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9화 6. 반가운 재회 (3) >
* * *
모든 중간계는 제각각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비단 맵의 생김새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레벨링 시스템 자체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명계에는 다섯 개의 강이 흐르고, 그 강을 한번 건널 때마다 맵의 난이도가 올라가며 콘텐츠의 등급이 올라간다.
정령계는 동서남북 사방에 스타팅 포인트가 있으며, 정령산의 중심으로 갈수록 콘텐츠의 난이도가 올라간다.
마지막으로 지금 이안이 공략 중인 용천의 경우 소천(小天)과 중천(中天), 그리고 태천(太天)으로 나뉘며, 갈수록 높은 난이도와 콘텐츠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용천만의 재밌는 시스템이 한 가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용족들 사이에 가문(家門)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중천으로 가기 전에 가문을 하나 선택해야 한다는 건가요?”
“뭐,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네. 자네가 가문을 선택한다 해서 그 가문의 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야. 굳이 따지자면, 그 가문의 용병 정도가 된다고 생각하면 되겠군.”
“그럼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그 가문 고유의 버프 효과를 받을 수 있다네. 가문이 관할하는 건물을 이용할 수 있게 되고 말이야. 가문에 쌓은 공헌도를 이용해서, 아이템 같은 것을 구입할 수도 있지.”
“그럼 버프를 부여해 준 가문이 얻는 것은 뭔데요?”
“자네가 가문의 인장을 달고 활약할 때마다 해당 가문의 명성이 증가한다네.”
“아하…….”
“가문은 일정 공헌도만 채우고 나면 페널티 없이 옮길 수 있으니, 너무 고민해서 선택할 것 없어.”
지금 이안이 있는 곳은, 소천에 솟아 있는 용오름의 꼭대기였다.
가신들의 레벨을 올려주느라 초월 40레벨이 넘어선 지금, 어렵지 않게 천룡을 처치한 뒤 중천으로 가는 길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서 지금 이안과 마주하고 있는 NPC는 소천의 ‘관리자’역할을 하는 자운곡의 곡주였다.
이안이 중간자가 되기 전에 천룡을 처치했다면, 원수(?)가 되어 만날 뻔했던 바로 그 NPC 말이다.
“아, 그리고 한 가지. 안타깝게도 우리 자운(紫雲)의 가문은 선택할 수 없으니, 미련 갖지 않는 것이 좋아.”
“네……?”
“우리 가문은 소천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중천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네.”
“아, 네에…….”
관심도 없던 내용을 친절히 설명해 주는 자운곡주를 보며, 이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흐음, 결국 가장 좋은 버프를 주는 가문을 선택해야 한다는 건데…….’
하지만 이안의 고민은 그렇게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가문의 숫자 자체가 몇 개 되지도 않았지만, 그중에 금세 끌리는 가문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암천(暗天)의 가문
중천의 북쪽, 어둠의 하늘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용족들의 세력이다.
모든 ‘어둠’ 속성을 가진 용족들은 이 암천에 속해 있으며, 암천의 인장을 얻는다면 그들이 가진 어둠의 힘을 빌려 쓸 수 있을 것이다.
*암천의 인장, 버프 효과
-암천의 인장을 지닌 유저가 적에게 모든 종류의 피해를 입힐 시 총 대미지의 5퍼센트에 달하는 어둠 속성의 마법 피해를 추가로 입힙니다.
-모든 전투 능력이 3퍼센트만큼 상승합니다.
-어둠 속에서 전투할 시, 움직임이 30퍼센트만큼 빨라집니다.
현재 이안의 눈앞에 있는 선택지는 총 다섯 개였다.
지금 이안이 정보 창을 띄워 놓은 암천의 가문을 비롯하여, 홍염과 빙해의 가문 그리고 청록의 가문과 성토의 가문까지.
하지만 사실상 버프의 우열을 가리기는 힘든 수준으로 밸런스가 잘 맞춰져 있었고, 때문에 이안이 처음 고민했던 가문은 홍염의 가문이었다.
