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0화 1. 최전방 야영지 (3) >
* * *
영웅의 협곡 전장은, 분기마다 한 번씩 맵이 재구성된다.
기본적인 룰과 틀은 비슷하지만, 맵의 구조를 비롯하여 곳곳에 숨겨진 각종 히든피스들과 아이템들이 싹 다 재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굳이 이렇게 하는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로, 이렇게 해야 콘텐츠의 다양성이 확보되어 더 재밌어질 것이었으며, 두 번째로, 이렇게 맵을 변환하지 않으면 공략이 고착화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영웅의 협곡은 RPG 게임인 카일란을 E스포츠화시키기 위한 LB사의 큰 그림이었기 때문에, 기획 팀에서 그 어떤 콘텐츠보다 더 신경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로터스 길드에서 불리를 감수하고 첫 번째 타임에 전장을 도전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시즌이 시작된 이후 AI모드를 클리어한 팀에게는, 빨리 클리어한 순서대로 ‘차원 영웅 랜덤 상자’가 차등 지급되니 말이다.
가장 처음으로 클리어한 팀에게는 총 열 개의 상자가, 두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클리어한 팀에게는 총 다섯개의 상자가.
마지막으로 열한 번째부터 백 번째 클리어한 팀에게는 한 개씩의 상자가 지급되는 것이다.
그 상자에는 순위 산정에 적용되는 점수와는 무관한 아이템들이 들어 있었지만, 랭커들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일 만한 보상이었다.
상자 안에 들어 있을 아이템들의 성능과는 무관하게, 그것은 매 시즌으로 ‘한정’되어 있는 리미티드 에디션 같은 아이템들이었으니까.
그리고 만에 하나 첫 주에 클리어하지 못하더라도 그 다음 주에 한 번의 기회가 더 있으니 로터스는 자신만만하게 첫 타임으로 도전을 한 것이었다.
반면에 타이탄 길드 팀과 같은 다른 한국 팀들의 경우 안정적으로 다음 타임을 선택한 것이고 말이다.
로터스의 공략 영상을 초반부라도 시청하고 전장에 들어간다면, 더 안정적으로 클리어할 수 있을 테니까.
‘힘들게 찾아낸 정보들이 알려질 게 배 아프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첫 번째 클리어 팀은 우리가 되어야지.’
지하통로에 들어선 이안은 조심스레 안쪽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통로의 도입부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듯 보이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자연동굴 같은 형태의 기다란 던전이었다.
그리고 이 통로 안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의 레벨 대는 이안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이었다.
훈이와 레미르의 레벨을 기준으로 하면, 거의 2배 언저리의 레벨을 가진 몬스터들이 등장했으니 말이었다.
-변이된 대지의 정령 : Lv 17(초월)
-변이된 바위 골렘 : Lv 19(초월)
아무리 컨트롤과 파티플레이가 최상급이라 하더라도,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정도의 전투력 차이.
때문에 이안은, 정신없이 오더를 내리며 급박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훈아, 대지의 정령 마법 캐스팅 좀 계속 끊어 줘! 골렘 공격은 피하면 그만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알겠어, 형!”
“누나는 파이어 월로 측 후방 몬스터들 접근 좀 막아 줘! 그럼 내가 나머지 몬스터들 유인해서 묶어 둘 테니까, 광역으로 마무리 좀 해 주고.”
“오케이!”
지하 통로에 있는 바위 골렘들과 대지의 정령들은 서로 시너지를 내는 몬스터들이었다.
바위 골렘이 앞에서 탱킹을 하면 뒤에서 대지의 정령이 강력한 대지 속성의 광역 마법을 난사하고, 골렘에게 각종 버프를 걸어 주니 말이다.
때문에 골렘 하나를 처치하는 데만 해도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생각만큼 사냥 속도가 나오지 않자 이안은 조금 답답했지만, 첫 번째 골렘을 처치하고 받은 보상으로 완전히 해소되었다.
원래의 계획을 캔슬하고 지하 통로에 진입한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보상이 짭짤했으니 말이다.
