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6화 3. 영웅의 협곡 (7) >
* * *
“후우, 다들 정비는 끝났지?”
“오케! 난 끝남!”
“저도 끝났어요, 누나.”
“나도 끝!”
차원술사들의 제단을 성공적으로 파괴한 일행은 빠르게 정비를 마쳤다.
영웅의 협곡에 시간제한 같은 것은 없었지만, 빨리 승리할수록 랭킹 점수가 높게 등재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헤르스, 이안이한테는 메시지 보내봤어?”
“응. 방금 나랑 대화했는데, 준비되는 대로 텔레포트 쓰라는데?”
“좋아, 그럼 바로 움직여 보자고.”
“예썰! 이번에는 두 번째니까 요령도 좀 생겼고……. 더 쉽게 클리어할 수 있겠지.”
마지막으로 생명력 회복이 전부 끝난 유신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레미르를 제외한 다섯 명은 한자리에 모여 이동할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그 옆에 선 레미르는 숙련된 솜씨로 빠르게 마법진을 그려 내었다.
우웅- 우우웅-!
이어서 그려진 마법진의 사이사이로, 새하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고…….
파앗-!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일행의 그림자는 오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파티원 ‘레미르’가 이동 마법 ‘매스 텔레포트’를 시전하였습니다.
-파티원 ‘이안’이 위치한 좌표로 순간 이동 합니다.
짧은 메시지와 함께 어지럽게 일그러지는 눈앞의 공간들.
그리고 잠시 후.
“읏차!”
일행들은 처음 보는 장소로 순식간에 워프했고, 곧바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낯익은 얼굴은 당연히도 이안이었다.
“좋아, 바로 두 번째 제단 트라이해 봅시다!”
파이팅 넘치는 유신의 말에, 옆에 있던 훈이가 이안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 형도 있으니까 이번엔 금방일 거야.”
하지만 두 사람의 말에, 이안은 손가락을 까딱일 뿐이었다.
“너네 뭐라는 거냐.”
“……응?”
“두 번째 제단은 너희들이 클리어하고 왔잖아.”
“……!”
“여긴 승리의 협곡 입구고, 이제 저기 있는 중간 보스를 잡을 차례라고.”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 하는 이안.
그리고 이안의 말을 들은 일행들은 벙찐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 * *
로터스 파티가 클리어한 제단이 두 번째 제단인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이 그곳을 클리어하기 전에 이안이 첫 번째 제단을 클리어했으니 말이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야?”
“헐, 아니 혼자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임?”
“혼자 트라이할 생각 없다며! 좌표 찍고 우리 기다릴 거라며……!”
배신감(?)에 항의하는 팀원들을 향해, 이안은 어깨를 으쓱 하며 대꾸하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좋은 게 좋은 거잖아.”
“…….”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오르크나 트라이하자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의 말처럼, 지금 그가 어떻게 제단을 홀로 클리어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전장에서 승리한 뒤 YTBC 재방송을 확인하면 될 터.
다만 걱정되는 것은 제단조차 겨우 클리어한 지금의 스펙으로 오르크에 도전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거였다.
“근데 이안아, 지금 우리 레벨로 바로 중복 트라이해도 되는 거 맞아?”
“너희 레벨 몇인데?”
“제단 클리어하면서 다들 폭업했으니까, 훈이랑 레미르 누나가 6레벨. 나머지는 5레벨.”
헤르스의 말에, 이안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흐음……. 조금 낮기는 하네.”
“넌 레벨 몇인데?”
“난 9레벨이지.”
“헐…….”
“오르크가 7레벨이니까, 한번 트라이해 보자고. 안 되면 튀면 되니까.”
영웅의 협곡에서는, 아군이라 할지라도 겉으로 레벨이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따로 설정해서 아군에게만 레벨을 보여 주도록 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안 일행의 설정은 현재 기본 설정이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이안의 레벨을 듣고 또 한 번 기겁한 파티원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든든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역시 이안갓…….’
