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8화 4. 거신족의 비밀 (1) >
퀘스트 창에 쓰여 있는 대로 이안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암천궁 안쪽으로 쭉쭉 들어갔다.
마치 고대 중국의 궁전을 연상케 하는 웅장한 건물들 사이에, 넓고 길게 이어져 있는 중앙대로를 따라 움직이는 이안 일행.
사람만 지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중문(中門)들이 여럿 설치되어 있는 탓에, 이안은 소환수들을 전부 소환 해제한 뒤 가신들만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 폐하. 우리 로터스 황궁도 이런 느낌으로 리모델링하면 어떻겠습니까?”
“죄다 새카맣고 우중충하구먼 대체 뭐가 마음에 든다는 거야? 누가 어둠의 자식 아니랄까 봐…….”
“블랙처럼 고귀하고 우아한 색상이 또 어디 있다고 우중충하다고 하는가. 누가 힘만 센 바보 아니랄까 봐…….”
“둘 다 조용히 해. 정신 사나우니까.”
투닥대는 카이자르와 헬라임을 조용히 시킨 이안은 걸음을 더 재촉하여 빠르게 대로의 끝까지 이동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이안은 대로의 끝에 우뚝 솟아 있는 하나의 건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붕의 밑단을 받치고 있는 서까래와 처마의 끝이 전부 용의 머리 형상을 하고 있는 멋들어진 건물.
건물의 입구 현판에는 ‘흑룡각(黑龍閣)’이라 새겨져 있었고, 그것을 본 이안은 눈을 빛내었다.
‘저곳인가 보군. 암천의 주인이라……. 이런 곳의 주인쯤 되면, 초월 레벨 100레벨이 훌쩍 넘겠지?’
그리고 곧이어 이안이 건물의 앞에 도착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까만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띠링-!
-암천궁, 흑룡각에 입장합니다.
이어서 이안의 시선은 자연스레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온통 새카만 대리석과 흑단목으로 마감되어 있는 실내 구조와 그 위에 화려하게 깔려 있는 새빨간 빛깔의 레드카펫.
동양풍의 외관과 상반되면서도 어울리는 내부의 인테리어는, 디자인에 별 관심이 없는 이안조차도 감탄하게 만들 정도였다.
‘오, 멋지잖아?’
이안의 시선은 길게 이어진 레드카펫을 따라 자연스레 움직여 올라갔다.
그리고 그 끝에 놓여있는 거대한 태사의(太師椅)와 그 위에 앉아 있는 까만 망토의 사내에 이르러 시선이 고정될 수밖에 없었다.
직감적으로 그의 정체가 암천궁주 ‘솔바르’라는 사실을 느꼈으니 말이었다.
저벅- 저벅-.
붉은 카펫을 따라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이안.
그리고 그런 그를 고요히 내려다보는 검은 망토의 사내.
잠시 후 이안은 그의 앞에 걸음을 멈추었고, 그런 그를 향해 남자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대가 우리 암천의 동맹이 되길 청했다던, ‘이안’이라는 중간자인가 보군.”
암천궁의 분위기에 그대로 녹아드는, 묵직하고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이안입니다. 당신이 암천궁의 궁주, ‘솔바르’ 님이신지요.”
이안을 한차례 훑어본 남자, 솔바르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 내가 바로 암천의 주인 솔바르. 이렇게 뛰어난 인간 영웅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로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제가 오히려 영광이지요.”
이안의 첫 번째 퀘스트 클리어 등급이 S랭크여서 그런 것인지, 솔바르는 이안에게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
때문에 이안은, 좀 더 편하게 대화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곳까지 도달하였으니, 이제 우리의 동맹이 되기 위한 남은 절차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솔바르 님. 두 번째 시험이 남아 있다고 들었습니다.”
“잘 알고 있군. 하지만 이번 시험은, 첫 번째 시험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네.”
“어떤…… 점에서 말입니까?”
“첫 번째 시험은 누구나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시험이었다면, 두 번째 시험은 수험자에게 선택권이 있으니 말이야.”
“아…….”
“자네에게 세 가지 선택의 기회를 주겠네. 내가 제시한 세 가지 임무 중 하나를 골라 완수한다면, 그 즉시 우리 암천의 동맹 자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네.”
그런데 솔바르의 말을 들은 이안은, 문득 궁금한 점이 하나 생겼다.
