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9화 2. 용족 드라코우 (7) >
* * *
쿠웅-!
거대한 덩치에 걸맞게 ‘기절’상태에 빠진 드라코우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진다.
이어서 짙푸른 색으로 번쩍이는 드라코우의 주변을 자줏빛 구름들이 휘감아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지금껏 카일란을 플레이하면서 수많은 광경들을 보아 온 이안조차도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볼 만큼 신비롭기 그지없는 모습.
하지만 이안의 놀람은 거기까지였다.
다음 순간 그의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발견되자 인상이 팍 하고 구겨진 것이다.
자줏빛 머릿결에 자색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 ‘아시라스’가 이안의 앞에 등장한 것이다.
이안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야? 내가 다녀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더니.”
지금 이안의 표정이 좋지 않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진짜 피똥 싸며 힘들게 처치한 천룡 드라코우의 막타를 자칫 잘못하면 NPC에게 빼앗겨 버리게 생겼으니 말이다.
물론 막타를 못친다고 해서 보상을 아예 획득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막타를 쳐야 모든 보상이 대폭 증가한다.
아이템의 드롭 확률도 높아지고 말이다.
지금 저 아시라스가 손 한 번 까딱하면, 이안으로서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
이안은 침착하게 상황을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후우, 괜찮아. 아직 드라코우가 죽은 건 아니잖아? 아시라스의 목적이 뭔지부터 확인해 봐야겠어.’
아시라스가 막타를 치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 이안과는 불구대천지수(?)가 되겠지만, 아직 드라코우는 살아 있다.
만약 아시라스가 막타를 치고자 마음먹었더라면 이미 드라코우를 죽이고도 남았을 터.
단지 ‘기절’시킨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안은 가까스로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아시라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자줏빛 구름에 휘감겨 허공에서 미끄러져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고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물론 경계심이 가득한 이안의 눈엔 별로 상관없는 부분이었지만 말이다.
이안의 앞까지 다가온 아시라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처음 흘러나온 말은 이안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정체가 뭐냐고. 어떻게 중간자의 위격도 얻지 못한 인간이 천룡을 이길 수가 있어?”
“그야 나도 모르지?”
갸우뚱하며 되묻는 이안을 보며, 아시라스는 답답한지 한숨을 푹 쉬며 다시 이안에게 물었다.
“아니, 그 전에, 천룡이 뭔지는 알아, 너?”
물론 그 물음에는 다시 답답한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지만 말이다.
“당연히 알지. 쟤가 천룡이잖아.”
“…….”
이안과 아시라스의 사이에 흐르는 잠시간의 정적.
잠시 후, 아시라스는 반쯤 혼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하였다.
“아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아니, 아니……! 으아아…….”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이안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지금까지의 정황을 봤을 때 적어도 아시라스가 ‘막타’를 치기 위해 전장에 난입한 것은 아니었다.
이안이 생각하기에 그녀가 나타난 이유는 일단 자신이 천룡을 처치하지 못하도록 일단 막아 두기 위함인 것 같았다.
‘천룡’이라는 타이틀에 왠지 이안이 모르는 어떤 정보가 담겨 있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 것이다.
‘뭔가 있어. 분명해.’
이안은 그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아시라스를 쿡쿡 찌르기 시작하였다.
“아니, 근데 아시라스, 뭐가 말이 안 되는 건데?”
“지금 네가 여기 천룡을 잡은 거.”
“그래? 그거 말이 안 되는 일이야?”
“당연하지!”
“근데 아직 쟤 안 죽었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일단 쟤 막타만 좀…… 아니, 마무리만 좀 하고 다시 얘기하면 안 될까?”
“그건 더 말이 안 돼!”
“어째서?”
“그, 그건……!”
이안의 페이스에 말려 뭔가를 말하려던 아시라스의 입이 순간적으로 꾹 다물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이안이 아니었다.
아시라스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뭔가 있다는 냄새가 더욱 강하게 났으니 말이었다.
이안은 좀 더 강하게 나가 보기로 했다.
“뭐야, 말 안 해 주면 쏜다?”
“뭐, 뭘 쏴?”
“뭐긴 뭐겠어? 저기 뻗어 있는 더 드라코우를 쏜다는 말이지.”
“……!”
“지금 내가 가진 스킬 쏟아부으면 아무리 너라도 드라코우가 죽는 걸 막진 못할걸?”
사실 대부분의 소환수들이 소환 해제당한 지금, 이안에게는 아시라스의 방어(?)를 뚫고 드라코우를 잡을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시라스가 구체적인 이안의 상황까지 알 리는 없을 터.
그리고 이미 초월 30레벨 수준으로 50레벨의 드라코우를 잡는 기적을 보여 준 이안의 공갈협박은 아시라스에게 결코 빈말로 들리지 않았다.
아시라느는 거의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아, 안 돼, 그건……!”
“그러니까 얼른 이유를 말하라니까.”
“……!”
“생각해 봐. 내가 진짜 개 고생을 해 가면서 다 잡았는데, 보상도 얻지 못하게 하려면 타당한 이유를 대야 할 것 아냐.”
“으…….”
이안은 강하게 아시라스를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다그칠 생각은 아니었다.
채찍 뒤에는 약간의 당근도 곁들여야 되는 것이 회유의 기본이었으니 말이다.