‘역시 이 형이 있으면 보험 들어 놓은 기분이라니까.’
‘저 괴물이랑 같은 길드여서 다행이야.’
여하튼 차원 마수 ‘오르크’를 트라이해 보기로 결정한 일행은, 신속하게 협곡 안쪽으로 진입하여 들어갔다.
그러자 멀찍이 보이던 괴수의 형상이 점점 더 또렷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생긴 건 딱 오크 같은 느낌인데…….”
“엄청 크네.”
“오크 주제에 갑옷도 입고 있어.”
저마다 한 마디씩 중얼거린 일행은 녀석과 가까워지자 자연스레 대형을 잡았다.
이미 수 없이 많은 파티 플레이를 해 본 그들이었기에, 누가 따로 오더하지 않아도 각자의 역할을 알고 있었다.
“자, 일단 선타는 내가 날린다! 레미르 누나랑 훈이는 캐스팅 준비하고!”
“알겠어!”
“알겠어, 형!”
훈이와 레미르가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하자, 이안은 곧바로 화염시를 소환하였다.
화르륵-!
그리고 9레벨이 되면서 개방한 ‘약점 포착’ 고유 능력까지 동시에 발동되었다.
‘자, 미간을 정확히 뚫어 주마.’
신체 곳곳에 붉게 빛나는 약점 부위를 겨냥한 뒤, 신중하게 활시위를 당기는 이안.
이어서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활시위를 튕기기 시작하였다.
피핑- 피피핑-!
이안의 활시위를 떠난 불화살들은 여지없이 오르크를 향해 쏟아져 들어갔고, 시원하게 녀석의 머리통에 틀어박혔다.
파팍- 팍-!
-차원마수 ‘오르크’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차원마수 ‘오르크’의 생명력이 364만큼 감소합니다.
-차원마수 ‘오르크’의 생명력이 419만큼 감소합니다.
-차원마수 ‘오르크’의 생명력이 399만큼 감소합니다.
……후략……
물론 ‘중간 보스’라는 타이틀과 어울리게, 이 정도의 공격으로 별다른 타격을 입지는 않는 오르크였다.
표식까지 폭발하였음에도 생명력 게이지가 쥐꼬리만큼 줄어드는 것을 확인한 이안은, 곧바로 단검을 빼어들며 녀석을 향해 뛰어들었다.
타탓 탓-!
곧 훈이와 레미르가 캐스팅한 공격 마법들이 작렬할 테니, 그 틈을 노려 약점에 일격을 꽂아 넣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막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려던 그때.
이안 일행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차원마수 ‘오르크’가 분노합니다.
-‘오르크’의 방어력이 10퍼센트만큼 감소하며, 방어력을 제외한 모든 전투 능력이 10분 동안 25퍼센트만큼 상승합니다.
-오르크의 움직임이 30퍼센트만큼 빨라집니다.
* * *
오르크의 레벨은 7이다.
그리고 이 말인 즉, 오르크를 처치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평균 레벨이 7레벨 정도라는 것이다.
9레벨인 이안을 제외하고 생각해 본다면, 정말 무모하기 그지없는 도전인 것,
하지만 문제는 이안의 레벨이 9레벨이라는 점과 그의 소환수들도 전부 8레벨 이상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안의 손에, 이 구간에서 가지고 있기 힘든 ‘날카로운 서리단검’ 아이템이 들려 있다는 것도 커다란 변수 중 하나였다.
‘이런 초근거리 무기 들고 보스 잡으러 뛰어드는 건 진짜 오랜만인데…….’
단검은 카일란에 존재하는 무기들 중 가장 사정거리가 짧은 장비이다.
암살자 클래스처럼 ‘은신’류의 스킬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안정적으로 딜을 뽑아내기 무척이나 어려운 무기인 것이다.
부우웅-!
