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7화 2. 용족 드라코우 (5) >
* * *
이안은 아직 정확하게 모르지만, ‘천룡’이라는 타이틀은 특정 드래곤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정 수준의 ‘위격’과 ‘초월 레벨’ 등의 기준을 충족한다면, 어떤 드래곤이든 천룡이 될 수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결코 쉽지 않은 것들이었으니 ‘천룡’의 타이틀을 가진 드래곤은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안과 전투 중인 천룡 드라코우가 겉으로 드러나 있는 초월 레벨보다도 더 강력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허억, 허억.”
드라코우를 상대하는 이안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지금 이안의 생명력은 30퍼센트도 채 남지 않은 상태.
반면에 드라코우의 생명력은 아직도 절반이 넘게 남아 있었다.
-쥐새끼 같은 놈이로구나. 도망은 그만 다니고 패배를 인정하거라!
“시끄러, 인마!”
-힘의 차이를 인정할 줄 아는 것 또한 용사의 덕목 중 하나. 네놈의 구차함을 더 이상 봐 줄 수가 없도다……!
“어디서 용 한 마리가 짖네.”
이안에게 도발당한 드라코우가 입가를 씰룩거리며 으르렁거렸다.
캬아아오!
이어서 한차례 포효한 그는 또다시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 줌 가루로 만들어 주마!
드라코우의 표정에는 커다란 분노가 어려 있었다.
전투력 차이는 너무도 확연한 상황에서, 벌써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안이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약이 바짝 올랐군.’
자신보다 한참 허약한 인간을 상대로 1시간이 넘도록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도 못마땅하기 그지없는데, 이상하게 생긴 몽둥이에 두들겨 맞을 때마다 제법 큰 고통이 느껴졌으니, 드라코우의 자존심에 금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자존심이 상해 분노한 드라코우보다 이안의 상황이 더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이안은 지금,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이거 진짜 답이 없네. 버티려면 계속 버틸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달려드는 드라코우의 공격을 피해 허공으로 가볍게 뛰어오른 이안은 녀석의 지느러미를 베며 아슬아슬하게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촤락-!
-천룡 ‘드라코우’에게 강력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8,756만큼 감소합니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10,152만큼 감소합니다.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숙련된 솜씨로, 드라코우의 갈빗대(?)에 2타를 박아 넣는 이안.
그리고 거의 2만에 가까운 데미지가 들어가자, 드라코우의 생명력 게이지가 눈에 보일 정도로 잘려 나간다.
대략 50~60퍼센트 사이 정도로 보였던 드라코우의 생명력 게이지가 단숨에 절반 아래로까지 떨어진 것이다.
당연히 드라코우의 생명력 게이지는 깜빡이기 시작했고, 이안의 공격은 먹혀 들어가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우우웅-!
낮은 공명음과 함께 푸른빛이 녀석의 주변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녀석의 생명력이 차오르기 시작하였다.
-천룡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드라코우’의 고유 능력 ‘용신의 가호’가 발동합니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975만큼 회복됩니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975만큼 회복됩니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975만큼 회복됩니다.
……후략……
일일이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밀려 올라오는 시스템 메시지들.
얼핏 봐도 백 줄도 넘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드라코우의 생명력은 다시 피해를 입기 이전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까지 차올라 버렸다.
눈대중으로 봐도 10만이 훌쩍 넘는 생명력이 회복된 것이다.
‘역시, 다시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와 버렸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이안은, 검병을 다시 한 번 고쳐 잡으며 쓰게 웃었다.
지금까지 전투의 양상은 계속 이런 식이었다.
열심히 공격을 때려 넣어 승기를 잡았다 싶으면, 녀석이 고유 능력으로 생명력을 전부 회복해 버리는 것이다.
물론 고유 능력이 항상 발동하는 것은 아니고 재사용 대기 시간이라는 것이 있지만, 문제는 그 안에 녀석을 처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방금 전에야 아슬아슬하게 2타를 성공시켰지만, 이렇게 두 방의 공격을 넣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이놈을 잡으려면 회복불가 스킬이 필수인 것 같은데…….’
생명력 회복을 제한할 수 있는 강력한 디버프인 ‘회복 불가’ 효과.
이것만 있었더라면 녀석을 처치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이안은 무척이나 아쉬웠다.
희귀한 디버프이긴 하지만, 미리 알았더라면 충분히 구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흐으, 오늘은 포기해야 하나?’
계속해서 녀석의 공격을 피하고 흡수하며 버틸 자신은 있었지만, 처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이안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여 들어갔다.
‘후우……. 그래. 포기할 땐 포기하더라도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건 해 보고 포기하자.’
자신을 노려보며 씩씩거리고 있는 드라코우와 눈이 마주친 이안은, 한차례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마지막 순간에 사용하기 위해 남겨 두었던 단 하나의 패.
이제는 그것을 꺼내 들어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실패한다면 그때는 깔끔하게 포기할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죽여 주겠노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포효한 드라코우가 거대한 몸을 빙글빙글 돌리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러자 마치 꽈배기처럼 꼬인 그의 몸으로부터 강력한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고오오-!
그리고 다음 순간.
촤아아아!
회오리바람에 휘감긴 푸른 구체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확인한 이안이 재빨리 팔을 치켜들었다.