“얼른 얘기해 봐. 이유가 타당하다 생각되면, 네 말을 들어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이안의 마지막 그 말에, 아시라스의 입이 드디어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그게…….”
* * *
‘천룡’이란, 어찌 보면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정의내릴 수도 있는 존재였다.
천신의 인정을 받아 갇혀있던 영혼의 제약이 풀려, 진정한 용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드래곤. 혹은 용족.
하지만 당연하게도, 지금 아시라스가 이렇게 나타난 이유가 이 안에 있지는 않았다.
이안이 지금 천룡을 처치해서는 안 되는 바로 그 이유.
그것은 이안이 아직 중간자가 아니기 때문이며, 아시라스와 이안이 지금 밟고 있는 이 땅이 ‘소천’이기 때문이었다.
“이 소천에서 천룡은 특별한 존재야.”
“어떻게 특별한데?”
“일단 이 태초의 평원에만 존재하고, 그 마저도 무척이나 희귀하거든.”
“단지 희귀하다는 게 다일 것 같지는 않은데.”
“맞아. 그냥 희귀하기 때문이라면 내가 이렇게 막아서지도 않았겠지.”
소천에서 중천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인, 백룡강의 용오름.
평소에는 누구의 출입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몰아치던 용오름의 소용돌이는, ‘용신의 인정을 받은 자’에게만 그 길을 열어 준다.
그리고 천신의 인정을 받은 존재 중 하나인 ‘천룡’을 처치한다면, 그 또한 용신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방법.
즉. 이안이 만약 천룡을 처치한다면, 중천으로 오를 수 있는 길이 그에게 열린다는 소리였다.
“문제는 이렇게 너에게 중천으로 올라갈 길이 열리게 되면, 곡주께서 대노하실 거라는 거야.”
“음? 대체 왜?”
“자운곡주께서 용신께 받은 임무 중 하나가 이 용오름을 관리하는 건데, 원래 중간자의 위격이 없는 이는 중천에 발을 들일 수 없도록 되어 있거든.”
“흐음……. 그래서?”
“만약 네가 이 천룡을 잡아서 승천昇天 길이 열린다면 용천의 질서가 어그러지고, 그것은 오롯이 곡주님의 책임으로 돌아가겠지.”
“흠.”
“그렇게 되면 이 자리에 있었던 나 또한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고, 결국 너도 위험하게 될 거야.”
“나는 또 왜 위험한데?”
“곡주의 분노를 살 테니까.”
“…….”
뭔가 설명은 무척이나 거창하고 복잡한 듯 보였지만, 이안은 지금 아시라스가 어떤 말을 하는지 아주 명료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저 용을 처치하면 게임에 버그가 생긴다는 거잖아?’
NPC인 아시라는 아주 빙빙 돌려 얘기했으나, 어지간한 기획자들보다 게임에 대해 빠삭한 이안의 눈에는 핵심이 바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흐음,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리고 모든 상황을 파악한 이안은, 고민을 시작하였다.
이안에게는 지금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다.
어떻게든 기습적으로 드라코우를 처치하고 버그성 플레이를 시작하거나, 아니면 아시라스의 말을 들어주고 그 댓가로 뭔가를 뜯어내거나.
‘전자가 더 재밌을 것 같기는 한데…….’
잠시 갈등하던 이안은 결국, 아시라스의 말을 들어주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버그 성 플레이를 해서 어떤 추가적인 보상을 얻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고, 괜히 무리하다가 아시라스의 방해로 처치에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테니 말이었다.
‘그래. 역시 말 들어주는 척하면서 최대한 뜯어내는 게 가장 나은 방향인 것 같군.’
게다가 머리를 열심히 굴리다 보니, 제법 괜찮은 생각도 하나 떠올랐다.
지금 이 상황에서, 최소 두 마리 이상의 토끼를 잡아 낼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가 떠오른 것이다.
“……!”
순간 표정 관리에 실패할 뻔했던 이안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크흠, 그렇게 곤란한 상황이란 말이지?”
그리고 전혀 틈이 보이지 않던 이안의 태도에 약간의 빈틈이 보이자, 아시라스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응, 그렇다니까? 우리 곡주님 엄청 무섭고 성질 더러워. 제발 좀 건드리지 말자…….”
그에 이안은 씨익 웃으며, 천천히 본론을 꺼내기 시작하였다.
“흐음, 그렇다면 한번 우리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까?”
“윈윈……이라고?”
“그래. 너랑 나랑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방법.”
“그게 대체 뭔데?”
“내가 이해한 바로는, 지금 저 녀석을 처치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한 것 같은데…… 맞지?”
* * *
용사의 협곡.
그곳에서 가장 높은 곳, 의식의 제단.
제단의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용사의 동상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고, 그 주위로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영웅의 의식에 도전하는 용사여, 그대는 지금껏 그 어떤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내었노라.
그대의 능력에 걸맞은 시련을 내렸다 생각하였으나, 그대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뛰어난 용사였다.
그대에게 남은 모든 의식을 통과할 수 있는 면제권을 주도록 하겠노라.
용사여, 나의 부름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칭찬 일색의 내용을 담은 대사들과 함께, 믿을 수 없는 내용들을 담고 있는 신의 목소리.
쩌렁쩌렁한 목소리의 울림이 끝나자, 그 앞에 서 있던 남자의 주변으로 황금빛 광채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남자의 정체는, 바로 이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