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6화 3. 협곡의 무법자 (3) >
* * *
게임, 혹은 스포츠에서도 많이 쓰이는 단어인 MVP.
지금 이안이 착용한 팔찌인 ‘MVM 탐지기’ 팔찌에서의 영문 세 글자는, 이 MVP와 무척이나 흡사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Most Valuable Player’가 경기 내 가장 가치 있는 플레이를 보여 준 선수를 뜻하는 것이라면, ‘Most Valuable Monster’는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닌 몬스터를 뜻하는 것.
때문에 이안이 착용한 이 팔찌는, 곳곳에 숨어 있는 고 부가가치의 몬스터들을 찾아낼 수 있게 해 주는 탐지기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었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MVM 탐지기’ 아이템이 발동합니다!
-유일 등급의 에픽 몬스터 ‘코발트 울프 (Lv.5)’를 발견하였습니다.
-‘코발트 울프’ 몬스터를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간결하게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이, 시선을 자연스레 옮겨 미니 맵으로 향했다.
그러자 미니 맵의 한쪽 구석에, 은백색으로 빠르게 점멸하는 표식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는 일사천리라 할 수 있었다.
타탓-!
순식간에 미니 맵에 표시된 방향으로 내달리며 화염시를 소환한 이안이, 숨어 있던 에픽 몬스터의 머리통을 향해 연달아 화살을 쏘아 내었으니 말이다.
5레벨밖에 되지 않는 푸른 빛깔의 늑대는 이안의 화살에 영문도 모른 채 사망할 수밖에 없었고, 이어서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에픽 몬스터 ‘코발트 울프’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5레벨 이상 차이 나는 몬스터를 처치하였으므로, 경험치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용맹의 이빨 장식(희귀)’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영웅의 협곡 곳곳에 흩어져 있는 희귀한 에픽 몬스터들은, 무척이나 높은 확률로 아이템을 드롭한다.
찾기가 힘든 것이지 일단 찾아서 처치하기만 하면, 부가가치가 높은 아이템을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방금 이안이 획득한 ‘용맹의 이빨 장식’과 같은 희귀 등급의 장신구도, 상점 가치로 따지자면 3천 차원코인은 될 만한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골렘 사냥만 해도 순식간에 몇천 코인을 벌어들일 수 있는 이안에게, 3천 코인 정도는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금 이안이 처치한 에픽 몬스터는 고작 5레벨의 가장 허약한 축에 속하는 녀석일 뿐.
이안이 솔로 플레이로 잡을 수 있는 최대 레벨의 에픽 몬스터를 잡는다면, 몇만 단위의 가치를 지닌 아이템도 획득할 수 있으리라.
“이빨 장식 이거……. 나름 올 스텟 5퍼센트나 올려 주네. 일단 착용해서 써야겠다.”
그렇다면 이안은, 더 좋은 사냥터들을 놔두고 왜 지금 이렇게 저 레벨 사냥터에 와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안은 지금 이 근방에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으니 말이었다.
‘목적만 달성하고 나면, 북쪽 화산지대를 털러 가야겠어. 20레벨 이상 에픽 하나 잡으면, 유일이나 영웅 등급 이상의 고오급 아이템을 먹을 수 있겠지.’
속으로 중얼거린 이안은 수풀을 헤치며 천천히 어디론가 향해 움직였다.
그러자 잠시 후, 이안의 시야에 익숙한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 * *
-마력 보급 관리소(C)
붉고 굵은 글씨로, ‘마력 보급 관리소(C)’라는 이름이 떠올라 있는 커다란 건설물.
외형과 명칭은 무척이나 익숙했지만, 사실 이것은 이안이 처음 만나는 건물이었다.
이것은 천군 진영의 관리소가 아닌 마군 진영의 관리소 건물이었으니 말이다.
또다시 마군 진영의 핵심 건물을 파괴하러 나타난 이안.
