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0화 4. 거신족의 비밀 (3) >
* * *
스슥- 스윽-.
마치 도둑고양이가 생선 가게에 숨어들기라도 하듯, 흑염각으로 들어가는 루가릭스의 걸음걸이는 무척이나 조용하고 은밀(?)했다.
‘아, 이렇게 긴장될 수가……. 어떻게 세카이토 님을 뵈러갈 때보다 더 떨릴 수가 있는 거지?’
“후우…….”
한차례 깊게 심호흡을 한 루가릭스는 열기가 느껴지는 대장간의 안쪽을 응시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인지 루가릭스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인간 주제에 이렇게나 빨리 중간자의 위격을 얻어 낼 줄이야…….’
아무리 천방지축에 제멋대로인 루가릭스라 하여도,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존재가 둘 있었다.
하나는 용천의 주인이자 모든 용들의 신(神)인 ‘세카이토’였으며, 다른 하나는 이곳 암천의 주인이자 암천궁의 궁주인 ‘솔바르’였다.
때문에 루가릭스는, 흑염각에 가보라는 솔바르의 명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천주님께서도 무심하시지. 날 결국 그런 괴물 같은 인간에게 보내시다니…….’
솔바르에게 불려 갔던 루가릭스는 나름대로 항변도 했었다.
다만 그것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뿐이었다.
루가릭스는 이곳으로 오기 전, 솔바르와 나눴던 대화를 잠시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 * *
“천주님, 제가 어째서 그 인간에게 가야 하는 겁니까?”
마치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들어 버렸다는 듯, 세상 다 잃은 표정으로 솔바르에게 되묻는 루가릭스.
그런 그를 향해, 솔바르는 인자한(?) 표정으로 대꾸하였다.
“장차 우리 암천의 동맹이 될 인간 영웅이다. 게다가 그 뛰어난 능력은 이미 입증된 바. 그와 미리 안면을 터 둔다면, 앞으로 거신들과의 전쟁을 위해서라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너무도 일목요연하고 타당한 솔바르의 이야기에, 루가릭스는 잠시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크윽…….”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
루가릭스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저 말고 다른 드래곤 보내면 안 됩니까?”
“글쎄. 맨날 궁 안에서 밥만 축내는 식충이는 네 녀석밖에 없는데…….”
“천주님!”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거센 루가릭스의 저항에 솔바르가 의아한 표정이 되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반항이 심하군, 루가릭스. 가지 않아야 될 타당한 이유라도 있는 게냐?”
솔바르의 물음에, 루가릭스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가지 않아야 될 너무도 확실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 이유가 뭔가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으윽, 인간계에서 섣불리 했던 약속을 천주님께 말씀드려야 한다니…….’
중간자가 되어 찾아온다면 소환수가 되어 계약해 주겠다던, 루가릭스 용생(龍生)을 통틀어 가장 뼈아픈 말실수.
이미 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고, 그것이 용언(龍言)이라면 번복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솔바르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크하하핫. 루가릭스, 네놈이 인간계에 가서 저지른 일들 중 제일 재밌는 이야기로구나. 푸하핫!”
“아니, 웃으실 일이 아닙니다, 솔바르 님. 이안이라는 인간은 정말 보통 인간이 아닙니다!”
“그래. 보통이 아닌 인간이니, 네놈을 구워삶아 소환수로 계약시켰겠지.”
“저 아직 계약 안 했거든요?”
루가릭스의 반발에, 솔바르가 피식 웃으며 대꾸하였다.
“걱정 마라, 루가릭스. 오늘, 아니, 지금 바로 그 이안이라는 인간과 계약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 테니 말이다.”
“아, 솔바르 니임…….”
솔바르는 루가릭스가 이안이라는 인간과 계약하게 된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만히 두면 게으름을 피우며 요리조리 도망만 다니는 루가릭스가 이안과 함께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암천을 위해 일해야 할 테니 말이었다.
‘매번 말썽만 부리며 제멋대로 구는 루가릭스 녀석을 묶어 둘 곳이 드디어 생겼군.’
하여 솔바르는, 울상이 되어 있는 루가릭스를 향해 근엄한 목소리로 명하였다.
“암천의 신하 루가릭스는 지금 바로 흑염각으로 가 우리의 동맹을 만나도록 하라.”
“그냥 만나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만나서 동맹을 도와 거신의 침략자들을 물리쳐야지.”
“후우우…….”
그렇게 루가릭스는 이안과의 감격적인(?) 재회를 하게 되었다.
* * *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가 귓전으로 흘러들어오자마자, 이안은 누가 이곳에 도착한 것인지 직감적으로 예측할 수 있었다.
‘크, 드디어……!’
때문에 이안의 시선은 즉각적으로 열린 문을 향해 돌아갔고, 이어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안은 상기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 이게 누구신가!”
마치 십년지기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듯, 반가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손님을 맞는 이안.
하지만 이안과 달리 그 인사를 받는 소년의 표정은 뭔가 우울해 보였다.
“후우, 네 녀석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반갑지 않아?”
“내가 모르는 사이에 반갑다는 말의 의미가 바뀌었나 보군.”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흑염각에 등장한 손님의 정체는 바로 루가릭스.
루가릭스와 마주한 이안은 그의 까만 머리를 헝클어 주었다.
