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7화 3. 협곡의 무법자 (4) >
* * *
마군 진영의 영웅들이 타워를 철거하여 야영지까지 후퇴하던 그때.
진영의 안쪽에서 무스카를 처치한 뒤 ‘마력 보급 관리소’까지 파괴한 이안은, 그 혼란을 틈타 천군 진영으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이안을 발견한 로터스의 파티원들은 격하게 그를 맞아 주었다.
“이야, 적진에 혼자 들어가서 적장의 목을 베고 왔네. 조자룡이 울고 가겠어.”
“크으, 이안 형까지 돌아왔으니, 이제 이대로 야영지까지 밀어 버리죠!”
지금 로터스 팀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한 상황이었다.
스코어상으로 이기고 있는 것을 떠나서, 병사들의 전력과 영웅들의 스펙부터 확실하게 마군 진영을 넘어서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레벨이야 비슷한 수준이라 할 수 있었지만, 차원코인 파밍에서 차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
하지만 어쩐 일인지, 곧바로 야영지를 밀어 버리자는 동료들의 말에 이안은 동의하지 않았다.
“아니야, 지금 곧바로 야영지를 치는 건 무리가 있어.”
“무리?”
“그래. 내가 넘어오기 전에 염탐 좀 하고 왔는데, 최전방 라인 뚫는 것보다 야영지 뚫는 게 훨씬 더 어려울 거야.”
“그으……래?”
최전방에서 마군 진영의 방어 타워들은 횡으로 열 개가 쭉 늘어서 있는 구도였다.
타워들의 사정거리가 모든 공격로를 커버할 수 있는 배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야영지로 옮겨 심어진 타워들의 위치는, 생명의 샘을 기준으로 쭉 둘러선 배치였다.
즉, 새로 배치된 타워를 뚫기 위해서는 한 번에 열 개 타워 전부를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바로 뚫지는 못하더라도 어쨌든 계속 트라이하기는 해야 할 것 아냐?”
훈이의 물음에, 옆에 있던 레미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하였다.
“그러게. 훈이 말처럼 일단 병사들을 따라 내려가서 부딪쳐 보면서 작전을 구상하는 게…….”
누가 듣기에도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훈이와 레미르.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사람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더 효율적으로 승리 굳히기(?) 작업을 하고 싶었으니 말이다.
“뭐, 그 말도 틀리지는 않지만, 그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어.”
“응?”
“해야 할 일?”
“그래, 그러니까…….”
씨익 웃으며 잠시 뜸을 들인 이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따라와 봐.”
* * *
이안을 필두로 한 로터스 팀원의 여섯 영웅들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야영지였다.
하지만 그곳은 마군 진영의 야영지가 아닌, 천국 진영의 야영지.
그리고 야영지에 도착한 이안은 망설임 없이 차원 상인을 향해 움직였다.
그런 그의 뒤를 따르던 훈이가 이안을 향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형, 아이템 사러 온 거였어?”
이안은 대번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였다.
“아니. 나 돈 없는데?”
“……?”
“사러 온 게 아니고 팔러 온 거야.”
고블린 보부상을 만나 전 재산을 탈탈 털리고(?) 난 뒤, 이안은 그 허전함을 만회하기 위해, 마족 진영의 에픽 몬스터란 에픽 몬스터들은 닥치는 대로 잡고 다녔다.
물론 복귀하는 무스카를 잡아야 했기 때문에 보급로 근처에 있는 저레벨 사냥터 위주로 사냥했지만, 그래도 아이템들이 인벤토리에 제법 많이 쌓이게 된 것.
대부분이 다른 팀원에게 양도할 수 없는 계정 귀속 아이템들이었기 때문에, 이안은 망설임 없이 차원 상인에게 팔아넘기기 시작하였다.
“오호, 물건을 팔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이거 기대되는군. 나는 쓸모없는 잡템까지 매입하지는 않는다네. 내게 제값을 받고 팔고 싶다면, 쓸 만한 물건이어야만 할 거야.”
“물론입니다.”
본인은 수많은 종류의 잡템들을 팔면서, 이안에게 까다롭게 구는 차원 상인.
이안은 속으로 어처구니없었지만,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안이 팔려고 하는 아이템들은 어쨌든 에픽 몬스터들이 드롭한 물건들.
