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3화 2. 위기와 기회 (3) >
* * *
“어라, 이안이 갑자기 사냥을 멈추고 멈춰 섰습니다. 이게 무슨 일일까요?”
이안의 활약상 덕에 신이 나서 방송을 하던 BJ 페이온은, 갑자기 사냥을 멈추고 측방으로 빠지는 이안을 보며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골렘들을 학살하다시피하며 파죽지세로 던전을 뚫고 지나가던 이안이, 갑자기 통로의 한쪽 구석으로 이동하여 몸을 숨겼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엘카릭스의 마법을 이용해, 숨은 지역에 결계까지 생성시킨 것.
-엘, ‘일루전 하이딩’ 부탁해.
-알겠어요, 아빠.
일루젼 하이딩은, 특정 반경 내에 결계를 생성하여 해당 공간을 왜곡하는 마법이다.
위험한 지역을 탐험할 때 주로 사용되는 마법사 클래스의 보조 마법으로, 지속 시간 동안 공간 안의 파티원들을 숨겨 주는 것.
물론 시각적인 왜곡만이 가능할 뿐 물리적으로 어떤 충격이 가해진다면 바로 깨어지는 결계이기는 했으나, 종종 유용하게 쓰이는 마법이었다.
그리고 이안이 지금 이 마법을 발동시켰다는 것은…….
“이안이 갑자기 숨었습니다! 뭘 발견하기라도 한 것일까요?”
시청자의 입장에선 강력한 적이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뭐지? 던전 보스라도 나타난 건가?
-음, 보스가 나타난 거면 저렇게 숨으면 안 되지 않음? 지금 여기 들어온 게 던전 클리어하려고 들어온 것 같은데…….
-흠, 그것도 그러네. 대체 뭐지?
지금껏 승승장구하며 몬스터들을 쓸고 다녔던 이안이었기에, 더욱 증폭되기 시작하는 시청자들의 궁금증.
그리고 다음 순간, 통로 반대편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나타나자, 채팅 창은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어, 대박! 저거 마족 영웅인 것 같은데……?
-크으, 나 저거 알아.
-응? 뭘 알아?
-저기 갑옷에 새겨져 있는 황금빛 휘장 보이지?
-ㅇㅇ.
-저게 AI 진영 대장 표식이라고 하더라고.
-헐, 아까 체이서 길드 랭커 둘을 혼자서 박살 낸 그 근육몬?
-맞아 그 영웅이랑 같은 녀석은 아니지만, 똑같이 대장 격인 영웅이니 비슷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겠지.
그리고 나타난 그림자의 정체가 완전히 드러나자, 이안의 안티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유럽 서버의 도전 팀들이 폭삭 망한 뒤로 잠잠해졌던 그들이, 다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이안도 매운 맛 좀 보겠구나.
-지금까지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서 사냥만 했으니,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거지, 로터스도 체이서나 파블로프처럼 초반에 공격적으로 운용했으면 이미 영혼까지 탈탈 털렸을 듯.
-맞음. 로터스가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건, 파밍이랑 타워 허깅으로 구차하게 시간이나 끌고 있기 때문이지.
-어휴, 이것들은 유럽 팀들 박살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버로우 안 했네.
하지만 점점 더 마족 영웅과 이안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쉼 없이 올라오던 채팅 창은 조용해지기 시작하였다.
당장 두 영웅의 전투가 시작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으며, 방송을 시청 중인 모든 카일란 팬들은 그 전투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잠시 후.
-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뭐야? 정말 이렇게 끝?
둘의 전투를 기다리던 시청자들의 채팅 창에는 어이없다는 듯한 채팅들이 연달아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 * *
적 영웅을 먼저 알아챈 이안에게, 선택지는 사실 두 가지 정도가 있었다.
기습하여 녀석을 처치하고 킬 포인트를 따내는 것과 숨어서 녀석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런데 이안이 선택한 선택지는 후자였고, 그것은 결코 마족 영웅을 처치할 자신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이안이 마족 영웅 ‘무스카’를 보내 준 데에는,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니 말이다.