“자식, 귀여운 건 여전하네.”
이안은 근래 만났던 그 어떤 NPC보다도, 루가릭스가 훨씬 더 반가웠다.
‘크, 요 사랑스러운 녀석.’
루가릭스를 향한 이안의 애정(?)은, 그야말로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틱틱대기는 해도, 루가릭스만큼 그에게 많은 정보와 도움을 준 NPC도 흔치 않았으니 말이었다.
물론 루가릭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귀, 귀엽다니! 감히 나 루가릭스에게 그런 무례한 표현을 하다니!”
반발하는 루가릭스를 향해 이안은 가볍게 비웃음을 날려 주었다.
“무례라니. 내 소환수한테 귀엽다는 말도 마음대로 못해?”
“누, 누가 네 소환수야?”
“누구긴 누구겠어, 바로 너지.”
“……!”
“설마 유피르 산맥에서 했던 약속을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그, 그건……!”
씨익 웃은 이안은 루가릭스를 향해 다가갔고 루가릭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이안의 손에서, 루가릭스와의 계약을 위한 새하얀 소환 마력이 빛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소환술사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 고유 능력인 ‘포획’이 발동된 것.
물론 모든 소환수는 이 힘에 저항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루가릭스의 경우에는 예외라고 할 수 있었다.
“하, 하루크 님 나 좀 도와줘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응원하네, 이안.”
“아니, 하루크 님!”
흑염각의 주인인 하루크에게조차 철저하게 외면당한 루가릭스.
루가릭스는 다가오는 이안을 보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어둠의 지배자인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인간에게 계약당할(?) 수는 없어!’
소환술사와 소환수 사이의 계약은 사실 완전히 일방적인 상하 종속 관계의 계약은 아니었다.
물론 계약 중일 때는 소환수가 절대적으로 소환술사의 명령을 따라야 하지만, 계약을 파기하는 것은 소환술사만의 권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친밀도가 바닥까지 떨어지고 소환술사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한다면, 소환수도 얼마든지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게으르기 그지없는 루가릭스에게 있어서 소환수 계약은 격렬하게 거부하고 싶은 일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안과 계약하는 순간, 무한 노동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만큼은 확정이었으니 말이다.
‘크윽, 카르세우스랑 뿍뿍이처럼 되긴 싫다고! 어쩌면 라이처럼 세뇌당할지도 몰라…….’
때문에 루가릭스는 정말 필사적이었다.
평소엔 잘 사용하지도 않는 두뇌(?)에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었지만, 어떻게든 이 난관을 타개하고 싶었으니 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발한(?) 생각 하나가 루가릭스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
하여 루가릭스는 다급한 목소리로 이안을 불러세웠다.
“자, 잠깐, 이안!”
“왜 또? 설마 드래곤씩이나 되어서 본인의 말을 번복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아, 아니야, 그런 거. 우리 용족은 용언의 맹약을 번복할 수 없다고.”
“그럼 뭔데?”
이안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루가릭스를 응시하였다.
어차피 이안의 입장에서 루가릭스는 다 잡은 고기나 다름없었으니, 급할 이유가 딱히 없는 것이다.
잠시 심호흡을 한 루가릭스가 천천히 다시 입을 떼었다.
“맹약을 이행하기 전에,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게 하나 생겨서 말이야.”
“흠, 제안이라……. 뭐, 그 정도야 들어 볼 수 있겠지.”
일단 이안의 손에서 빛나던 소환 마력이 잦아들자 루가릭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 생각해 낸 ‘제안’이라는 것을 이안에게 어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이안, 사실 나는 너를 엄청 좋아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운을 띄우는 루가릭스를 보며 이안은 의아했지만, 일단 맞장구를 쳐 보기로 하였다.
‘무슨 개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들어나 볼까?’
이안은 항상 루가릭스의 머리꼭대기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꿍꿍이가 흥미로웠던 것이다.
이안은 고개를 순순히 끄덕이며 루가릭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알고 있지. 그러니까 그때 소환수가 되기로 약속도 했던 것 아냐?”
“그, 그렇지!”
루가릭스는 반쯤 울상이 되었지만, 나름 침착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네 소환수가 되기 전에 한 가지 선물을 주고 싶어.”
“선물?”
“그래, 선물.”
“그건 내 소환수가 되고 나서 줘도 되는 거 아니야?”
생각지 못했던 반격에 당황한 루가릭스가 살짝 말을 더듬었다.
“아, 아냐. 그렇지 않아. 너랑 계약을 하기 전에만 줄 수 있는 선물이 하나 있어서 그래.”
‘선물’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루가릭스의 말에 이안의 두 눈은 휘둥그레졌다.
‘이거, 뭔가 더 흥미진진하게 흘러가는데?’
그리고 루가릭스의 다음 말이 이어진 순간…….
“혹시 이안, 너 ‘용언 마법’이라고 들어 본 적 있어?”
띠링-!
이안의 눈앞에 생각지 못했던 메시지가 주륵 하고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숨겨진 돌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언령(言令) 마법의 비밀’ 퀘스트를 획득하셨습니다.
-퀘스트를 수행하시겠습니까?(Y/N)
-퀘스트를 거부하더라도 패널티는 받지 않습니다.
이어서 퀘스트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이안의 두 눈은 점점 더 확대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