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9화 4. 거신족의 비밀 (2) >
* * *
저벅- 저벅-.
고요한 암천궁의 장원에 한 남자의 발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것은 방금 흑룡각을 나와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이안의 발소리였다.
“분명히 이 어딘가라고 했는데…….”
지금 이안이 향하고 있는 곳은, 암천궁 안에 있는 유일한 대장간인 흑염각(黑炎閣).
이안이 흑염각에 가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대장간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이유.
‘무기’를 하나 만들기 위해서였다.
“재료들 등급이 전부 전설(초월) 등급은 넘으니까, 못해도 해당 등급 이상의 무기 하나 쯤은 얻을 수 있겠지.”
어지간한 무기가 나오더라도 용사의 마을에서 쓰던 ‘이안의 창’보다 좋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안은 기대 넘치는 걸음걸이로 대장간을 향하고 있었다.
새로운 장비를 제작하기 위해 대장간에 의뢰하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대장간에서 장비 만들다 보면 루가릭스 녀석이 오겠지? 아무리 녀석이라 해도 암천궁 궁주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을 테니 말이야.”
조금 전 암천궁주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 이안은,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둠의 초딩 드래곤을 만날 생각에 기분이 조금 더 좋아진 것이다.
“짜식. 이제 초월 60레벨은 충분히 넘었겠지? 뭐, 그대로 40레벨대라고 해도 상관은 없어. 어차피 녀석은 신화(초월) 등급일 테니 말이야.”
이안이 루가릭스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었다.
그중 첫째는, 그가 갖고 있는 ‘정보’였다.
루가릭스는 카일란 에피소드의 한 축을 담당하는 메인 NPC 출신(?)이어서 그런지, 이안이 보아왔던 어지간한 NPC보다도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녀석에게 물어본다면, 카르세우스를 비롯한 신화등급 드래곤들을 전부 초월로 각성시킬 방법을 알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둘째.
사실 이것이야말로, 이안이 루가릭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이안이 가장 오랜 기간 클리어하지 못하고 미뤄 두었던 궁극의(?)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선, 루가릭스가 꼭 필요했으니 말이다.
이안의 퀘스트 창 한쪽 구석에, 아직까지도 고이 잠들어 있는 최고 난이도의 직업 퀘스트.
이안은 ‘어둠의 신룡, 루가릭스 길들이기’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그 보상을 꼭 받아야만 했다.
-‘어둠의 신룡, 루가릭스 길들이기(히든)(돌발)’
당신은 테이밍 마스터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테이밍 마스터로서 수많은 소환수들을 길들여 왔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인간으로서 닿을 수 없는 초월적인 영역에 도전하려 한다.
그것은 바로 ‘신화적인’ 존재를 길들여 소환수로 만드는 것.
이제껏 그 어떤 소환술사도 하지 못했던 그 일을 해낸다면, 당신은 테이밍 마스터로서의 한계를 한 번 더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기회가 주어졌다.
어둠의 신룡 루가릭스를 테이밍하고, 당신의 초월적 능력을 증명하자.
퀘스트 난이도 : B
퀘스트 조건 : 350레벨 이상의 소환술사 유저.
‘테이밍 마스터’ 클래스를 가진 유저.
신화 등급의 소환수, ‘어비스 드래곤’을 보유한 유저.
‘빛의 신 에르네시스를 찾아서’ 퀘스트를 클리어한 유저.
제한 시간 : 없음
보상 : 신화 등급의 소환수, ‘루가릭스’
히든 클래스 ‘테이밍 마스터’의 티어 상승.
*공유할 수 없는 퀘스트입니다.
카일란의 모든 클래스들은 ‘티어 업’ 퀘스트를 클리어 할 때 가장 큰 스펙 상승이 이뤄진다.
절대적인 전투 능력치가 좋아지기도 하지만, 직업 능력치가 정말 큰 폭으로 상승하게 되며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고유 능력을 얻게 되기도 하니 말이다.
특히나 티어 업을 하게 되는 클래스가 이안이 가진 ‘테이밍 마스터’와 같이 특별한 클래스라면, 그 효과가 더 큰 것은 두말할 것 없는 것이다.
오랜만에 퀘스트 창을 열어 ‘루가릭스 길들이기’ 퀘스트를 확인한 이안은,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크, 이번에는 어떤 능력이 생기려나. 짐작도 되질 않는걸.’