-‘변이된 바위 골렘’을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를 1,080만큼 획득합니다.
-350차원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경험치야 노력에 비해 많다는 생각이 들 정도는 아니었으나, 350이라는 차원코인은 확실히 만족스러웠던 것.
게다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대지의 정령들이 마법을 발동시키며, 새로운 몬스터 패턴이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본격적인 ‘꿀’의 시작이었다.
-‘변이된 대지의 정령’들이 대지의 마법 ‘어스 리저렉션(Earth Resurrection)’을 캐스팅합니다.
-부서진 바위 골렘의 파편들이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하급 바위 정령 ‘락쿰’들이 소환되었습니다.
-하급 바위 정령 ‘락쿰’들이 소환되었습니다.
……후략……
한 마리의 처치된 골렘으로부터 나온 파편들에 녹빛의 기운이 스며들자, 거의 열 마리에 가까운 작은 골렘들이 소환되었다.
그리고 처치하기 까다로웠던 골렘들과 달리, 이 미니 골렘(?)들은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공격력은 골렘만큼이나 위협적이었지만 느릿느릿해서 피하기 쉬운 패턴이었고, 생명력과 방어력은 원래 골렘의 절반조차 되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미니 골렘 ‘락쿰’의 무리들은, 광역 딜러가 둘이나 있는 지금의 이안 파티에겐 달달한 녀석들이라고 할 만한 것.
-‘락쿰’을 처치하였습니다!
-경험치를 275만큼 획득합니다.
-50차원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락쿰’을 처치하였습니다!
-경험치를 275만큼 획득합니다.
-50차원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후략……
“헐, 대박……! 골렘 이거 완전 꿀몹이잖아?”
“크으, 차원코인 쌓이는 것 보소. 조금만 파밍해도 만코인 정도는 금방 쌓겠는데?”
인벤토리에 굴러들어오는 차원코인들을 보며 만면에 미소가 번지는 레미르와 훈이.
그리고 이 전장을 주도하고 있는 이안 또한 적잖이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공략 난이도에 비해 경험치는 살짝 아쉽지만……. 코인 쌓이는 것 만큼은 대박이네.’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은, 사냥할 몬스터의 숫자가 충분하다는 점!
게다가 결국 사냥이 계속 이어지자, 일행은 괜찮은 장비 하나도 득템할 수 있었다.
띠링-!
-‘변이된 대지의 정령’을 성공적으로 처치했습니다!
-‘오염된 대지의 지팡이’ 희귀(초월) 등급의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지팡이는 레미르에게로 돌아갔다.
획득한 사람은 이안이었으나, 서리 단검과는 달리 계정 귀속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팡이의 옵션을 확인한 레미르는 만족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정도면 아주 쓸 만한 스펙이네.”
“그렇지. 속성 증댐 옵션이 대지 속성인 게 아쉽기는 하지만, 마법 공격력 붙어 있는 것 만 해도 충분히 높으니까.”
“쳇, 나도 지팡이 필요한데…….”
지팡이가 레미르에게로 돌아가자 훈이의 입술이 삐죽 나왔지만, 딱히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팡이에 붙어 있는 마력 재생 옵션이 어둠 마력이 아닌 일반 마력 재생이었으니, 레미르에게 지팡이를 주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좋았어. 이제 꼬마 골렘들을 더 빨리 녹여 줄 수 있겠군.”
“그럼, 다시 출발하자고. 쉴 시간 같은 건 없으니까 말이야.”
“쳇, 어련하시겠어.”
지팡이를 획득한 뒤 가볍게 정비를 마친 세 사람은 계속해서 지하통로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지하통로가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인벤토리에 쌓이는 재화들을 보고 있자면 도저히 뒤돌아 나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 이 끝에 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 보고 나서 생각하자.’
전투가 지속될수록 노하우와 숙련도가 쌓인 덕에, 점점 더 사냥 속도가 빨라지는 이안의 파티.
그러나 계속해서 순조롭게 이어질 것만 같던 그들의 사냥도, 결국 브레이크가 걸릴 수밖에 없었다.
“……!”
