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8화 용사의 의식 (4) >
* * *
카일란에서 적에게 강력한 대미지를 입히기 위해서는 공격력도 중요하지만 민첩성도 무척이나 중요하다.
마치 현실에서처럼 공격의 정확도에 따라 대미지에 가중치가 생기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서 ‘약점’을 정확히 공격해야 ‘치명타’ 판정이 떠오르니 민첩성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물론 지금의 이안처럼 세팅상 부족한 민첩성을 컨트롤로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기는 했지만, 그것에도 당연히 한계는 있었다.
이안이 공격할 때마다 거의 100퍼센트 가깝게 뜨던 치명타가, 세팅을 바꾼 뒤로는 거의 보이질 않으니 말이다.
아무리 컨트롤이 좋아도 받쳐 주는 민첩성이 부족하다면, 약점에 정확한 타격을 집어넣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
최상급 클래스를 자랑하는 사라의 둔화 마법이 시전되자 트라키오스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진다.
반면에 스텟 버프를 받은 이안의 민첩성은 세팅을 바꾸기 이전의 80퍼센트 수준까지 복구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법사 클래스가 가진 최강의 디버프 마법이 시전되자…….
우우웅-!
트라키오스 한 마리의 몸에 붉은 빛이 쏟아져 들어갔다.
띠링-!
-파티원 ‘사라’의 마법 ‘무장 해제’가 발동합니다.
-‘트라키오스’의 모든 전투 능력이 5초 동안 15퍼센트만큼 감소합니다.
-‘트라키오스’가 1.5초 동안 ‘무방비’ 상태에 빠집니다.
-‘무방비’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트라키오스’가 치명적인 공격을 허용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무방비’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트라키오스’의 명중률이 대폭 감소합니다.
-‘무방비’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트라키오스’가 입는 모든 피해량이 증가합니다.
-‘무방비’ 상태에서 강력한 피해를 입을 시, 일정 확률로 2초 동안 ‘기절’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기절’ 상태에 빠지면, 그 시간만큼 ‘무방비’상태의 지속 시간이 증가합니다.
‘무장 해제’ 마법은, 사실 평범한 유저들에게는 ‘계륵’ 같은 디버프 마법 중 하나였다.
‘모든 전투 능력 15퍼센트 감소’라는 기본 효과부터 부가 효과인 ‘무방비’ 디버프까지.
그 성능이 엄청나기는 했지만 지속 시간이 워낙 짧아서 활용하기 어려운 마법이기 때문이다.
재사용 대기 시간이라도 짧으면 지속적으로 걸어 주련만, 그것도 아니었으니 활용하는 것이 까다롭기 그지없는, 그런 디버프 마법인 것이다.
일부 길드에서는 이 디버프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딜러의 실력을 판단하기도 할 정도.
하지만 그런 것들과는 별개로 사라는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었고, 딜러 포지션인 이안은 더더욱 평범하지 않았다.
지금의 이안에게 이 무장 해제 마법은 더할 나위 없이 궁합이 잘 맞는 디버프 마법이었다.
‘이 디버프만 잘 활용하면 저 돼지 같은 놈들도 순식간에 삭제해 버릴 수 있어.’
트라키오스의 거대한 몸집에 붉은 빛이 휘감겼다.
이것은 지금 이 순간, 트라키오스가 ‘무방비’ 상태에 빠져 있다는 이야기.
이 무방비 상태가 지속되는 단 1.5초의 시간 안에, 이안은 정확한 약점에 검을 꽂아 넣어야 했다.
‘디버프를 이렇게 떡칠했는데 이 정도도 못 해내면, 게임 접어야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든 이안은 그것을 역수로 치켜든 채 트라키오스를 향해 뛰어내렸다.
약점 포착을 발동시켜 이미 약점의 위치는 파악한 바.
이제 정교한 컨트롤만이 남아 있었다.
“흐아압!”
거대한 코뿔소 거북(?)인 트라키오스의 약점은 등껍질과 머리 사이에 살짝 드러나 있는 ‘목등’이었다.
단단한 외피 사이의 좁은 틈새.
그리고 이안의 검 끝은 여지없이 그 틈을 향해 파고들었다.
콰악- 콰드득-!
그리고 그 순간, 이안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향했다.
워낙 치명타 확률 세팅이 안 되어 있어서, 정확히 약점을 공격한다 해도 치명타가 뜨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떠라, 치명타!’
이안이 이 검을 사용한 이후 가장 아쉬웠던 것이 ‘치명타 피해량’ 옵션을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었으니.
