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2화 3. 철갑신룡(鐵甲神龍) (3) >
* * *
‘비룡의 둥지’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던전이었다.
외부의 맵과 단절되어 밀폐된 공간들로 이루어져 있는 평범한 던전들과 달리, 그저 비룡들이 서식하는 거대한 황금빛의 고목 하나가 던전을 이루는 유일한 구조물이었으니 말이다.
던전과 외부 맵 사이의 이동이 자유로운, 특이한 형태의 던전인 것.
하지만 던전 전체가 하나의 공간으로 이뤄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외부와 연결되어 있는 던전의 외곽에서 황금빛 나뭇가지들을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오면, 가운데 나무 기둥이 솟아 있는 거대한 구 형태의 공간이 펼쳐지도록 되어 있으니 말이다.
거대한 나무줄기들로 인해, 마치 삼차원 미로와 같은 느낌을 받게 하는 복잡한 공간.
그리고 진짜 위험한 곳은 바로 이 내부 공간이었다.
위험하면 던전 밖으로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는 외곽 지역과는 달리, 이 내부 공간에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는 몇 군데 안 되었으니 말이다.
자칫 잘못해서 어그로가 쏠리기 시작하면, 퇴로를 확보하지 못한 채 수많은 비룡들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
그저 육탄전만 한다면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모든 비룡들은 ‘바람의 숨결’이라는 광역 공격 고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닫힌 공간에서 수많은 비룡들이 바람의 숨결을 쏘아 댄다면, 아무리 이안이라 하더라도 피해 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카카를 통해 이러한 사실들을 미리 파악해 둔 이안은, 비교적 난이도가 낮은 외곽지역부터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용족 ‘비룡’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를 3,711만큼 획득합니다.
-용천 주화를 401냥 만큼 획득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소환수 ‘아이언’의 고유 능력 ‘급가속’이 발동합니다.
-‘급가속’ 고유 능력이 최대 중첩 상태입니다.
-더 이상 가속할 수 없습니다.
……후략……
아이언을 얻기 전, 두세 마리씩 힘겹게 풀링(Pulling)해서 사냥하던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고 손쉽게 비룡들을 학살하고 다니는 이안.
이안의 뒤에는 까망이의 등에 올라탄 헬라임과 핀의 위에 올라탄 카이자르가 바짝 붙어 따르고 있었으며, 카르세우스를 비롯한 드래곤들과 닉이 그 뒤로 비행하고 있었다.
던전의 구조도 구조이지만 상대가 전부 비행형 몬스터들이기 때문에, 할리나 라이와 같은 지상 소환수들은 아예 소환 해제해 둔 상태였다.
그리고 그렇게 던전의 외곽을 공략하는 동안 ‘비룡의 알’이 담겨 있는 작은 둥지들도 제법 여럿 털어먹을 수 있었다.
-‘황금빛 둥지’를 발견하였습니다.
-‘비룡의 알×3’을 획득하였습니다.
“좋아, 좋아. 이런 게 진정한 꿀 아니겠어?”
반짝반짝 빛나는 비룡의 알들을 인벤토리에 쓸어 담은 이안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히죽히죽 웃었다.
앞에 나란히 앉아 있던 뿍뿍이가 힐끗거리며 핀잔을 주었지만, 그조차도 예쁘게(?) 보일 정도로 이안의 기분은 최상이었다.
“주인아, 그렇게 공짜 좋아하다가 대머리 된다뿍.”
“이게 왜 공짜야? 노동에 대한 달콤한 보상이구만.”
그리고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이는 이안의 던전 공략.
‘이제 슬슬 안쪽으로 진입해 볼까? 어차피 저기도 그냥 두고 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외곽의 비룡들을 남김없이 전멸시킨 이안은, 은백색으로 빛나는 나뭇가지들을 넘어 던전의 안쪽으로 천천히 진입을 시작하였다.
무성한 나뭇가지들을 뚫고 안쪽으로 들어오니, 던전의 구조는 새롭게 일변하였다.
얇고 무성하던 나뭇가지들이 굵직굵직해지면서 시야가 탁 트이기 시작하였고, 그 안쪽에 펼쳐진 장엄한 공간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와아…….”
카카의 수정구를 통해 볼 때와는 느낌 자체가 완전히 다른, 웅장하기 그지없는 던전의 구조.
하지만 이안의 감탄은 그리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눈앞에 떠오른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현실을 강제로 자각시켰으니 말이었다.
띠링-!
-‘신목(神木)의 심장’에 진입하셨습니다.
