥을 할 수가 없다.
피로도가 떨어지면 동화율이 낮아지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플레이어의 체력 또한 급격히 떨어지니 말이다.
그렇다고 경험치를 드레이크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이안으로서는 무척이나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거, 퀘스트 전부 다 클리어하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는데…….”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이안의 뇌리에 음흉한(?) 루가릭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녀석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감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후후, 루가릭스 녀석, 잔머리를 조금 굴렸군.’
물론 그렇다고 해서, 루가릭스가 도망가기 전까지 퀘스트를 못 끝낼까 봐 불안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손안에 들어온 루가릭스를 놓칠 만큼, 이안이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툭-툭-.
거신들과 전투하느라 갑주에 쌓인 먼지를 털어낸 이안이, 시야 구석에 떠 있는 시스템 메시지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뭔가 상황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서는, 모든 시스템 메시지를 꼼꼼히 분석하는 것이 필수라 할 수 있었다.
-‘거신족 정찰병’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가문 ‘암천’에 대한 공헌도가 5만큼 증가합니다.
-‘지저금화(地底金貨)’ 재화를 276만큼 획득했습니다.
-‘거신족 정찰병의 군번줄’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경험치를 4,389만큼 획득하였습니다.
‘일단 특이점은 지저금화라는 새로운 재화를 얻었다는 것 하나 정도인데…….’
이안은 두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메시지의 마지막에 떠올라있는 경험치 수치를 확인하였다.
‘만약 이게 특별히 쓰이는 용도가 없다면, 최초발견 버프도 없는 상황에서 거신족 사냥은 최대한 지양해야겠어. 퀘스트 관련 몹만 잡으면서 최대한 빠르게 진행해야지.’
이런저런 계산을 머릿속으로 돌려보며 퀘스트 아이템을 챙긴 이안은, 다시 아이언의 등에 올라 이동할 준비를 하였다.
둘의 정찰병을 처치하여 획득한 군번줄은 한 개에 불과했으나, 필요한 나머지 두 개를 당장 얻을 생각은 아니었다.
어차피 B 퀘스트인 ‘거신족 보급창고 파괴’임무라든가 C 퀘스트인 ‘거신족 정찰대장 처치’임무를 진행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거신족 정찰병과 싸워야 할 일이 계속해서 생길 테니 말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솔바르가 준 퀘스트보다 루가릭스의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게 더 중요해. 루가릭스가 도주를 시도하기 전에, 언령 마법을 얻어서 녀석을 잡으러 가야 하니 말이야.’
다시 균열의 지도를 펼친 이안은 지도에 표기된 라페르 일족의 부족 거점 좌표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전투 중에 활성화된 아이언의 ‘급가속’ 고유 능력을 활용하여 최대한 빠른 속도로 균열 사이를 비행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스택을 2중첩밖에 쌓지 못했기 때문에 민첩성 버프는 15퍼센트에 불과하였지만, 균열 디버프를 받아 답답한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 할 수 있었다.
“후우, 언령 마법인지 뭔지, 내가 그거 꼭 얻어 내고 만다. 루가릭스는 덤이고.”
아이언을 조종하는 와중에도,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 이안.
그런데 그렇게 이안이 10여분 정도를 더 비행했을 무렵.
띠링-!
이안의 눈앞에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마력 저항력’ 능력치가 1만큼 증가합니다.
-차원 균열의 힘으로 인한 압력이 미약하게 줄어듭니다.
-둔화 효과가 0.5퍼센트만큼 감소합니다(47.5퍼센트->47퍼센트).
-‘차원 마력 저항력’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저항력이 0.3퍼센트만큼 회복됩니다(-28.5퍼센트->-28.2퍼센트)
-역류하는 차원의 힘에, 조금 더 적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이안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었다.
* * *
카일란에서는 일반적으로, 맵 전체에 걸려 있는 디버프 효과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개체들에게 일괄 적용된다.
지금처럼 맵 자체에 디버프가 걸려 있다면, 유저건 NPC건 몬스터건 관계없이 그 디버프가 전부 적용되는 것이 보통이라는 것이다.
물론 화염 속성 관련 디버프가 있는 맵에 해당 속성의 몬스터가 적용받지 않는 특별한 케이스들도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경우에서 위의 방식대로 통용된다는 것.
때문에 이안은 거신들과 전투하던 중 약간 의아했던 부분이 하나 있었다.
거신들의 속성은 화염 속성이었고, 딱히 차원 마력과 관련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 외형을 가지고 있었건만, 녀석들은 차원 균열로 인한 강력한 둔화 디버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원래부터 민첩성 스텟이 저질인 거신족들이 이 둔화 디버프까지 적용받았더라면, 조금 과장 보태서 눈 감고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손쉬운 녀석들이 되었었을 터.