이번 기회에 치명타 파괴력이 얼마나 나오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트라키오스는 이안에게 막대한 경험치를 줄 좋은 사냥감임과 동시에, 훌륭한 펀치머신의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몬스터 ‘트라키오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무방비’ 상태의 적을 공격하여, 더욱 강력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트라키오스’의 생명력이 112,750만큼 감소합니다.
-강력한 파괴력으로 인해 ‘트라키오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트라키오스’가 기절 상태에 빠졌습니다.
-‘무방비’ 상태의 지속시간이 증가합니다.
그리고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사라와 바네사는 동시에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정말 이게 가능한 거였어?”
“괴, 괴물……. 혼자 400킬 올릴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어.”
사실 이 괴랄한 탱킹 능력을 가진 트라키오스에게 ‘무장해제’마법은 큰 의미가 없는 디버프였다.
부가 효과인 ‘무방비’상태에서 스턴을 먹여야 디버프의 효과가 극대화되는데, 어지간한 공격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스턴을 띄우기 위해선 적어도 대상이 가진 최대 생명력의 20퍼센트 정도는 단숨에 깎아 버려야 하는데, 트라키오스를 상대로 그런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안은, 단 한 방의 검격으로 트라키오스의 생명력 게이지를 뭉텅이로 날려 버렸다.
이것은 디버프 효과 중첩에 더해진 ‘용사 이안의 검’의 부가 효과 덕분에 가능한 파괴력이었다.
-치명타 확률이 20퍼센트만큼 감소하며, 치명타 피해량이 20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무장해제로 인해 방어력이 15퍼센트나 감소한 데다 무방비 디버프로 인한 피해량 증가 효과가 겹쳤으며, 거기에 치명타 피해량이 200퍼센트나 추가된 것.
이 세 요소가 곱 연산으로 작용하니, 입이 쩍 벌어지는 위력이 만들어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놀라건 말건 이안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아예 스턴까지 걸려 멈춰 버린 트라키오스의 숨통을, 그대로 끊어 놓기 위해서 말이다.
촤악-! 콰드득-!
-몬스터 ‘트라키오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트라키오스’의 생명력이 111,090만큼 감소합니다.
-강력한 파괴력으로 인해, ‘트라키오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트라키오스’의 생명력이 115,121만큼 감소합니다.
-‘트라키오스’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중간계가 아니라 지상계에서도 만들어내기 쉽지 않은 대미지를 띄우면서, 순식간에 트라키오스 한 마리를 삭제해 버리는 이안.
두 자매는 이안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하였다.
“휴, 그냥 빨리 뿔이나 챙기자, 언니.”
“그래, 그러자. 정령계에서도 느꼈었지만, 쟨 사람이 아니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트라키오스가 드롭한 뿔을 챙겨 인벤토리에 넣는 바네사.
하지만 뭔가 씁쓸해 보이는 표정을 한 그녀들과 달리 이안은 무척이나 신이 난 상태였다.
오랜만에 발동된 치명타 공격의 위력이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했기 때문이다.
“사라, 무장 해제 재사용 대기 시간 얼마였지?”
“5분짜리야, 이거.”
“그럼 5분 동안 무장해제 없이 한두 놈 더 잡고, 재사용 대기 시간 돌아오는 대로 바로 다음 놈 잡자.”
“그러지, 뭐.”
“바네사, 너는 그쪽에서 계속 어그로 좀 끌어 주고.”
“알겠어.”
사라는 무장해제 말고도 강력한 디버프 마법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활용하자 트라키오스들을 차근차근 사냥할 수 있었다.
-파티원 ‘이안’이 ‘트라키오스’에게 강력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트라키오스’의 생명력이 15,790만큼 감소합니다.
-파티원 ‘이안’이 ‘트라키오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트라키오스’의 생명력이 71,055만큼 감소합니다!
-‘트라키오스’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결국 열댓 마리 정도 되던 트라키오스들을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전멸시킨 이안의 파티.
하지만 당연히,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이미 설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이안의 소환수들이 계속해서 다른 무리들의 위치를 찾아내었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은, 마치 설산에 서식하는 트라키오스들을 멸종시키기라도 할 기세로, 쉬지 않고 사냥하였다.
“엘, 배리어 좀 걸어 주고! 빡빡이는 저쪽으로 어그로 좀 돌려!”
“코르투스, 브레스!”
“이안, 이쪽으로……! 헤이스트!”
덕분에 처음에는 이안의 강력함에 위축되어 있던 사라와 바네사의 표정도 시간이 갈수록 밝아져만 갔다.
인벤토리에 차곡차곡 쌓이는 트라키오스의 뿔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지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언니, 우리 벌써 뿔 열다섯 개쯤 모은 거 같은데?”