-둥지의 ‘비룡’들이, 침입자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합니다.
-신목의 심장에 흐르는 바람의 기운이 더욱 강력해집니다.
-모든 ‘바람’ 속성 공격의 위력이 2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바람’ 속성을 가진 모든 존재의 전투 능력이 30퍼센트만큼 상승합니다.
그리고 메시지가 떠오름과 거의 동시에…….
크릉- 크르르릉-!
크르륵!
이안의 주변으로, 수많은 비룡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 * *
비룡들은 기본적으로 ‘바람’ 속성을 가진 소환수들이다.
때문에 필드 자체에 걸린 ‘바람’ 속성에 한정된 광역 버프는, 던전의 난이도를 더욱 극악하게 만들어 버리는 요소라고 할 수 있었다.
모든 비룡들의 전투 능력이 30퍼센트나 증가하는 데다, 공격 위력이 20퍼센트나 강력해지니 말이다.
이 와중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 이안이 타고 있는 ‘아이언’도 바람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내 소환수 중 바람 속성을 가진 녀석은 아이언과 핀 그리고 할리 정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어.’
이안 일행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는, 한눈에 보아도 수십 마리가 넘는 위협적인 비룡들.
결국 이 싸움에서 이길 방법은, 이안이 생각하기에 광역 공격뿐이었다.
‘어떻게든 좁은 지역으로 몰아서, 브레스 난사로 쓸어 버려야 해.’
한데 몰아 광역으로 일망타진한다는, RPG게임에선 흔히 볼 수 있는 고전적이고 간단한 전략.
하지만 이 간단한 전략을 실행하기엔 두 가지 정도의 걸림돌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비룡들을 아무리 한자리에 몰아넣는다 해도 광역스킬의 범위 안에 다 집어넣을 수 없을 만큼 개체수가 많다는 것.
둘째, 이안이 보유한 광역 스킬들은 대부분 짧지 않은 재사용 대기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광역 스킬들을 한 타임 퍼부으면 제법 많은 비룡들을 몰살시킬 수 있겠지만, 그 이후가 문제인 것이다.
여전히 비룡들은 많이 남아 있을 것이고, 그 이후에 비룡들이 역으로 바람의 숨결을 뿜어낸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었다.
‘일단 폭풍의 숨결은 바람 속성 버프까지 받았으니, 이거 단일스킬로 먼저 최대한 많은 비룡을 잡아야겠어.’
지금 이안이 보유하고 있는 광역기들 중, 가장 강력한 것은 폭풍의 숨결이었다.
바람속성 버프까지 받은 이 시점에, 다른 드래곤들의 브래스가 폭풍의 숨결 이상의 딜을 뽑아내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때문에 전투력에 비해 맷집이 현저히 약한 비룡들이라면, 폭풍의 숨결 한 방에 다운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닐 것 같았다.
‘계수가 650에 300에 900……. 지금 급가속 패시브는 풀 스텍이니까…….’
비룡을 상대로 띄울 수 있는 최대 대미지를 계산하기 위해 분주히 회전하기 시작하는 이안의 두뇌.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정보들이 지나갔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찰나의 시간일 뿐이었다.
애초에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오래 생각할 수 있는 시간 따위는 없었지만 말이다.
“좋아, 이거면 충분히 가능하겠어.”
판단을 마친 이안의 두 눈이 반짝였다.
이어서 아이언의 안장에 이어진 고삐를 잡아당긴 이안이, 거침없이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하였다.
“한번 이 안에 있는 비룡들 싹 다 한자리에 모아 보자고!”
* * *
지금까지 유저들에게 보편적으로 알려진 중간계는 명계와 정령계 두 곳이었다.
특별히 어려운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이 두 곳의 중간계에는 입장이 가능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용사의 마을을 졸업하는 유저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용천에도 슬슬 유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껏 관련 퀘스트를 받지 못했던 유저라고 하더라도, ‘용사의 의식’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용천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용사의 마을 ‘졸업반’인 유저들에 한정되는 이야기이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이미 수백 명이 넘는 새로운 랭커들이 용천의 땅을 밟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랭커들 중에는, 이안의 이웃(?)도 한 명 존재하였다.
띠링-!
-중간계, ‘용천(龍天)’에 입장하였습니다.
-현재 위치 : 고요의 바위산 (1,880, 2,821)
-지상계에서 얻은 모든 능력치에 비례하여 초월 능력치가 설정됩니다.
-이제부터 ‘초월 레벨’이 적용됩니다.
-현재 ‘마크 올리버’님의 초월 레벨은 Lv.26입니다.