하지만 눈앞에 떠오른 이 새로운 메시지들을 본 순간 이안은 이 맵의 설정이 어떻게 된 것인지 대번에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거…… 디버프에 적응이라는 걸 할 수 있는 개념이었던 거네. 신박한데……’
이안이 획득한 차원 마력 저항력은 고작 1포인트에 불과하였지만,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는 점에서 이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포인트였다.
만약 말 그대로 완벽하게 적응할 수 있다면, 이 무지막지한 둔화 디버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해서 이안은, 본격적으로 분석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자, 다시 한 번 계산해 보자. 저항력이 1 오르면서 둔화효과는 0.5퍼센트가 감소했고, 저하됐던 모든 저항력은 0.3퍼센트만큼 복구되었어.’
저항력이 1포인트 단위로 움직인 탓에, 계산은 암산으로도 어렵지 않았다.
0.5에 100을 곱한 50퍼센트가 최초에 부여되었던 둔화 효과였으며, 0.3에 100을 곱한 30퍼센트가 다른 모든 저항력들을 감퇴시키는 디버프의 수치였으니.
저항력을 100까지 올린다면 이 모든 디버프 효과가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단번에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이 차원마력 저항력이라는 신규 스테이터스의 맥시멈은 100포인트로 설정되어 있겠지?’
오랜만에 자신의 상태 창을 오픈한 이안은 세부 능력치 창을 열어 새로 얻은 이 스테이터스의 설정을 확인해 보았다.
대략적으로 어떻게 설정되어 있을지는 짐작 가능한 부분이었지만, 그래도 꼼꼼히 확인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순간…….
“……!”
이안은 다시 한 번 예상을 넘어선 정보를 하나 입수할 수 있었다.
‘맥시멈이 100포인트가 아니라고?’
New라는 작은 글씨가 반짝이고 있는 신규 스텟의 설정정보에서, 아래와 같은 파트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최대 능력치(Maximum Status) : 150
그리고 이렇게 예상 범주 밖의 정보가 유입되자, 정리되는 듯했던 이안의 머릿속은 또다시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눈에 보이는 비율대로라면 저항력 100을 달성했을 때 더 이상 성장시킬 이유가 없는데……. 대체 150이라는 수치는 왜 존재하는 걸까? 혹시 수치가 오를수록 효과가 감소하는 스텟인 건가?’
이안은 상상력과 경험을 동원하여 여러 가지 가정을 세워 보았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어떻게 될 것이다.’라고 구체적인 방향성을 잡기엔, 이안에게 주어진 단서가 아직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저항력 1포인트를 얻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얼마인지나 정확히 다시 측정해 보자.’
시스템 메시지는 분명 ‘적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때문에 이안은, 이 디버프의 영향을 받고 있는 시간에 비례하여 저항력이 상승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던전 들어온 지 대충 15분 정도 지난 것 같으니까……. 라페르 부족 찾아내기 전까지는 저항력 1포인트 정도 더 올릴 수 있겠지?’
하지만 이제까지와 달리, 항상 높은 적중률을 보여주던 이안의 예측은 이번에도 빗나가고 말았다.
15분이 아니라 30분도 넘는 시간이 추가로 지나갔건만, 저항력이 상승했다는 메시지는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흠……. 시간 비례가 아니었단 말이지?’
예상이 번번이 빗나가자, 그는 혼란스러우면서도 뭔가 흥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안이 이렇게 ‘차원 마력 저항력’이라는 새로운 능력치에 대해 고찰을 하는 동안, 어느덧 이안 일행은 ‘균열의 지도’에 표시되어 있던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었다.
균열 중간 중간에 있던 거신족들에게 싸움을 걸었다면 결코 30분 만에 도착할 수 없었겠지만, 일단 그들을 전부 무시하고 달린 덕에 금방 라페르의 거점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균열의 절벽 한편에 커다랗게 뚫려 있는 공동과, 그 안에서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찬란한 빛깔의 마법 광채들.
아이언을 타고 동굴의 입구에 다가간 이안은 사뿐히 그 위에 내려섰고…….
타탓.
그 뒤를 카이자르와 헬라임이 곧바로 따라 들어왔다.
“정말 깊숙한 곳에도 숨어 있군…….”
미로를 방불케 하는 복잡한 구조를 가진 차원의 균열 구석진 곳에, 정말 은밀하게 숨어 있는 라페르 일족의 거점.
그리고 다음 순간, 경쾌한 알림과 함께, 이안의 눈앞에 드디어 기다렸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