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4화 1. 루가릭스의 제안 (4) >
* * *
“음? 마카론, 일어나. 인간이 천비각에서 나왔다고.”
“오, 그래?”
“이제부터 바짝 긴장해야 해. 녀석은 분명 암천곡으로 들어갈 테니 말이야.”
“알겠어, 다카론. 여차하면 녀석의 앞에 나타날 준비를 하자고.”
높다랗게 솟아 있던 천비각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며 그 자리에 한 남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남자의 정체는 당연히 이안.
그는 두 쉐도우 드래곤들의 말처럼 빠른 속도로 움직여 암천곡의 입구를 향해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두 명의 가신들도 모습을 드러내었다.
“흐음, 음험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군.”
“폐하, 강렬한 어둠의 힘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두 가신들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나도 느끼고 있어. 생각보다 위험한 곳일지도 모르겠네.”
이안은 가신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 사실 강력한 어둠의 기운이 느껴진다거나 하는 것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였다.
다만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들로 인해, 암천곡이 위험한 필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띠링-!
-최초로 ‘암천곡(暗天谷)’에 입장하였습니다.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획득하는 모든 경험치가 2배로 적용됩니다.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암천곡에서 획득 가능한 모든 종류의 아이템들이 두 배의 확률로 드롭됩니다.
-지금부터 12시간 동안, 암천곡에서 얻는 용천주화가 2배만큼 획득됩니다.
-어둠 속성을 가진 강력한 용족들이 서식하는 필드입니다./권장 입장 레벨 : Lv. 65(초월)
-모든 종류의 어둠 속성 공격의 위력이 3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필드 몬스터를 포함한 모든 개체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현재 이안의 초월 레벨은 42레벨이다.
때문에 아무리 이안이라 할지라도, 권장 입장 레벨 65레벨인 필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30레벨대에 45레벨의 드라코우를 사냥할 때보다, 더 난이도가 높다고 봐도 무방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최초 입장 보상이 떠 버린 이상, 그걸 포기하고 나갈 수는 없잖아?’
만약 지금 진행 중인 ‘능력을 증명하라!Ⅰ’ 퀘스트에 제한 시간이 존재했더라면, 이안은 최초 입장 보너스가 아깝더라도 과감히 다른 길로 우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암천궁까지 가야 하는 퀘스트에는 아무런 시간제한이 존재하지 않았고,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는 충분한 상황.
이안은 조금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정면 돌파를 해 볼 생각이었다.
‘대부분의 필드가 그렇듯, 여기도 깊숙이 들어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질 거야. 초입에서부터 천천히 경험치를 쌓으면서, 아예 레벨 업을 해서 들어가면 돼.’
초월 레벨은 어차피 계속해서 올려야 하는 것이고, 비룡이라는 녀석들도 찾아봐야 했으니 이안은 느긋한 마음으로 암천곡의 안쪽으로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3분이나 채 지났을까?
크르르릉-!
협곡의 어둠 속에서부터 흘러나온, 사나운 울음소리가 이안을 반기기 시작하였다.
* * *
협곡에 들어서자마자 이안이 가장 처음 만난 몬스터는, 무척이나 익숙한 생김새를 가진 녀석이었다.
‘오호, 블랙 드레이크? 아니, 다크 드레이크네. 뭐, 그게 그거지.’
여느 도마뱀들처럼 앞으로 쭉 튀어나온 주둥이에, 사납고 날카롭게 생긴 황금빛 눈동자.
머리 뒤편으로 돋아 있는 물갈퀴처럼 생긴 돌기에, 거대한 몸집에 비해 작게 달려 있는 날개까지.
‘다크 드레이크’의 등장에 이안은 빠르게 녀석의 정보를 서치해 보았다.
-다크 드레이크 : Lv. 56(초월)
‘처음부터 초월 56레벨이라……. 확실히 쉬운 상대는 아니겠어.’
이안은 과거 지상계에서 활약하던 시절 수많은 드레이크들을 사냥해 본 경험이 있었다.
드래곤 테이머의 고향인 크루피아 설산에 가면 광포한 드레이크들이 널려 있었으니 말이다.
‘일반적으로 드레이크들은 마법 공격에 취약하지만……. 여기 있는 놈들은 다르겠지. 용의 대지에서 그랬듯 말이야.’
용의 대지는, 이안이 처음 용천으로 통하는 길을 발견했던 ‘용의 제단’이 있던 필드였다.
