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8화 2. 용족 드라코우 (6) >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암벽 주변에 둘러 있는 투명한 결계.
그리고 그 안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이안과 드라코우의 모습.
아시라스에게 이 광경은 보고 있는 두 눈을 의심케 할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중간자의 위격조차 얻지 못한 인간이 천룡을 상대로 비등하게 싸우고 있다고?”
천룡이란 ‘드래곤’의 영혼을 가졌다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이름이었지만, 또 누구도 얻기 힘든 이름이기도 하였다.
아시라스 또한 ‘천룡’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에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갓 천룡의 자격을 얻은 녀석인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녀의 상식으로 중간자의 위격을 얻지 못한 인간은 천룡의 비늘에 생채기조차 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인간은 벌써 천룡의 생명력을 절반 가까이 깎아 내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준 임무는 벌써 다 완수한 것 같고……. 어떻게 해야 하나. 도와줘야 하나?’
공터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드라코우들의 시체로 봐서 이미 이안은 다섯 마리 이상의 드라코우를 처치한 상태였고, 이렇게 된 이상 아시라스는 이안을 도와 함께 천룡을 공격하는 것이 맞았다.
아시라스는 충분히 드라코우가 펼쳐 놓은 결계를 부술 힘이 있었고, 그녀가 참전하는 순간 전투는 그대로 종료될 테니 말이었다.
이안과의 전투로 힘이 빠질 대로 빠진 드라코우 정도는 그녀에게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아시라스는 어쩐 일인지 팔짱을 낀 채 암벽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하지만…… 이거 재밌잖아?’
이안과 천룡 드라코우의 전투.
그 결과가 무척이나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인간 녀석이 위험해 보이면 그때 도와주지, 뭐. 일단 지금은 좀 더 구경하고 싶어졌으니까.’
높다란 암벽에 걸터앉은 아시라스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고정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자줏빛 눈동자는 영롱하게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 * *
콰앙-!
-강력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드라고닉 배리어’가 소멸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역시나 엘카릭스의 배리어는 그대로 삭제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안의 도박은 보기 좋게 성공하였다.
수십만이 넘는 파괴력을 가진 화염에 휩싸였음에도 불구하고, 배리어만이 사라졌을 뿐 생명력은 1도 깎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어서 멀쩡한 생명력을 확인한 이안은 곧바로 생각해 두었던 대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할리 소환!”
크허엉-!
이안은 소환 대기 시간이 돌아온 할리를 소환한 뒤 녀석의 등에 올라 드라코우에게 재빨리 접근하였다.
-소환수 ‘할리’의 고유 능력 ‘바람의 수호자’가 발동합니다.
이어서 비장한 표정으로, 당황한 드라코우의 빈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용신의 가호 재사용 대기 시간이 이제 절반 정도는 돌아왔을 거야.’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해 본 이안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집어삼켰다.
지금까지보다 훨씬 빠른 페이스로 딜을 넣고 있기는 했지만, 녀석의 회복 능력 재사용 대기 시간은 체감 상 5분도 채 되지 않는 것 같았으니, 이안의 마음은 조급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크허어엉-!
바람의 수호자까지 발동시켜 민첩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할리가 순식간에 드라코우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하였다.
그리고 그 순간 할리의 등에서 뛰어내린 이안이 드라코우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콰득-!
공격은 살짝 빗겨 들어갔지만 이안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목적은 녀석의 어그로를 끌어내는 것에 있었으니 말이다.
“이쪽이다, 이놈!”
그리고 이안의 의도대로, 분노한 드라코우의 공격은 그에게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쾅- 콰쾅!
그리고 그 덕분에 할리에게 ‘프리 딜’에 가까운 공격기회가 만들어졌다.
크허엉-!
용맹스럽게 포효하며 드라코우의 등으로 뛰어드는 할리.
어찌 보면 이안과 할리의 역할이 뒤바뀐 것과 같은 상황이었지만, 이것은 그가 의도한 것이었다.
‘제발, 스턴!’
이것은 할리의 고유 능력인 ‘후려치기’를 발동시키기 위한 이안의 설계였으니 말이다.
쾅- 쾅- 콰앙-!