“닉, 태양신의 비호!”
끼오오오-!
드라코우의 용언 마법들 중 가장 피하기 어려운 광역 다발공격.
모든 투사체를 흡수할 수 있는 태양신의 비호 고유 능력은 이 스킬을 상대할 때 꺼내 들기 위해 아껴 뒀던 이안이었다.
우우웅-!
그리고 태양신의 비호가 발동함과 동시에 이안은 날랜 몸짓으로 순식간에 드라코우의 지근거리까지 뛰어들었다.
광역 무적에 가까운 이 스킬이 발동할 때야말로 소환수들과 함께 드라코우에게 역공을 가할 수 있는 가장 큰 찬스였으니 말이었다.
“라이, 카르세우스!”
크릉-!
캬아아오!
이어서 이안의 오더에 따라 움직인 라이와 카르세우스가 연달아 드라코우의 몸통에 공격을 박아 넣기 시작하였다.
물론 사기적인 공격무기를 가진 이안과 비교하면 미미하기 그지없는 대미지가 들어갈 뿐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누적되니 조금씩 생명력 게이지가 줄어들고 있었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731만큼 감소합니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502만큼 감소합니다.
……후략……
-캬아아악!
고통스러운 표정이 되어, 라이와 카르세우스를 잡기 위해 몸통을 뒤트는 드라코우.
그 틈에 녀석의 뒤를 잡은 이안은, 망설임 없이 녀석의 등짝에 검을 꽂아 넣었다.
퍼어억-!
이어서 검병을 역수로 고쳐 쥔 이안은 그대로 검을 찍어 올리며 허공으로 도약하였다.
느린 공격 속도를 커버하기 위해 움직임을 이용해 연속 피해를 입힌 것이다.
촤아악-!
-천룡 ‘드라코우’에게 강력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11,275만큼 감소합니다.
-‘드라코우’의 생명력이 9,599만큼 감소합니다.
깔끔하기 그지없는 이안의 공격 모션.
덕분에 이안은, 녀석의 생명력을 다시 10퍼센트가량 털어 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굼떠서, 날 잡을 수나 있겠나?”
-이, 이, 건방진 인간……!
이안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드라코우를 다시 도발하였고, 덕분에 분노한 드라코우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표정과 달리 사실 이안의 마음속은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다.
다음 순간 녀석이 발동시킬 용언 마법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오오오-!
녀석이 사용하는 용언 마법 중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마법인 용의 분노.
-키아아아……!
기괴한 소리로 포효한 녀석의 양손에서 시퍼런 불길이 일렁이기 시작하였다.
화르륵-!
그리고 점차로 커진 그 위협적인 불꽃덩이는 그대로 이안과 소환수들을 향해 쏟아져 내려왔다.
단 한 방에 빡빡이도 빈사 상태로 만들어 버렸던 이 불꽃은 잘못 맞으면 그대로 게임 아웃이라 할 수 있었다.
콰아- 콰아아-!
최초에 드라코우의 몸통을 가릴 정도로 거대했던 화염 구체가 연속해서 사등분으로 쪼개지며 순식간에 열여섯 덩이로 변하였다.
이어서 그것들은 마치 유도미사일처럼 이안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이안은, 입을 앙다물며 그대로 불덩이들을 향해 마주 달렸다.
‘이번엔, 정면 승부다!’
지금까지 이안이 이 유도 미사일들을 상대했던 방식은 단순했다.
한계까지 이동속도를 올려 도망다니며, 무적을 사용한 빡빡이나 지형지물을 이용해 구체를 하나씩 소멸시켰던 것이다.
비교적 투사체의 속도가 느린 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이었던 것.
하지만 그 방식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열여섯 개의 화염구를 전부 소멸시키는 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드라코우의 회복 고유 능력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와 버리니 말이다.
때문에 이안은, 처음으로 정면 돌파를 시도하였다.
이것은 치밀하게 전투하는 이안의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는, 약간의 도박성 있는 선택.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것으로 게임 아웃당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차피 승산은 없었으니까.
“엘, 배리어!”
“네, 아빠!”
우우웅-!
두 눈을 부릅뜬 채 열여섯 개의 화염구들을 마주한 이안은, 그대로 그것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애초에 엘의 배리어로 이 어마어마한 대미지를 버텨 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구체 서너 개 정도야 배리어로 흡수가 가능할 테지만 열여섯 개의 구체를 다 흡수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무리 엘카릭스의 배리어가 성능이 좋다 한들, 수십만이 넘어갈 데미지를 전부 흡수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
다만 이안이 노리는 것은 카일란에서 배리어 계열 마법이 가진 특성이었다.
‘무조건 동시에 맞아야 돼.’
카일란에서 배리어는 아무리 강력한 피해가 들어와도, 동시피격으로 판정되는 공격에 한해 한 번은 전부 흡수해 주니 말이다.
때문에 이안은, 화염구체들과 맞부딪치기 직전에 달리는 속도를 살짝 늦추었다.
그것들이 모여들 시간을 주어야 동시에 피격당하는 것이 가능할 테니 말이다.
‘되라, 제발……!’
그리고 다음 순간.
이안의 귓전에, 고막이 터져 나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커다란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앙-!
이어서 이안의 주변을 휘감고 있던 새하얀 배리어가 그대로 증발하며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