그리고 그곳에 서식하던 드레이크들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드래곤들만큼이나 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 공격에 취약하다는 단점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던, 완전체에 가까운 드레이크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중천에 서식하는 드레이크들은, 그들보다도 훨씬 강력할 것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었다.
‘일단 다른 놈이 추가로 등장하기 전에, 이놈부터 빠르게 처치해 봐야겠어.’
빠르게 까망이의 등에 오른 이안은, 헬라임과 카이자르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세 구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드레이크의 주변을 에워싸며 합공에 들어갔다.
캬아아오-!
이어서 이안은, 재빨리 보주를 집어넣고 근접 무기를 장착하였다.
천비각에서 얻은 ‘파괴의 목걸이’의 성능을 최대한 활용해 볼 생각으로 말이다.
-‘정령왕의 심판’ 아이템을 착용하였습니다.
이안이 중간계에 입장한 뒤 정말 오랜만에 등장하는 아이템인 정령왕의 심판.
‘용사의 마을에서 쓰던 죽창이 그립기는 하지만,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써야지.’
정령왕의 심판은 카일란에 현존하는 무기들 중 최강의 성능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것은 지상계에서 한정된 이야기일 뿐.
성능에 많은 제약에 생기는 중간계에서는 아쉬운 대로 사용해야 하는 대체 무기일 뿐이었다.
굳이 다른 초월 무기들의 기준으로 비교해 보자면, 희귀~유일 정도의 무기들과 성능이 비슷한 정도.
‘그래도 근접 공격 증댐에 물리 속성 증댐까지 중첩되니, 보주를 사용하는 것보다는 딜이 훨씬 잘 나올 거야.’
거기에 하나 더, 이안이 기대하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눈앞에 있는 드레이크가 ‘대형’ 몬스터로 분류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파괴의 목걸이에 붙어 있는 증댐 옵션 중 가장 강력한 옵션이 바로 대형 몬스터를 대상으로 한 대미지 증가였으니 말이다.
‘할리나 까망이의 무게가 400~600킬로그램 정도이니, 훨씬 큰 저 녀석은 충분히 1톤이 넘을지도…….’
이어서 까망이의 ‘어둠의 날개’를 발동시킨 이안이, 순식간에 드레이크의 바로 앞까지 쏘아져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새 발동된 ‘약점 포착’으로 인해 붉게 표시된 드레이크의 약점에, 정령왕의 심판의 창극이 물 흐르듯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콰앙-!
-몬스터 ‘다크 드레이크’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형 몬스터를 상대로 한 공격입니다.
-50퍼센트만큼의 추가 피해가 발생합니다.
-‘다크 드레이크’의 생명력이 7,540만큼 감소하였습니다.
* * *
양쪽으로 웅장하게 솟아 있는 칠흑빛의 기둥.
두 개의 기둥에 올려 있는 까만 기와지붕과 그 앞에 매달려있는 화려한 필체의 현판.
-暗天宮
그런데 평소 같았다면 고요하기 그지없었을 암천궁의 정문 앞에서, 웬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략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새카만 흑발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루가릭스 님, 이번에는 절대로 규율을 어기시면 안 됩니다!”
“알겠어, 알겠다고, 아렌. 너까지 이렇게 잔소리를 해야겠어?”
“예, 해야겠습니다. 이번에도 인간계로 내려가시다 걸리기라도 하시면, 천주께서 저까지 암천궁에 감금시키신다고 하셨습니다.”
“하아, 아니, 천주께선 대체 왜 나만 미워하시냐?”
“왜냐면 루가릭스 님만 매번 말썽을 만드시거든요.”
“후우……. 아렌, 한 대 맞고 싶은 거지?”
“때리시면 바로 천주님께 이를 겁니다.”
“하아아, 널 보고 있으면 자꾸 누가 떠올라…….”
“누구요?”
“너 같은 애 하나 있어. 엘카릭스라고…… 내 동생.”
“누구신지는 몰라도, 이거 하나는 확실하네요.”
“음……?”
“엄청나게 훌륭하신 분일 것이라는 거요.”
“…….”
루가릭스에게 어마어마한 양의 잔소리를 쏟아붓는, 흑발의 미녀 아렌.
암천주의 직속 수하이자 관리자의 역할을 맡고 있는 그녀는, 루가릭스와도 제법 오랜 인연을 이어 온 드래곤이었다.
과거 그녀가 드래곤의 위격을 얻기 전, 드레이크였던 시절.
그녀가 인간계에서 가디언으로서 모시던 드래곤이 바로 루가릭스였으니 말이다.