화염 속성의 공격력을 증폭시켜 주는 버프가, 조금이나마 용암 신발과 시너지를 낼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안은 결국 암천의 가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암천의 가문’을 선택하셨습니다.
-‘암천의 인장’을 획득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인장으로 인한 버프 효과가 적용됩니다.
-암천의 가문에서 1,000의 공헌도를 달성할 시 협력 가문을 변경할 수 있습니다.
-인장의 버프 효과는 가문과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만 지속됩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 선택의 가장 큰 이유가 버프 효과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안이 암천을 선택한 이유는 중간계 중에 용천에 가장 먼저 온 이유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모든 어둠 속성을 가진 용족들이 이 암천 소속이라면 당연히 우리 루가릭스도 여기에 있겠지.’
암천의 가문에 대한 설명 중에서 루가릭스를 좀 더 쉽게 찾아내기 위한 단서를 하나 발견한 것.
“암천의 가문이라……. 괜찮은 선택일세. 중천의 북쪽에 있는 어둠의 하늘에서는, 흥미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니까 말이야.”
자신의 선택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자운곡주를 보며, 이안은 궁금한 것을 하나 물어보았다.
“곡주님,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말씀하시게.”
“중천을 넘어 태천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이곳처럼 중천에도 태천으로 오를 수 있는 용오름이 따로 있나요?”
이안의 질문에 자운곡주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태천은 어지간한 용족들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초월적인 하늘이라네.”
“……?”
“아마 자네가 태천에 오를 일은 없을 테니, 그에 대한 답은 줄 수 없군.”
그에 이안은 살짝 의아한 표정이 되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증이 일기는 하나, 당장에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처음 물어본 것도, 혹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떠본 것뿐이었으니까.
“여하튼 협력 가문까지 선택하였으니, 이제 자네를 중천으로 올려 보내 주겠네.”
“감사합니다.”
“어둠의 하늘은 위험한 곳이니 조심해야만 할 게야.”
이어서 자운곡주의 주름진 손에 자색 운무가 일렁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점점 전방으로 퍼져 나온 그 자줏빛 안개는, 붉은 빛이 일렁이는 포털을 만들어 내었다.
“자, 이 안으로 들어가시게. 무운을 빌도록 하지.”
자운곡주의 마지막 말을 들은 이안은 망설임 없이 포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안의 시야가 어둡게 변하며 눈앞에 몇 줄의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중천’에 입장하였습니다.
-한국 서버 최초로 중천에 입장하셨습니다.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모든 경험치와 획득 재화가 2배만큼 증가합니다.
* * *
암천을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어두운 하늘’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안의 시야에 나타난 새로운 맵의 환경은 암천이라는 그 말이 딱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뭐야, 이거 바닥 모양이 좀 이상한데……?”
“우리, 구름을 밟고 있는 것 같뿍.”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먹구름인 것 같습니다, 폐하.”
암천에 도착한 이안 일행은 신기한 표정이 되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장 신난 것은 뿍뿍이인 듯 보였다.
뿍-뿍- 뿌뿍-!
“뿍뿍이 너, 갑자기 왜 그렇게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거야?”
이안의 물음에, 뿍뿍이가 신이 난 목소리로 대답하며 앞발을 꾹꾹 눌렀다.
“여기, 발자국 소리가 더 예쁘게 난다뿍.”
“응……?”
뿍- 뿍-.
“마치 미트볼을 밟고 다니는 것 같은 기분 좋은 촉감 이다뿍.”
“그게 무슨…….”
뿍뿍이의 정신 상태를 이해하지 못한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더 이상 뿍뿍이에게만 신경을 쓸 수는 없었다.
그들의 주변으로, 적대적인 기운을 분명하게 풍기는 그림자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음……. 시작부터 일단 다짜고짜 싸우라는 건가?”
마치 기다란 뱀장어의 형상을 한 드라코우처럼 길쭉한 몸집을 가진 새까만 도마뱀들의 등장.
이안은 빠르게 전투 태세로 전환하여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면밀히 살펴보았고, 두 명의 가신을 비롯한 이안의 소환수들도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아직까지 이곳 중천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비록 초입이기는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탓이었다.