차원 상인이 거부할 만한 물건은 없을 게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안의 예상대로 물건을 하나 팔아넘길 때마다 차원 상인의 표정이 시시각각 일변하였다.
“오옷, 이것은 황금 부리 독수리의……?”
-‘황금 부리 독수리의 깃털 신발’ 아이템을 판매하였습니다.
-4,575차원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아니, 이것은……. 설마 핏빛 오크 전사의 검?”
“후후, 잘 알아보시는군요.”
“조금 손상되기는 하였지만, 이 정도면 확실히 상등품이로군!”
-‘핏빛 오크 전사의 양날검’ 아이템을 판매하였습니다.
-5,598차원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적게는 500차원코인부터 시작하여, 많게는 7~8천 차원코인까지.
끝없이 인벤토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이템들을 보며, 옆에 있던 레미르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아니,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마족 진영 저렙 존에 있던 에픽 몬스터들, 싹 쓸어 먹고 왔거든.”
“아니, 에픽 몬스터를 어떻게 쓸어 먹어?”
“음?”
“그렇잖아. 우리 다섯 명이 지금까지 본 에픽 몬스터가 겨우 둘이거든. 근데 대충 봐도 넌 열 마리도 넘게 잡은 것 같으니까 하는 말이지.”
“열 마린 아니고, 대충 스무 마리 정도?”
“후우, 그러니까 대체 무슨 재주를 부린 건지 묻고 있는 거잖아.”
히죽히죽 웃는 이안을 보며 이해를 포기한 것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레미르.
하지만 주변인들의 반응과는 별개로 아이템들을 전부 팔아넘긴 이안은 또다시 어디론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번엔 또 어디 가는데?”
헤르스의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이안.
“벌었으니까 이제 써야지.”
망설임 없이 군수물자 관리소를 향해 움직인 이안은, 또다시 전 재산을 탈탈 털어 넣기 시작하였다.
-천군 진영 ‘차원 병사(보병)’의 공격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였습니다.
-7,000차원코인을 소모하였습니다.
-천군 진영 ‘차원 병사(보병)’의 공격력이 +7단계가 되었습니다.
-천군 진영 ‘차원 병사(보병)’의 방어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였습니다.
-6,000차원 코인을 소모하였습니다.
-천군 진영 ‘차원 병사(보병)’의 방어력이 +6단계가 되었습니다.
……중략……
-연구에 10만 코인 이상을 소모하여, 군수물자 관리소의 연구 능력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군수물자 관리소의 티어가 2티어로 상승하였습니다.
-새로운 병과 ‘차원 병사(마법병)’이 오픈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차원 병사(마법병)’이 추가로 생산됩니다.
들고 있던 5~6만 정도의 코인을 아낌없이 군수물자 관리소에 쏟아부은 이안.
옆에서 새로 생긴 병과인 ‘마법병’의 스펙 정보를 확인한 유신이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이안 형, 이러면 우리 가만히 있어도 이기는 거 아냐? 이정도면 병사들이 알아서 다 때려부술 것 같은데.”
그에 이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였다.
“놉. 아마 한동안 낑낑 대기는 하겠지만, 그게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을 거야.”
“그래?”
“응. 이제 진영이 뒤로 이동됐으니 마족 영웅들도 코인 파밍이 가능해졌거든.”
“아, 그럼 그쪽 병사들도 업그레이드될 거다……?”
“맞아. 그리고 아직까지 정체를 모르는 그 빨간 오우거들도, 아마 위 단계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겠지.”
“하긴……. 그렇게 따지면 진짜 형 말대로 금방 병력이 살아나겠어.”
“그리고 아마 머리가 있는 놈들이라면, 야영지에 있는 타워까지 몬스터를 몰아와서 빠른 속도로 파밍을 시도할 거야. 우리랑 벌어진 격차를 최대한 빨리 줄이려면, 그 방법밖엔 없거든.”
“오호,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가능하네?”
과연 이 영웅의 협곡에 처음 들어온 유저가 맞는 것인지, 마족 진영의 선택지들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이안.
이안의 뒤쪽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비아가 조용한 목소리로 이안을 향해 물었다.
“그럼 이안 님.”
“말씀하세요.”