그런데 잠시 후, 퀘스트 창을 스윽 훑던 이안의 두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어?”
‘퀘스트 난이도’ 탭에 시선이 멈춘 상태로, 동공이 크게 확대된 것이다.
‘뭐지? 이거 난이도가 왜 이렇게 바뀌었어?’
루가릭스 길들이기 퀘스트는, 이안이 받은 최초의 펜타 S등급 난이도의 퀘스트였다.
때문에 이안은 이 퀘스트의 난이도만큼은 잊어 본 적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정보 창을 확인하니 등급이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크, S도 A도 아닌 B등급이라니. 이젠 그만큼 쉬워졌다는 얘기겠지?’
한껏 기분 좋아진 이안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흑염각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런 그를 뒤에서 지켜보던 헬라임과 카이자르는 수군수군 대화를 나누었다.
“폐하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기신 것 같다, 카이자르.”
“후우, 주군 놈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 꼭 뭔가 힘든 노가다가 시작되던데……. 너무나 불길하군.”
그리고 그렇게, 10여 분 정도가 더 지났을까?
“찾았다!”
이안 일행은, 암천궁 외곽에 널따랗게 자리 잡고 있는 대장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 * *
암천에 들어온 뒤 이안이 얻은 재료 아이템은 총 일곱 종류였다.
드레이크 킹으로부터 얻은 네 가지의 재료 아이템과, 신목의 심장에서 획득한 두 자루의 목재 아이템.
마지막으로 ‘능력을 증명하라! Ⅰ’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추가 보상으로 얻은 흑청석까지.
-‘드레이크 킹의 단단한 뼈(전설)’
-‘날카로운 드레이크 킹의 이빨(전설)’
-‘드레이크 킹의 빛나는 비늘(전설)’
-‘드레이크 하트(전설)’
-‘흑청석黑淸石(전설)’
-‘바람의 신목(신화)’
-‘견고한 신목의 나뭇가지(전설)’
이안이 이 재료들을 사용해 만들고 싶은 아이템은, 한 자루의 기다란 장창이었다.
‘천비각에서 얻은 목걸이의 활용도를 극대화시키려면, 어차피 근접 무기를 들어야 해. 그리고 아이언의 등에 탄 채로 효과적인 전투를 벌이려면 근접 무기 중 가장 사정거리가 긴 장창이 가장 유리하겠고.’
해서 대장간에 들어간 이안은, 대장장이에게 망설임 없이 의뢰하였다.
깡- 깡- 깡-.
“안녕하세요, 하루크 님.”
“흐음? 이방인이로군.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솔바르 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오호, 천주님께서? 그렇다면 그대는 우리 암천의 동맹인가?”
“으음, 정확히 말하면 아직 동맹은 아닙니다. 전 아직 두 번째 시험을 치르고 있는 수험자거든요.”
“허허, 이거 재밌는 일이로군.”
흑염각의 대장장이 하루크는 하던 일을 멈추고 이안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이안은 알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수험자가 대장간에 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천주께서 직접 수험자를 대장간으로 보내시다니…….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나 보군.’
어찌되었든 수험자는 아직까지 암천의 동맹이 아니다.
때문에 모든 시험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암천궁의 시설들을 사용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안의 말에 의하면 천주인 솔바르가 직접 그를 이 대장간에 보내었다 하였고, 그렇다는 말은 수험자를 적극적으로 도와 동맹으로 만들고 싶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안을 응시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는 하루크를 향해, 이안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암천곡을 넘어오는 중에, 제법 괜찮은 재료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재료?”
“예. 드레이크 킹의 뼈와 비늘이 무기를 만들 때 무척이나 훌륭한 재료라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말을 잇던 이안은, 갑작스레 격해진(?) 하루크의 반응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 지금 드레이크 킹이라고 하였는가?”
“네, 그런데요. 무슨 문제라도…….”
“그 괴물 같은 녀석을 자네 혼자의 힘으로 처치했단 말이지?”
이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셈이죠.”
드레이크 킹은 분명히 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스 몬스터급은 분명히 아니었다.