“혹시, 셋 중 하나만 완수할 수 있는 겁니까?”
“후후, 모든 임무를 전부 도전해 보기라도 할 셈인가?”
“뭐, 내용을 봐야 알겠지만, 가능하다면요.”
이안의 대답에 솔바르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패기가 아주 마음에 드는군. 안 될 것은 없다 인간 용사여. 하지만 전부 선택한다면, 그중 하나라도 달성하지 못할 시 시험에서는 낙제하게 될 터.”
말을 마친 솔바르는 이안을 향해 허공에 팔을 휙 하고 저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생성된 세 장의 붉은 스크롤이 이안을 향해 펄럭이며 날아왔다.
“아마 자네라면 어떤 임무를 선택해도 완수할 것이라 기대하네만, 그래도 무리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야.”
말을 마친 솔바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안은, 솔바르로부터 받은 세 장의 스크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A. 거신족 정찰병 처치
최근 북부 균열을 넘어온 거신족 정찰병들이, 균열 주변에 서식하는 용족들을 공격하는 일들이 잦아지기 시작하였다.
정찰병들을 처치하고 그들이 목에 걸고 있는 ‘군번줄’을 챙겨 오자.
거신족들은 강력하지만, 정찰병 정도라면 상대해 볼 만할 것이다.
난이도 : A
클리어 조건 : ‘정찰병의 군번줄’ 아이템 세 개 이상 입수
추가 보상 : 용천주화 3,000냥, 공헌도 500
B. 거신족 보급창고 파괴
암천곡의 서북쪽에 위치한 북부 균열을 통한다면, 거신족들의 땅인 ‘엘라시움’으로 진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엘라시움의 초입에는 거신족들이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보급 창고’가 있는데, 이것을 파괴할 수 있다면 그들의 전쟁계획에 큰 차질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보급 창고를 파괴하고, 무사히 귀환하도록 하자.
난이도 : S
클리어 조건 : 거신족 보급 창고 파괴, 생존
추가 보상 : 용천주화 5,000냥, 공헌도 800
C. 거신족 정찰대장 처치
암천곡의 서북쪽에 위치한 북부 균열을 통한다면 거신족들의 땅인 ‘엘라시움’으로 진입할 수 있다.
이 엘라시움의 초입부터 시작해 흐르는 강을 따라 서쪽으로 조금 더 움직인다면, 거신족의 북부 전초기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전초기지란, 거신족 정찰병들의 거점이자, 전쟁을 치르기 위한 거신족들의 전진기지.
이곳의 관리자인 거신족 정찰대장을 처치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힘 싸움에서 큰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거신족 정찰대장을 처치하고 무사히 귀환하도록 하자.
난이도 : SS
클리어 조건 : 거신족 북부 지역 정찰대장 처치.
추가 보상(B) 조건 : 거신족 북부 전초기지 파괴.
추가 보상 A : 용천주화 1만 냥, 공헌도 1,500
추가 보상 B : 명성(초월) 500, 공헌도 1,500
퀘스트의 내용 하나하나는 간결한 편이었지만, 전부 읽어 내려가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전체적인 퀘스트의 내용 구성 자체가 이안이 예상했던 방향성을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뭐지? 뜬금없이 웬 거신족?’
이안이 들은 중천의 세계관은 여러 가문들이 세력 싸움을 하며 경쟁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때문에 이안은, 당연히 퀘스트의 방향성도 중천의 다른 가문과의 싸움으로 이어질 것이라 짐작하였다.
애초에 동맹을 선출한다는 것 자체를, 다른 가문과의 전쟁을 위함으로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문끼리 경쟁을 한다더니……. 그게 혹시 선의의 경쟁 같은 구도였나?’
나름대로의 추측을 해 본 이안은, 세 가지 퀘스트의 내용들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각각 A, S, SS의 난이도로 책정되어있는, 거신족과 관련된 퀘스트들.
‘북부 균열이라는 곳이 아무래도 거신족들의 땅과 통해 있는 것 같고……. 모든 퀘스트가 그 근방에서 이뤄지는 거군.’
예상치 못했던 퀘스트의 내용에 흥미로운 표정이 된 이안은, 곧이어 망설임 없이 퀘스트를 선택하였다.