듣는 것만으로도 섬뜩할 정도로 무서운 파공음을 뿜어내며, 오르크의 거대한 몽둥이가 이안의 옆에 떨어져 내린다.
쾅-!
이어서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이안은 허공으로 도약하여 오르크의 흉부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녀석의 심장에 단검을 꽂아 넣으려던 찰나.
크허엉-!
오르크가 거대한 입을 쩍 하고 내벌리며, 이안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었다.
인간형 몬스터에게서는 보기 힘든, 변칙 공격이 발동한 것이다.
“……!”
자칫 잘못하면, 무식한 오르크의 이빨에 물어뜯길 수도 있는 상황!
이안조차도 예측하지는 못했던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대처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침착하게 검을 회수한 이안은 녀석의 턱을 걷어 차 올리며 다시 뒤쪽으로 빠져나왔다.
퍼억-!
그것은 마치 서커스단의 묘기를 보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크, 역시 스릴 넘치는군.’
이안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비록 공격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안이 녀석의 시선을 끌어 준 덕에 레미르와 훈이의 마법 공격이 제대로 작렬했으니 말이다.
이마에 흘러내리는 한 줄기 땀을 닦아 낸 이안은, 다시 녀석의 빈틈을 노리기 위해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사 클래스인 헤르스의 ‘도발’ 스킬이 발동함과 동시에 오르크의 옆구리를 향해 또다시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파팟-!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오르크의 지근거리까지 뛰어들며, 단검을 뽑아 든 이안.
보스에 준하는 몬스터답게 금방 도발에서 벗어난 오르크가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지만, 이 정도는 이안의 예측 범위 안에 있었다.
“까망이, 어둠의 날개!”
푸르릉-!
녀석의 몽둥이가 다시 휘둘리기 전에, 까망이의 고유 능력을 먼저 발동시킨 것이다.
비록 잠깐 동안이기는 하지만, 확정적으로 대상을 ‘공포’상태에 빠뜨리는 까망이의 고유 능력.
오르크의 몽둥이는 허공에서 멈칫 할 수밖에 없었고, 그 틈에 이안의 단검은 오르크의 목덜미에 깊숙이 틀어박혔다.
촤락-!
-차원 마수 ‘오르크’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오르크’의 생명력이 1,029만큼 감소합니다.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고유 능력 ‘서리 칼날의 표식’이 발동합니다.
-차원 마수 ‘오르크’에게 ‘서리 칼날의 표식’이 각인되었습니다.
-‘오르크’의 움직임이 5퍼센트만큼 둔화됩니다.
표식이 생성된 것을 확인한 이안의 입꼬리가 가볍게 휘어졌다.
치명타와 함께 적지 않은 대미지가 들어갔지만, 그것보다도 지금은 표식을 쌓는 것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떠오른 대미지를 확인한 파티원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미친, 딜이 벌써 왜 저래?”
“레벨 차이 때문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레미르와 훈이의 마법이 녀석에게 입힌 피해는 고작 600 언저리였다.
그것들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대미지를 뽑아낸 것.
레벨이 두 배 차이나 다름없으니 그 정도는 당연하지 않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잘못 알고 하는 말이었다.
훈이와 레미르의 공격은 높은 계수를 가진 마법 공격이었고, 이안의 방금 공격은 평타 공격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파티원들이 놀라는 것과는 별개로 이안은 곧바로 다음 공격을 집어넣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딱 대여섯 번만 제대로 맞추면 돼. 그럼 게임 끝이야.’
이안이 지금 믿고 있는 것은, 서리 칼날의 표식 중첩 효과였다.
표식이 중첩될 때마다 녀석은 더욱 굼떠질 것이었고, 여섯 번 정도의 중첩이면 움직임이 확연히 느려질 테니 말이다.
수치상으로도 여섯 번의 둔화 중첩이면 분노 효과로 인한 움직임 버프가 상쇄될 수준.
더해서 최대 15회까지 중첩되는 서리 칼날의 표식은 녀석을 굼벵이로 만들어 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