‘후후, 그래, 잘 가라, 친구. 먹음직스럽긴 하지만, 한 번 보내 준다.’
일루전 하이딩으로 인해 왜곡된 지하 통로 측면의 석벽.
그 안에 숨어든 이안과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앞을 유유히 지나가는 무스카.
이안이 그와의 전투를 피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녀석과 싸우는 순간 지하 통로에 있는 자신의 존재가 드러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른 마족 영웅들이 후방 기지를 지키기 위해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이안이라 하더라도 마족 영웅들이 본진을 지키기 위해 몰려오면,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히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고 말이다.
‘저 녀석을 기습해서 킬 포인트를 올린다면, 충분히 많은 보상을 얻을 수 있겠지만, 적진 한복판을 초토화시키는 게 훨씬 더 매력적인 선택지니까.’
더해서 이안은, 무스카를 살려 둘 생각도 아니었다.
그가 이 지하 통로에 들어왔다는 걸 확인한 순간, 이미 녀석의 꿍꿍이는 알아채었으니 말이었다.
‘분명히 우리 진영의 군수물자 보급소를 노리는 거겠지. 우리가 거기에 돈을 쏟아부었다는 걸 알아챘을 테니 말이야.’
녀석은 이안의 존재를 모르지만, 이안은 녀석이 뭘 하려는지까지도 짐작하고 있는 상황.
이 상황에서 이안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이안 : 유신, 훈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유신 : 음? 뭐라도 찾은 거야?
-훈이 : 오, 이안 형, 통로 끝까지 뚫었어?
-이안 : 그런 건 아닌데, 한 가지 정보를 입수했어.
-유신 : 그게 뭔데?
-이안 : 지금 마족 진영 대장 영웅이 이 통로를 통해서 우리 진영 쪽으로 움직이고 있어.
-훈이 : 뭐?
-이안 : 아마 통로 안에 몬스터들이 다시 젠 되서 금방 도착하진 못하겠지만, 앞으로 20분 안에는 녀석이 우리 군수물자 관리소에 도착할 거야.
-유신 : 부수려고 하겠군.
-이안 : 바로 그거지.
대인전에 가장 강력한 멤버인 유신과 그를 서포팅해 줄 훈이가 함께 대기한다면, 아무리 마족 진영의 대장 격 영웅이라 하더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터.
이안이 생각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후후, 킬 포인트를 굳이 내가 올릴 이윤 없잖아? 돈도 많은데.’
특히 계속해서 전방에만 있어 거지(?)에 가까운 유신이 킬 포인트를 올리고 차원코인을 가져간다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 될 터.
그동안 보급소 건물 한두 개만 터뜨릴 수 있다면, 전세는 완벽히 기울어질 것이었다.
“자, 이제 충분히 멀어진 것 같으니 슬슬 이동해 볼까?”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이안은 결계를 해제하고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정황상 통로의 출구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터.
하여 이안은, 길을 막는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것도 최소화하며 최대한 빨리 던전의 끝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그 결과.
띠링-!
-‘미로의 숲’ 마군 진영 방면 출구를 발견하셨습니다.
-출구를 통과하면 마군 진영에 들어서게 됩니다.
-위험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바깥으로 나가시겠습니까?(Y/N)
통로에 들어선지 거의 1시간 만에, 이안은 기다렸던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 * *
이안은 긴장했다.
적의 허점을 찌를 수 있는 최상의 기회가 온 것은 맞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곳은 마족 진영의 한복판이기 때문이었다.
해서 이안은,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가는 대신, 변수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꼼꼼히 정보들을 확인하기 시작하였다.
-이안 : 레비아 님, 지금 전장에 마족 영웅 몇 있는 거죠?
-레비아 : 네 명, 아니, 다섯이오. 아까 헤르스님이 처치했던 녀석이 방금 복귀했네요.
-이안 : 오케이, 알겠습니다.