“천주님, 저 모든 임무를 전부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공헌도의 가치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지만, 보상으로 주어지는 용천주화만 하더라도 모든 퀘스트를 수행할 가치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SS급 퀘스트를 선택해서 진행할 거라면, 더 난이도가 낮은 나머지 두 퀘스트를 하지 않을 이유도 없는 거지, 뭐.’
그리고 그런 이안의 선택이 마음에 들었는지, 솔바르는 흡족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패기가 부디 만용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방 완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대가 이 마지막 시험에 꼭 성공하여, 우리 암천의 동맹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안과 솔바르의 간결한 대화가 끝남과 동시에,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들이 주르륵 하고 떠올랐다.
띠링-!
-‘A. 거신족 정찰병 처치’ 퀘스트를 수령하셨습니다.
-‘B. 거신족 보급창고 파괴’ 퀘스트를 수령하셨습니다.
-‘C. 거신족 정찰대장 처치’ 퀘스트를 수령하셨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퀘스트입니다.
-퀘스트에 실패할 시, ‘소천(小天)’맵으로 강제 소환됩니다.
-퀘스트에 실패할 시, ‘승천’퀘스트부터 다시 진행해야 합니다.
-퀘스트에 실패할 시, 오십 일 동안 ‘암천’을 동맹으로
지목할 수 없습니다.
“자, 이제 떠나도록 하라, 인간 용사여. 부디 그대의 용맹이 저 야만스런 거신족들을 이겨낼 수 있길 바라노라.”
솔바르의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자신감 넘치게 걸음을 돌려 흑룡각을 나서는 이안.
그런데 흑룡각의 밖으로 나가기 직전, 뭔가 잊고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이 떠오른 이안은, 다시 고개를 돌려 솔바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 그런데 솔바르 님.”
“흐음, 무슨 일이지?”
잠시 뜸을 들인 이안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혹시……. 어둠의 드래곤 루가릭스라는 녀석을 알고 계십니까?”
* * *
딸깍- 딸깍-.
따스한 햇살과 함께 춘곤증이 밀려오는, LB사 기획실의 이른 오후.
방금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복귀한 나지찬은 자리에 앉아 의자를 쭉 뒤로 젖히고 편하게 드러누웠다.
“흐아암, 아직 점심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니, 잠깐 눈이라도 붙여 볼까?”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대자, 여지없이 밀려오는 나른함.
하지만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 보려던 나지찬의 시도는 곧바로 저지(?)당하고 말았다.
“팀장님, 팀장님!”
기획 3팀의 사무실에서 팀장은 오직 나지찬 한 명뿐이었고, 때문에 다급히 울려 퍼지는 이 목소리는 당연히 그를 부르는 것이였으니 말이다.
“하아, 또 무슨 일이야, 임 대리?”
달콤한 낮잠을 날려 버린 나지찬의 입에서, 퉁명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일은 사실,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으니 말이었다.
“혹시 점심 시간에 유캐스트 들어가 보셨어요?”
“유캐스트?”
“네, 팀장님. 방금 팀원이랑 점심식사 하면서 들은 얘긴데요.”
“음, 무슨 얘기……?”
임대리의 말이 이어질수록,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하는 나지찬.
“팀장님 BJ라오렌 아시죠?”
“당연히 알지. 유캐스트에서 그 친구 방송을 제일 많이 보는데.”
“그 BJ가 갑자기 새로운 채널을 하나 개설했대요.”
“새로운 채널?”
“네. 오늘 저녁에 무슨 새로운 콘셉트로 방송할 게 하나 있다면서…….”
“그래?”
여기까지 들은 나지찬은 일단 차오르던 불안감을 조금 덜어 낼 수 있었다.
BJ들이 새로운 채널을 파서 신규 콘셉트로 방송을 올리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지찬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콘셉트로 오픈한다는 방송의 제목이 너무 충격적이었으니 말이다.
“제목이 뭐라더라……. ‘비룡 알 백오십 개 연속 까기’였나?”
“뭐라고?”
“라오렌 같은 네임드가 낚시 글을 올릴 리는 없으니 진짜라는 말인데……. 아니, 대체 무슨 짓을 하면 비룡의 알을 1백오십 개나 구할 수 있는 거죠?”
“……!”
“비룡의 둥지라도 털었으면 모를까…….”
임대리의 말을 듣던 나지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하였다.
지금 전신을 엄습하고 있는 이 불길한 기분을 털어 내기 위해서는, 당장 이안의 플레이 로그를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으니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