“캬! 정말이네! 열다섯 개면 공헌도가 얼마야? 9천?”
“크으! 이거 둘이 나눠도 한 사람당 4,500이잖아?”
트라키오스가 뿔을 드랍할 확률은 절반 정도였으니, 이안 일행은 이미 서른 마리 정도의 트라키오스를 사냥한 것.
그런데 트라키오스를 한두 마리 정도 더 잡았을 무렵.
밝아지고 있던 두 자매의 표정을 다시 어둡게 만드는, 슬픈(?) 사건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띠링-!
-‘트라키오스’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파티원 ‘이안’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이안’의 레벨이 16이 되었습니다.
“뭐, 뭐라고? 레벨 업?”
“레벨이 16이라고?”
이제야 겨우 심적 안정을 찾은 두 자매의 눈앞에 떠오른, 믿기 힘든 시스템 메시지.
물론 이안의 반응은, 무덤덤하기 그지없었지만 말이다.
“아 이거? 용사 계급 되면, 레벨 업이 가능해지더라고.”
“하아……. 용사 계급?”
“우리 지금 공헌도 아직 5만도 못 모았는데?”
“그러니까 뿔 많이 챙겨 가서 너희도 공헌도 빨리 쌓아.”
“…….”
“파이팅!”
넘치던 쌍둥이 자매의 의욕을 한 순간에 꺾어 버리는, 얄밉기 그지없는 이안의 응원.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쌍둥이 자매는 오랜 시간동안 이안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안이 얄미운 것은 얄미운 것이고, 600씩 차곡차곡 쌓이는 공헌도는 챙겨야 하니 말이었다.
그렇게 거의 한나절이 다 지났을까?
띠링-!
-파티원 ‘이안’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이안’의 레벨이 18이 되었습니다.
설산에는 더 이상 트라키오스의 그림자조차 찾기 힘들어 졌으며, 이안의 레벨은 18레벨까지 상승하였다.
쌍둥이 자매의 인벤토리에 쌓인 뿔은 50개를 훌쩍 넘었고 말이다.
“흐음, 이제 트라키오스 사냥은 슬슬 접을 때가 된 것 같네.”
그리고 어느새 공헌도의 노예가 되어버린 쌍둥이 자매는.
사냥이 이대로 끝날까 봐 불안(?)했는지, 이안을 향해 재빨리 입을 열었다.
“트라키오스는 이쯤 했으면 됐으니, 이번엔 푸카스 잡으러 가는 건 어때, 이안?”
“푸카스?”
“대형 타조같이 생긴 녀석들인데, 걔들도 제법 경험치 많이 줄 거야.”
“근거는?”
“트라키오스의 뿔이 공헌도 600짜리인데, 푸카스의 날개뼈가 공헌도 500짜리였거든.”
“오호?”
“이번에도 우린 날개 뼈만 있으면 돼.”
“맞아. 나머진 다 너 가져도 되니까, 이어서 계속 사냥하는 거 어때?”
이제는 이안이 먼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조공(?)을 바치는 사라와 바네사.
물론 이안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좋아. 이거 자세가 된 친구들이군.”
순조롭게 두 번째 노예계약(?)을 체결한 이안과 쌍둥이 자매는, 곧바로 다음 사냥터를 향해 이동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또 한 번 밤을 샌 결과, 이안은 결국 20레벨의 고지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후우, 이쯤 했으면……. 이제 레벨 업 효율은 충분히 뽑아먹은 것 같네.’
어찌어찌 20레벨까지는 올렸으나, 이제 더 이상 설원의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것으로 레벨 업은 쉽지 않은 듯 보였다.
필요한 경험치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 반해, 획득 가능한 경험치량은 오히려 줄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여 이안은, 이제 ‘때’가 왔음을 느끼고 있었다.
‘좋아, 이제 용사의 의식인지 뭔지……. 도전할 때가 된 것 같아.’
필요한 장비는 일찌감치 맞췄으며, 레벨도 원하는 수준까지 만들었으니, 이제는 다음 단계를 향해 걸음을 옮길 차례.
-접속을 종료합니다.
-플레이 타임 – 42:17:38
오랜만에 게임을 종료한 이안은, 하린과 함께 아침밥을 먹은 뒤 곧바로 침대에 쓰러졌다.
이제 충분히 숙면을 취한 뒤 다시 접속하면 곧바로 의식을 진행하기 위해 용사의 탑으로 향할 것이다.
용사의 의식 뒤에 또 뭐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이제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그야말로 용사의 마을 졸업을 코앞에 남겨 둔 이안은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