-쉐도우 드라쿤 : Lv. 42(초월)
그리고 이안 일행이 긴장한 채로 전투를 준비하던 그때.
멀찍이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한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 * *
중천의 북쪽 하늘, 암천.
암천의 끝자락에는 커다란 규모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고대 동양의 궁전을 연상케 하는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기와의 색상이 전부 까맣다 못해 번들거릴 정도로 시커먼 색깔을 띠고 있다는 것.
까만 기와 지붕과 은빛 기둥들로 만들어진 이 건물들의 이름은, 바로 ‘암천궁’이었다.
쐐애애액-!
암천궁의 하늘 위로 붉은 구름이 일렁인다.
그리고 그 구름을 뚫고, 자줏빛 비늘을 가진 한 마리의 아름다운 드래곤이 나타났다.
온통 무채색의 시커먼 암천에 홀로 나타난 자색 빛깔의 드래곤이라 그런 것인지, 그는 더욱 아름다운 빛깔을 뿜어내며 궁의 대문 앞에 내려앉았다.
펄럭-!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펴서 한차례 크게 날갯짓을 한 드래곤의 그림자는 순간 붉은 빛에 휘감기며 작게 변하였다.
그러자 드래곤이 있던 그 자리에는, 자줏빛 머릿결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암천궁의 문 앞에 가 한쪽 무릎을 꿇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운궁의 사자(使者)로 왔나이다.”
그리고 그녀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놀랍게도 굳건히 닫혀 있던 대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끼익- 끼이익-!
분명히 누군가 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동문처럼 스르륵 하고 열리는 암천궁의 대문.
여인은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했고, 그녀가 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닫혀 있던 문들이 기다렸다는 듯 차례대로 열리기 시작하였다.
철컹- 철컹-!
그런데 잠시 후.
그렇게 쉬지 않고 궁의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여인은, 뭔가를 발견했는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눈앞에 무언가를 향해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 루가릭스……?”
“여, 아시라스. 여기는 어쩐 일이야?”
“오호, 맞네. 정말 루가릭스잖아? 너야말로 웬일로 천궁 안에 있는 거야?”
여인 아시라스는, 밝은 표정으로 루가릭스를 향해 다가갔다.
루가릭스는 오래 전부터 그녀와 친분이 있었던 드래곤이었기에, 오랜만에 마주치자 반가웠던 것이다.
“그……렇게 됐어. 천주께서 근신 처분을 내리셨거든.”
“쯧,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사고는 무슨……. 단지 오랜만에 지상계에 내려가 보려다가 걸린 것뿐이라고.”
“너한테는 그게 사고잖아.”
“……!”
“애초에 지상계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금지령 먹었던 이유, 벌써 잊어버린 거야?”
“쳇. 안다고 알아. 그냥 해 본 소리지.”
아시라스는 원래의 목적을 잊기라도 한 것인지 루가릭스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떠들기 시작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소천에서 보내는 아시라스와 반대로 중천에만 머무는 루가릭스였기 때문에 이렇게 가끔 만나면 할 이야깃거리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아시라스, 넌 자운곡의 사자로 온 거면 천주님을 뵈러 온 거겠네?”
루가릭스의 물음에 아시라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응, 그렇지. 우리 곡주님께서 서신을 보내셔서.”
루가릭스는 더욱 궁금한 표정이 되어 다시 입을 열었다.
“최근에 소천은 평화로웠다고 들었는데……. 서신이 오갈만큼 큰 일이 소천에서 벌어진 거야?”
루가릭스의 물음에, 아시라스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였다.
“아니, 뭐 그렇게 큰 일이 벌어진 건 아니고.”
“그럼……?”
잠시 뜸을 들인 아시라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어제 정말 오랜만에, 중간자의 위격을 얻은 인간 하나가 용오름을 올랐거든.”
“그, 그래?”
“근데 그 친구가 협력 가문으로 암천을 선택했어. 그래서 천주님께 알려 드리려고 서신을 보내신 거야.”
분명히 별일 아닌, 흔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그런 일.
하지만 어쩐 일인지 루가릭스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불길한 예감을 쉽게 지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