……후략……
위잉.
작은 공명음과 함께, 바위산의 정상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얀 바탕에 금빛 문양이 수놓인 멋들어진 로브에, 붉은 빛이 도는 새카맣고 커다란 지팡이를 손에 든 남자.
한눈에 보아도 값비싼 아이템들로 온몸을 도배한 남자는, 바위산의 경치가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 어딘가에 이웃님이 있다는 말이지?”
용천에서 대체 왜 이웃(?)을 찾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름 비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남자.
그의 정체는 바로 이안의 옆집 이웃인, 마법사 랭커 ‘마크 올리버’였다.
“흐, 옆집에 살아도 결국 만나려면 차원 이동까지 해야 한다니……. 역시 카일란 최고의 랭커다운 친구란 말이지.”
평범한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사를 중얼거리며, 지팡이를 들어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하는 마크 올리버.
위이잉- 파앗!
지팡이가 붉게 빛나는가 싶더니, 붉은 연기에 휩싸인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순간 이동하였다.
그는 지팡이를 한차례 휘두른 것만으로, 순식간에 5미터 정도의 거리를 순간 이동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올리버는 연달아 지팡이를 휘저었고, 그때마다 그의 신형은 계속해서 그 방향으로 공간을 격하여 이동하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잠시 후, 하얀 로브로 인해 반짝이던 마크 올리버의 신형은 순식간에 작은 점이 되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 * *
가진 모든 이동속도 버프를 중첩시킨 이안 일행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한 최대한의 속력으로 던전 안을 빠르게 누비고 다녔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공격들로 생명력이 계속해서 줄어들었지만, 이안은 반격하지 않았다.
지금 이안이 하고 있는 작업은, 말 그대로 모든 비룡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
지금 창을 휘둘러 한 마리 처치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빨리 비룡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이 훨씬 중요했으니 말이었다.
콰아아아-!
키아악!
중간중간 날아드는 바람의 숨결 공격은 제법 위협적이었지만, 엘카릭스의 보호막과 닉의 광역 무적을 활용해 어떻게든 버티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이안을 쫓아오는 비룡들의 숫자는 이제 수십을 넘어 백 단위에 이르게 되어 버렸다.
‘으……. 이거 스릴 넘치는데?’
복잡한 맵을 구불구불 지나다니는 이안의 긴장은 이미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이 상황에서 잘못 길을 잃어 막다른 골목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 게임 아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었다.
‘후우, 이제 어지간한 구역은 한 번씩 다 들른 것 같고……. 약속의 장소로 슬슬 이동해 볼까?’
이안이 말하는 약속의 장소란, 당연히 전투를 벌이기 위해 봐 두었던 최적의 지형을 말하는 것이었다.
던전의 내부는 기본적으로 복잡했으나, 남쪽 끝에서부터 북쪽으로 이어지는 기다란 통로를 하나 봐 뒀던 것이다.
그곳을 통과하여 비행하다가 통로의 끝 지점에서 자리를 잡고 브레스를 뿜기 시작한다면, 최대한 많은 비룡들을 범위 안으로 집어넣을 수 있을 것이었다.
쐐애액-!
‘급가속’ 지속 시간이 끝나기 직전 한 마리의 비룡을 처치한 이안은, 이제 던전의 남쪽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던전 내부의 모든 비룡들을 남김없이 풀링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몰아온 정도만 처치할 수 있어도 잔당(?)들을 소탕하는 정도는 어렵지 않게 가능할 테니 말이었다.
그리하여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이안은, 살짝 비행 속도를 늦추기 시작하였다.
비룡들을 일단 통로의 안쪽까지 전부 모여들게 한 뒤, 다시 단숨에 가속하여 거리를 벌리고 브레스를 뿜어낼 생각으로 말이다.
크릉- 크르릉-!
키야아오!
요리조리 도망 다니는 이안이 얄미웠는지, 연신 으르렁대며 그 뒤를 바짝 쫓는 비룡들.
그리고 그 결과, 결국 이안은 생각했던 대로 일직선상의 통로에 비룡들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자,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한차례 주변을 둘러보고 상황을 파악한 이안은 씨익 웃으며 창대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더욱 속력을 올린 이안의 소환수들은 빠르게 통로 끝을 향해 비행하였다.
따라붙는 비룡들과의 거리를 벌리기 위하여, 통로의 북쪽 끝까지 최대한의 속도로 비행한 것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척-!
갑자기 아이언의 고삐를 다시 남쪽으로 돌린 이안이 돌발 행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