일반 공격 시 10퍼센트의 확률로 적을 기절시키는 고유 능력인 후려치기.
물론 드라코우의 기절 저항력까지 감안한다면 실질적인 확률은 5퍼센트도 채 되지 않을 터였지만, 이안은 할리의 무지막지한 공격 속도에 희망을 걸어 보았다.
퍽- 퍽- 퍼퍽-!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211만큼 감소합니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309만큼 감소합니다.
……후략……
할리가 평타로 입힐 수 있는 피해량 자체는 티도 잘 나지 않을 정도로 미미했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1초라도 스턴이 들어간다면, 드라코우의 배때기에 최소 서너 번은 죽창을 찔러 넣을 수 있을 테니 말이었다.
게다가 정확히 녀석의 약점을 공격할 수도 있을 테니, 제법 높은 확률로 ‘치명타’가 터질 수 있었다.
그리고 할리의 공격이 열 번 정도 들어갔을 때…….
-소환수 ‘할리’의 고유 능력 ‘후려치기’가 발동합니다.
-천룡 ‘드라코우’가 1초 동안 기절 상태에 빠집니다.
‘지금……!’
스턴이 발동한 것을 확인한 이안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드라코우의 복부에 죽창을 꽂아 넣었다.
퍼퍽- 퍽-!
-천룡 ‘드라코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21,756만큼 감소합니다.
-천룡 ‘드라코우’에게 강력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7,758만큼 감소합니다.
가능했던 거의 최상의 시나리오가 이어지며, 드라코우에게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한 이안.
‘됐어!’
이어서 이안의 시선은 자연스레 드라코우의 생명력 게이지를 향해 움직였고,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절반 아래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고유 능력 ‘용신의 가호’가 발동되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이것은 이안의 계산대로, 아직까지 용신의 가호 재사용 대기시간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
물론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온다면 용신의 가호가 언제든 발동될 터였지만, 지금까지의 페이스가 아주 좋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올 때까지 한 1~2분 정도 남았겠지?’
이안은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쉴 새 없이 시간을 계산해 보며, 계속해서 드라코우를 압박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처음으로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30퍼센트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천룡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30퍼센트 미만으로 떨어졌습니다.
-‘드라코우’의 고유 능력 ‘광폭화’가 발동합니다.
-15분간 ‘드라코우’의 공격력과 민첩성이 30퍼센트 증가합니다.
-15분간 ‘드라코우’의 방어력이 30퍼센트 하락합니다.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의 두 눈이 확대되었다.
‘뭐야, 이거 옛날에 라이가 가지고 있던 스킬이잖아?’
이안이 ‘소환수 스킬부여’를 활용하여 라이에게 처음 부여하였던 스킬인 광폭화.
생각지도 못했던 스킬과 마주하자 살짝 놀란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오히려 좋은 상황인 건가?’
이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얹혔다.
어떻게든 회복 스킬이 돌아오기 전에 녀석을 처치해야 하는 이안의 입장에서는, 방어력이 떨어진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 것이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499만큼 감소합니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8,488만큼 감소합니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327만큼 감소합니다.
……후략……
이안은 구슬땀을 흘려 가며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딜을 넣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 결과 소환수들을 하나씩 소환 해제해야 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번에도 녀석을 처치해 내지 못한다면, 어차피 전투는 패배할 테니 말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제는 거의 10퍼센트 수준까지 떨어져 내린 드라코우의 생명력 게이지.
그런데 바로 그때.
이안의 눈에 너무도 익숙한 이펙트가 발동되기 시작하였다.
우우웅-!
푸른빛이 녀석의 주변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드라코우의 고유 능력인 ‘용신의 가호’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와 버린 것이다.
“……!”
-‘드라코우’의 고유 능력 ‘용신의 가호’가 발동합니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975만큼 회복됩니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975만큼 회복됩니다.
……후략……
또다시 이안의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하는, 절망적인 시스템 메시지.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안은 전혀 당황한 표정이 아니었다.
대신 그것을 확인한 순간, 이안은 순식간에 장비를 스왑(Swap)하고 있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이안은 침착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용사 이안의 검’ 장비를 착용 해제하였습니다.