“우리가 벌려 놓은 그 격차를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서 생각해 놓은 전략이 있으신 거죠?”
레비아의 물음에, 일행의 시선은 자연히 이안의 입을 향해 모여들었다.
이 협곡에서의 승패를 떠나 그가 생각해 둔 전략이 어떤 것인지 너무도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안의 입에서 처음 나온 이야기는, 모두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아뇨. 따라잡히지 않기 위한 전략 같은 건 없습니다.”
“……!”
“그럼……?”
당황한 팀원들을 향해, 이안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신 그 차이를 더 벌려서 따라올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들 전략은 가지고 있죠.”
“허얼.”
이안의 말장난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되어 헛웃음을 짓는 일행들.
그리고 야영지에서 해야 할 일을 전부 마무리한 이안은 또다시 앞장서서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하였다.
‘자, 이제 슬슬 화산지대를 공략하러 가 볼까?’
이안의 목적지는 협곡의 북쪽 끝.
설산과 용암이 공존하는, 용사의 협곡 화산지대였다.
* * *
용사의 협곡 맵의 큰 틀은 다이아몬드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서쪽 끝 모서리에 있는 천군 진영 ‘차원의 홀’과 동쪽 끝 모서리에 있는 마군 진영 ‘차원의 홀’을 기준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 다이아몬드를 세로로 가르는 맵의 유일한 평원지대가 바로 지금까지 마군과 천군 진영이 엎치락뒤치락 하던 최전방의 전장.
이제는 마군 진영의 깃발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이 평원지대에 어쩐 일인지 이안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안 일행은, 평원을 따라 점점 더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형 말은, 이 평원을 따라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면 화산지대가 나온다는 말이지?”
“그렇다니까.”
“그냥 야영지에서 북으로 이동하면 안 되는 거였나요? 이렇게 오면 너무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인데…….”
“그쪽은 가다 보면 결계로 막혀 있거든요.”
“아하……?”
“제가 마족 진영 통해서 북쪽으로 한번 올라가 보려 했었는데, 이동 불가능하게 아예 막혀 있었어요. 아마 천군 진영 쪽도 마찬가지겠죠?”
이안이 이 용암지대를 처음 발견한 것은 사실 우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족 진영을 정찰하며 지형을 익히던 도중 북쪽 지형을 탐색하다가 발견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안이 북쪽지대를 탐색한 이유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퇴로를 확보하고 싶었기 때문.
마족 진영의 타워들이 늘어서 있는 중앙 라인을 피해 북쪽 끝으로 올라간다면, 진영을 넘나들 수 있는 새로운 통로가 있지 않을까 해서 가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은 결계로 막혀 있었고, 결계 너머로는 시뻘건 용암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산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본 레드 드레이크는, 분명히 영웅 등급이었지.’
이안이 만약 결계 너머로 드레이크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용암지대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냥 이동할 수 없게 맵을 막아놓기 위해서, 용암지대를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안에 영웅등급의 몬스터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얘기는 달라졌다.
‘진영에서 직접적으로 이동할 수 없게 막아 놓은 걸 보면, 분명 대단한 컨텐츠가 그곳에 있을 거야.’
마족진영에서 이동할 수 없게 막혀있다는 말은, 당연히 천군진영에서도 이동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는 말.
그리고 양쪽이 그렇게 막혀있다면, 그곳으로 이동할 방법은 중앙 평원을 통하는 길 뿐이었다.
‘어쩌면 중앙 최전방의 힘 싸움에서 승리한 진영만이, 북쪽 지대로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해 놓은 것일지도.’
기획자의 입장에서 머리를 굴려 본 이안은 화산 지대 콘텐츠의 기획 의도를 예상해 볼 수 있었고, 이로써 자신의 짐작을 거의 확신했다.
‘다음 주에 있을 두 번째 순위 결정전을 위해서라도 기회가 왔을 때 화산 지대를 싹 다 털어 봐야 해.’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던 이안은 왼쪽 손목에 끼워져 있는 황금빛 팔찌를 슬쩍 응시했다.
‘MVM탐지기’라는, 팔찌로서는 조금 특이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녀석.
이 녀석과 함께 화산 지대의 에픽 몬스터들을 싹 다 털어먹는 상상을 떠올리자, 이안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흡족한 미소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