사냥하던 세 사람의 눈앞에 그들 중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시스템 메시지들이 떠올랐으니 말이다.
띠링-!
-마족 진영의 공격을 받아, 파티원 ‘유신’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다.
-파티원 ‘유신’이 사망하였습니다.
-사망한 영웅은 일정 시간(11분 30초)의 부활대기시간이 지난 이후 ‘차원의 홀’에서 부활됩니다.
-마족 진영에서 첫 번째 킬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최초 영웅 킬에 따른 100퍼센트만큼의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칙적인 상황은, 이안 파티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뭐지? 전장이 밀리고 있는 건가?”
* * *
한편 지하 통로에 들어선 이안 일행이 당황하고 있던 그 때.
첫 번째 킬 포인트를 따낸 마족 진영의 영웅들 또한, 나름대로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첫 번째 킬을 따서 막대한 보상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썩 밝은 표정들이 아닌 것이다.
“후우, 힘들었군. 이제야 첫 킬 포인트를 따내다니.”
“그러게 말이야. 이거 계획했던 것보다 너무 늦어졌는데.”
마족 영웅들의 표정이 밝지 못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처음 ‘발할라’의 봉인을 해제하고 전장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들의 예상이 계속해서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한 놈은 어찌어찌 잡았는데, 저 타워들 안에 박혀 있는 두 녀석은 도저히 잡을 방법이 보이질 않아.”
“으으, 겁쟁이 천군 놈들, 대체 왜 이렇게 소극적인 거지?”
“우리의 강력한 전투력을 확인했을 테니 소극적인 게 당연하지.”
“아니, 그게 아니고, 저놈들 처음부터 시종일관 저랬잖아.”
“하긴, 그것도 그러네.”
원래 마족 영웅들의 작전은 천군 진영의 영웅들을 유인해 내어 일망타진 하는 것이었다.
전장에 늦게 도착한 자신들을 얕본 천군 진영의 영웅들이 달려들면, 천군 진영 타워에서 먼 곳까지 유인하여 한 번에 몰살시키려고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전략은 처음부터 엇나갈 수밖에 없었다.
천군 진영을 지키던 세 사람은, 오히려 마족 영웅들이 자신들보다 강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저놈들, 충분히 사냥하고 올라와서 아마 레벨이 높을 거야.’
‘우린 이안 덕에 중간 보스를 빨리 잡은 거니까 아직까진 조심하면서 레벨만 올려야 해.’
레벨과 장비가 이안에게 몰빵되다시피 한 로터스 팀 입장에서는 당연히 마족 유저들이 더 강력할 것이라 판단하였고, 때문에 타워 근처를 벗어나지 않은 채 소극적으로 전장을 운영한 것이다.
빨리 킬 포인트를 따고 다음 전략을 진행하려던 마족 영웅들의 입장에선, 답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나마 퍼스트 킬을 따낼 수 있었던 것도, 봉인 해제한 발할라의 신족 병사들 덕분이었다.
일반 병사들보다 탱킹 능력이 수 배 이상 강력한 오클립스 일족의 병사가 방어 타워의 공격을 받아 내는 사이, 마족 영웅 다섯이 동시에 다이브를 하여 유신을 처치할 수 있었던 것.
하지만 이미 마족 영웅들이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지나간 시점이었으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만족스럽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할 거야, 대장?”
“흐으음…….”
“킬 포인트는 여기서 만족하고 미로의 지하 통로 뚫으러 가?”
다른 영웅들의 물음에 무스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본래의 계획대로 진행하기에는 애매한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잠시 후, 무스카는 천천히 다시 입을 떼기 시작하였다.
“천군 진영의 나머지 세 놈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건 좀 무리한 작전인 것 같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무스카는 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잠시 뜸을 들인 무스카가 입을 열었다.
“한쪽 라인을 빠르게 밀어 버리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야겠어.”
발할라 덕분에 강력해진 병력을 이용하여, 아예 다섯 라인 중 하나를 밀어붙이겠다는 이야기.
무스카의 말에 영웅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전장을 향해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그들의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천군 진영의 전선은 차츰차츰 밀리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