그의 행보가 이어질 때마다, YTBC의 중계석에서는 흥분된 목소리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 이안이 왜 저레벨 사냥터에 있었나 했더니, 관리소가 목표였군요!”
“그렇습니다. 심지어 이 라인은, 모든 보급 라인 중에 가장 중요한 C 라인이에요.”
“어째서 C 라인이 가장 중요한 건가요, 하인스 님?”
“그야 야영지를 넘어 차원의 홀까지 최단 거리로 이어져 있는 보급로가 바로 이 C 보급로이기 때문이죠.”
“그렇군요!”
“관리소가 부서지면 C 보급로에 있는 모든 타워들의 성능이 디버프를 먹을 겁니다. 그리고 이곳을 통해 이동하는 차원병사들의 유입 속도도 무척이나 느려지겠지요.”
“이제야 파괴된 군수물자 관리소를 다시 건설하는 마족 진영 입장에서는 정말 미칠 노릇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지금 마군 진영은 이안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놀아나고 있어요!”
그리고 해설을 주도하고 있는 하인스의 경우 이미 목소리가 제법 쉬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이 순위 결정전이 시작된 지 3시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목소리가 쉬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크, 재밌어……! 역시 이안이 나와야 방송이 살아난단 말이지!’
신이 난 하인스는 이안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기 위해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이안은 관리소 건물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토르의 레벨이 이제 20레벨이 다 되었으니, 아까보다 더 쉽게 건물을 터뜨리겠죠, 하인스 님?”
“하하, 당연합니다. 정확히는 몰라도, 이제 슬슬 1만 단위 대미지가 뜨지 않을까요?.”
그런데 다음 순간.
관리소 건물의 바로 근처까지 도착한 이안은, 돌연 그 자리에 멈춰 근처의 풀숲으로 숨어들었다.
이어서 아이템을 정비하는 것인지, 쥐죽은 듯 그 안에 잠복하여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에 하인스와 루시아는 의아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 그런데 하인스 님, 이안은 왜 저기서 움직이질 않는 걸까요?”
“그, 글쎄요. 건물을 공격하기 전에 정비라도 하려는 것일까요?”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당황하여, 빠르게 화면을 스캔하는 하인스.
최대한 빠르게 이안의 플레이에 대한 이유를 찾아내어 해설해야 하기 때문에, 하인스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하였다.
‘뭘까? 딱히 정비가 필요한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이안은 왜 숨어서 움직이지 않는 거지?’
하인스는 방송 화면에 보이지 않는 다른 옵저버들의 화면을 빠르게 확인하기 시작하였다.
방송 화면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다각도로 상황을 분석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 어어……!”
뭔가를 발견한 하인스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바로 이거였어요, 루시아 님!”
“네? 하인스 님, 뭔가를 찾으신 건가요?”
루시아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인 하인스는, 방송 화면을 다른 각도로 전환시켰다.
그러자 루시아를 비롯한 모든 시청자들의 눈앞에, 너무도 또렷한 하나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탄탄한 체구에 거대한 대검을 든, 붉은 피부를 가진 용맹한 마족 진영의 전사.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 실루엣을 발견한 시청자 채팅 창이, 광란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ㅋㅋㅋ미친……! 형이 왜 거기서 나와?
-캬, 타이밍 보소. 건물 부수려다 말고 왜 잠복하나 했더니, 무스카 기다리고 있었던 거네.
-크으, 이안은 그럼, 마족 영웅 부활 타이밍까지 재면서 움직이고 있었던 건가?
-ㅇㅇ 그런 듯. 사망한 마족 영웅 복귀 타이밍 노려서 길목에 대기하고 있다가, 기습해서 한 번 더 따 버리려는 거지.
-아니, 에픽 몬스터 찾는다고 뛰어다니면서 칼같이 부활 타이밍 재는 게 가능한 부분임?
부활 대기 시간이 돌아오자마자, 전장까지 가장 빠르게 이어 주는 ‘C’ 보급로를 향해 뛰어온 무스카.
그리고 그것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정확한 타이밍에 보급로에 숨어들어 대기하고 있던 이안의 만남.