“여하튼, 걱정은 그만하고 들어가서 일 봐, 아렌. 오늘은 슬슬 산책이나 하다가 일찍 복귀할 테니까 말이야.”
“예, 어차피 천주님께서 부르셔서, 이제 들어가 봐야 할 때가 됐습니다.”
“그래, 그래. 이따가 보자고.”
아렌과 작별 인사(?)를 한 루가릭스는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궁 밖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캬, 역시 바깥공기는 좋단 말이지. 칙칙한 암천궁 안에 갇혀 있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야.’
루가릭스는 혹시 누가 부르기라도 할 새라 재빨리 암천궁의 권역을 벗어나 날아오르기 시작하였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 답답한 암천궁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멀어지고 싶기 때문이었다.
‘내일부터는 다시 임무 때문에 바빠지겠지. 오늘은 하루 종일 여유를 즐겨야겠어.’
그런데 그때, 궁 안으로 들어간 줄 알았던 아렌의 목소리가 루가릭스의 귀에 한차례 더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루가릭스의 표정은 와락 구겨지고 말았다.
-따로 할 일 없으시면, 시험관들이나 좀 도와주시든가요. 아마 지금쯤 암천곡을 지나고 있을 겁니다.
* * *
각 가문의 조력자들을 뽑는 용가(龍家)의 시험관들에게는, 몇 가지 지켜야 할 규율이 있었다.
첫째, 수험자가 가문에 도달할 때까지 세 번 이상 그의 앞에 나타나서는 안 된다.
둘째, 수험자의 생명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질 때까지 그의 앞에 나타날 수 없다.
셋째, 수험자의 고행을, 물리적으로 도울 수 없다.
더 수월한 길로 인도하거나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정보를 줄 수는 있으나, 그를 도와 몬스터를 공격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넷째, 수험자를 고의로 위험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
다섯째, 수험자가 해당 가문의 현관을 직접 열 때까지 임의로 시험을 끝낼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규율 때문에, 지금 암천의 시험관인 마카론과 다카론은 침이 바짝 바짝 마르는 중이었다.
“아니, 저 인간은 대체 왜 자꾸 위험한 길로 들어서는 거야?”
“으으으, 그냥 앞으로 쭉 가면 암천궁이 나온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을 텐데 왜 자꾸 위험한 협곡을 돌아다니는 거냐고오!”
문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이안이라는 수험자의 생명력이 도무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아 그의 앞에 등장할 일 자체가 없다는 것과 그냥 협곡을 따라 쭉 나가면 암천궁에 도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엉뚱한 방향으로 이동한다는 점이었다.
“하아……. 저러다가 드레이크 킹이나 비룡군락이라도 만나면, 아무리 저 인간이라 해도 살아남기 힘들 텐데…….”
“아냐. 드레이크 킹 까지는 저 인간이 이길 수도 있다고 봐. 지켜보면, 드레이크를 한두 번 사냥해 본 솜씨가 아니야.”
“하긴. 드레이크의 공격 패턴을 거의 다 읽고 있는 것 같기는 하더라고.”
“맞아. 드레이크 킹이 아무리 강력해도, 공격에 맞아 주지 않으면 그만이겠지.”
“흐음…….”
“하지만 비룡 군락에 잘못 들어가면 그건 진짜로 답이 없을 텐데…….”
두 시험관이 본 이안이라는 수험자는 정말 대단한 인간이었다.
능력치 자체는 중천에 굴러다니는 어느 용족보다도 부족한 것이 확실한데, 놀라운 움직임과 마법 운용 능력으로 수많은 드레이크들을 학살하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보를 지켜보는 일 자체가 무척이나 긴장감 넘쳤다.
그가 아직까지 위험에 처하지 않은 것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상대하고 있는 평범한 드레이크들을 상대로도 자칫 잘못하여 실수라도 한다면 언제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그나저나 저 인간은 대체 왜 암천곡을 들쑤시고 다니는 걸까?”
“후우, 암천곡 안에서 뭘 찾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으으, 답답하네. 필요한 게 있다면 먼저 시험을 끝내고 나서 해도 늦지 않을 텐데 말이야.”
시험관의 규율 때문에, 앞에 나서서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안의 아슬아슬한 싸움을 도울 수도 없었다.
이리저리 답답한 마음으로, 멀찍이 숨어 이안의 전투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두 시험관들.
그런데 그때, 두 드래곤의 뒤쪽에서, 뜬금없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마카론. 거기서 뭐 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