혹시나 마군 진영의 영웅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챌 수도 있다 생각하여, 마지막까지 녀석들의 소재를 파악한 뒤.
‘흐음, 우선 군수물자 관리소를 터뜨리고, 바로 야영지에 있는 차원 상점부터 부숴야겠어.’
미니맵을 열어 이동할 동선을 미리 짠 것이다.
당연히 이안의 미니맵에 마족진영의 구조가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전체적으로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는 협곡의 특성을 활용하여, 마군 진영 건물들의 위치를 짐작한 것이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도 꼼꼼히 재생시켜 보았다.
‘마족 영웅 중에도 마법사 클래스가 있으니, 침입자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순간 곧바로 텔레포트로 날아오겠지. 녀석들이 내 존재를 파악하는 건, 첫 번째 건물이 부서졌을 직후가 되겠고 말이야.’
진영에 적이 잠입한다고 해서, 영웅들이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미니 맵 상에 적들의 위치는, 전혀 표시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건물이 부서진다면, 그 순간 영웅들 전원에게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게 된다.
조금 전 천군 진영의 타워 하나가 파괴되었을 때처럼 말이다.
‘좋아, 그럼 이제 슬슬 움직여 볼까?’
끼이익-!
마계 진영의 통로를 과감히 오픈한 이안은, 재빨리 소환수들을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어서 바로 옆에 지어져 있는 커다란 건축물이 눈에 들어오자, 이안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역시나 천군진영과 마찬가지로, 통로의 바로 옆에 군수물자 관리소가 있었으니 말이다.
이안은 망설임 없이 토르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토르!”
그륵- 그르륵?
“철거작업 시작해!”
그르륵!
이안의 명령에 기분이 좋은 것인지, 커다란 턱을 딱딱거리며 망치를 높게 치켜드는 토르.
‘파괴의 해골기사’라는 본래의 이름답게, 토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뭔가를 부수는 일이었다.
쿵-!
-소환수 ‘토르’가 고유 능력 ‘파괴의 망치질’을 발동합니다.
-마군 진영의 건축물 ‘군수물자 관리소’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군수물자 관리소’의 내구도가 6,199만큼 감소합니다!
-‘무생물’속성을 가진 대상을 공격하였으므로, 추가 피해가 발동합니다.
-‘군수물자 관리소’의 내구도가 19,001만큼 감소합니다.
쾅-!
-‘무생물’속성을 가진 대상을 공격하였으므로, 추가 피해가 발동합니다.
-‘군수물자 관리소’의 내구도가 18,919만큼 감소합니다.
-‘군수물자 관리소’의 내구도가 19,026만큼 감소합니다.
……후략……
마치 해변에 지어 놓은 모래성처럼 토르의 망치질이 이어질 때마다 힘없이 부서져 나가는 군수물자 관리소.
그 사이 이안은 마군 진영의 야영지를 찾기 위해 까망이를 타고 정찰을 시작하였고, 금방 다음 타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좋아. 이 속도라면 마군 녀석들의 지원이 오기 전까지 건물 세 개 정돈 박살 낼 수 있겠어.’
이안은 마군 진영 NPC들의 눈을 피해, 몰래 야영지 안쪽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메시지가 떠오른 순간.
-마군 진영의 ‘군수물자 관리소’를 성공적으로 파괴하셨습니다!
-경험치를 5,270만큼 획득합니다.
-천군 진영의 영웅들에게, 각각 1,500차원코인이 지급됩니다.
-건축물 파괴를 성공한 유저 ‘이안’에게 추가로 500차원코인이 지급됩니다.
“공간 왜곡!”
야영지의 차원 상점 바로 뒤편에 숨어 있던 이안은 그대로 공간 왜곡을 시전하였다.
토르와 이안 자신의 위치를 바꿔, 곧바로 다음 철거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이동속도가 느린 토르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이안의 잔머리라고 할 수 있었다.
위이잉-!
그리고 그것으로, 마군 진영의 악몽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