이것만큼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끌어올릴 만한 상황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채팅 창의 열기는 더욱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와……. 설계 오졌다. 부활 대기 20~30분 기다리는 것도 지루했을 텐데, 나오자마자 바로 죽으면……. 진짜 멘탈 터질 것 같은데.
-잠깐, 친구들, 여기서 무스카가 이안을 역관광하고 복귀할 확률은?
-ㅋㅋ지금 그걸 말이라고 함? 이제 레벨도 이안이 더 높고 아이템은 말할 것도 없는데…….
-응, 너 여친 생길 확률이랑 비슷할 듯.
하인스와 루시아, 그리고 수많은 시청자들까지 이어질 전투를 숨죽여 기다리는 일촉즉발의 상황!
그리고 다음 순간.
시청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영웅의 협곡에 월드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퍼펙트 킬!
-천군 진영의 영웅 ‘이안’이 마군 진영의 영웅 ‘무스카’를 처치하였습니다!
-영웅 ‘이안’이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주며 킬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킬 포인트로 인한 모든 보상이 2배로 적용됩니다!
-킬 포인트를 올린 영웅 ‘이안’에게 4,950차원코인이 지급됩니다.
-천군 진영이 킬 포인트를 2포인트만큼 획득합니다.
그리고 화면에 모습을 드러낸 이안은, 또다시 싸늘한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무스카를 향해 씨익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 번째 만남을 기대하라고, 친구.”
누워 있는 무스카로서는, 어째서 다음이 세 번째 만남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었다.
* * *
원래도 힘겹게 버티던 마족 영웅들은, 무스카가 또다시 처치당했다는 메시지를 보자마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가 다시 전장에 합류하기를 기다리며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는데, 희망이 뿌리부터 송두리째 뽑혀 나간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장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마족 영웅들이 유저였다면 그대로 항복 선언을 해 버렸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들은 유저가 아닌 NPC.
그들이 패배를 선언하는 경우는, 오로지 본진에 있는 ‘차원의 홀’이 파괴되었을 때뿐일 것이었다.
“최전방 버리고 후퇴해!”
“여기서 계속 버티다간, 앞으로 파밍도 못하고 이안이라는 놈에게 계속 농락당할 거라고!”
“빨리 타워부터 역소환시켜!”
마족 진영의 영웅들은, 재빨리 최전방을 버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후퇴하기 전에, 전방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던 타워들을 빠르게 소환 해제하였다.
우우웅-!
-마군 진영의 C-1타워가 소환 해제되었습니다.
-마군 진영의 B-1타워가 소환 해제되었습니다.
-마군 진영의…….
영웅의 협곡에서 타워가 지어질 수 있는 위치는 정해져 있다.
그리고 타워를 소환해제 한다면, 3분이라는 재소환 대기 시간이 지난 후에 정해진 위치 중 어디에든 다시 소환하는 것이 가능하다.
때문에 마군 진영의 NPC들은, 최전방 라인이 무너지기 전에 황급히 타워부터 철거한 것이다.
“생명의 샘 주변으로 타워 전부 옮겨 박아!”
“이제부터는 코인 모아서 전부 타워 업그레이드에 집어넣고!”
“서둘러! 녀석들이 밀려들어오기 전에 야영지에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마족 영웅들은 서로에게 오더를 내리며,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후방으로 후퇴하였다.
기세가 오른 천군 진영이 곧바로 야영지까지 밀려들어올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다급히 이동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
“뭐지? 이놈들 다 어디 간 거야?”
모든 정비를 마치고 방어 태세를 구축한 마군 진영의 영웅들은, 황당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야영지를 부수기 위해 곧바로 밀려들 것이라 생각했던 천군 진영의 영웅들이, 사방을 둘러봐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긴장을 늦추지 마! 시간차 공격일 수도 있으니까!”
또다시 예측을 벗어난 천군 진영 영웅들의 움직임에, 마족 영웅들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