모든 맵에서 하나둘 정도 찾아볼 수 있는 ‘에픽 몬스터’의 위용과 강력함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하루크의 입장에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알기로 갓 중천에 도착한 수험자들은 평범한 드레이크를 상대하는 것도 버거워야 정상인데, 눈앞에 있는 이놈은 드레이크 킹을 잡았다고 얘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디 한번 가져온 물건들을 보도록 하지. 정말 드레이크 킹의 뼈를 가져온 것이라면, 훌륭한 무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일세.”
하루크의 말을 들은 이안은, 망설임 없이 가져온 재료들을 꺼내어 모루에 올려 두었다.
이어서 하루크는 그것들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하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두 눈은 점점 더 확대되고 있었다.
“이것들은 분명 드레이크 킹의 것이로군.”
“그렇다니까요?”
“그런데 이것들은 그렇다 치고……. 대체 이 신목은 어디서 구한 겐가? 이런 신령한 기운을 가진 목재는 나조차도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일세.”
하루크의 물음에, 이안은 순순히 대답하였다.
NPC에게 딱히 숨길 만한 내용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비룡의 둥지 안에 있는 ‘신목의 심장’에서 채집했습니다. 창 자루로 쓰면 어떨까 해서 말이지요.”
이안의 말에, 겨우 잦아들었던 하루크의 동공이 다시 지진 난 듯 떨리기 시작하였다.
당장이라도 허세 부리지 말라며 욕지거리를 날려 주고 싶었지만, 눈앞에 너무도 확실한 증거물들이 있었다.
“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예?”
“드레이크 킹에 이어서 비룡의 군락도 공략했다고?”
“그런데요?”
“그럼 지금 암천곡에 가면, 비룡의 군락은 파괴되었겠네?”
“그렇죠. 제가 나오고 나서, 신목이 아예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허, 수십 년이 넘게 자라온 신목이 이방인에 의해 파괴되다니…….”
하루크의 중얼거림에 궁금증이 생긴 이안이, 슬쩍 물어보았다.
“그거, 한 번 부서지면 다시 안 생기는 건가요?”
하루크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였다.
“그런 건 아닐세. 신목은 한 번 파괴되고 나면, 다른 장소에서 다시 자라나기 시작하니 말이야.”
“오호.”
“하지만 그렇게 거대한 신목으로 성장할 때까지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설마 씨앗부터 시작해서 수십 년 동안 자라는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네만……. 갓 태어난 신목은 열 마리 정도의 비룡밖에 품지 못하는 ‘조금 큰’ 나무에 불과하다네. 완전한 성체가 되는 데에 한 달 정도가 필요하다고 알고 있네만, 어지간히 시간이 지나도 자네가 파괴한 그 나무만큼 커질 수는 없겠지.”
“그, 그렇군요.”
노다지를 독식했다는 생각에 한결 더 기분이 좋아진 이안은, 하루크에게 이런저런 정보들을 더 묻기 시작하였다.
아직 한 번도 상대해 보지 못한 거신족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정보를 캐낸 것이다.
그리고 몇 가지 유용한 정보들을 추가로 뽑아낸 이안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자, 어쨌든 이 재료들이라면, 창 한 자루 정도는 뚝딱 만들어 줄 수 있는 거죠, 하루크?”
하루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망설임 없이 대답하였다.
“물론일세. 하지만 그 신목은 일단 넣어 두게나.”
“음……? 왜죠?”
“드레이크의 뼈와 비늘도 충분히 훌륭한 재료이긴 하지만, 그것은 이 재료들과 섞이기에도 아까울 정도로 엄청난 물건이라네.”
“그, 그렇군요.”
“그 신목은, 나중에 그에 걸맞은 재료를 자네가 구해 온다면 다른 장비로 가공해 주도록 하지.”
“배려 감사합니다, 하루크.”
하루크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였다.
사실 이안으로서도 유일하게 ‘신화’ 등급 재료인 신목을 전설 등급 재료 사이에 섞기는 뭔가 찝찝했었으니 말이었다.
“좋아, 그럼 오랜만에 기가 막힌 녀석을 한번 만들어 볼까?”
역시나 대장장이의 피가 어디로 가지는 않는 것인지, 모루에 놓인 재료들을 보며 의욕을 활활 태우기 시작하는 하루크.
그런데 바로 그때.
끼이익-.
듣기 거북한 마찰음이 울림과 동시에 대장간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