-‘용사의 천룡군장 보주’ 장비를 착용하였습니다.
-‘빛나는 용맹의 수호갑’ 장비를 착용 해제하였습니다.
-‘용사의 천룡군장 흉갑’ 장비를 착용하였습니다.
푸른빛이 일렁이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빛의 속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장비를 스왑한 이안!
이어서 이안의 주변으로 푸른 빛깔의 파동이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푸른 파동은 드라코우의 주변에 일렁이던 짙푸른 기운을 집어삼켜 버렸다.
-고유 능력 ‘천룡군장의 위엄’을 발동합니다.
이어서 당황한 표정을 한 드라코우의 머리 위에 시퍼런 용의 형상이 떠올랐다.
-천룡 ‘드라코우’가 10초간 침묵합니다(침묵 효과가 지속되는 동안, 모든 종류의 액티브 스킬이 봉인됩니다).
-천룡 ‘드라코우’의 마력이 전부 소멸합니다(10초 동안 마력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안이 지금껏 숨기고 있었던 마지막 한 장의 카드였던 것이다.
*천룡군장의 위엄
-기본 지속 효과
정령 마법으로 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시 보주의 모든 고유 능력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중략……
-사용 효과
남아 있는 소환 마력을 전부 소진하여 반경 50미터 내의 모든 적들을 10초 동안 침묵시킵니다.
남아 있는 생명력의 50퍼센트만큼을 일시에 소진하여, 반경 50미터 내의 모든 적들의 마력(소환 마력)을 전부 태워 버립니다(재사용 대기 시간 : 60초).
‘침묵’ 디버프는 대상의 스킬을 봉쇄하기도 하지만, 발동중인 스킬을 씹어 버리기도 한다.
때문에 이안은 ‘용신의 가호’이펙트를 발견함과 동시에 천룡군장 세트를 착용하였고, 엄청난 속도로 장비를 스왑하여 드라코우의 고유 능력을 씹어 버린 것이다.
물론 ‘용신의 가호’ 스킬이 발동조차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에, 드라코우의 생명력은 조금이나마 회복되었다.
하지만 거의 10만에 가깝게 회복되었던 이전과 달리 3~4만 수준이 회복되었을 뿐이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이론상으로나 가능한 플레이었고, 덕분에 드라코우는 하얗게 질린 표정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아, 아니, 인간이 어떻게 천룡군장의 능력을……!
회복 능력만을 믿고 있었던 드라코우로서는 그야말로 전의가 상실되어 버릴 만큼 절망적인 상황.
만약 이안이 침묵을 미리 발동시켰다면 10초의 지속 시간이 끝난 뒤에 회복하면 되지만, 지금은 회복 스킬이 발동되다가 씹힌 상황이었다.
드라코우가 다시 회복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선 5분의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
‘됐어!’
이안은 힘겹게 만들어 낸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녀석을 쉴 새 없이 몰아붙이기 시작하였다.
고유 능력을 발동시키기 위해 잠시 착용했던 천룡군장의 세트를 어느새 본래의 장비로 다시 스왑한 이안이었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7,513만큼 감소합니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9,011만큼 감소합니다.
전투력과 별개로 이미 기세에서 밀려 버린 탓인지, 이안의 공격에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드라코우.
이안은 이제 거의 빈사 상태가 된 녀석에게, 마지막 한 방을 먹이기 위해 다가갔다.
이안은 얼른 이 괴물 같은 녀석을 처치하고 잠깐이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마지막이다!’
제대로 된 한 방을 꽂아 넣기 위해 침착한 표정으로 검을 치켜드는 이안.
그런데 바로 그때.
콰아앙-!
마치 하늘이 내려앉기라도 하듯 허공에서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지며, 자색 운무가 드라코우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에 놀란 이안은 내려치려던 검을 그대로 치켜든 채 한 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
어차피 승리가 거의 확정된 상황에서 불확실한 모험을 감행할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천룡 ‘드라코우’가 ‘자운紫雲’에 잠식당했습니다.
-천룡 ‘드라코우’가 ‘기절’ 상태에 빠집니다.
이어서 다음 순간, 이안의 눈앞에 낯익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