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5화 용사의 의식 (1) >
금요일의 요일 전장, ‘용사의 깃발’ 전장이 막을 내렸다.
지금껏 있었던 모든 요일 전장을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차이로 천군이 승리하면서 말이다.
맥시멈 플레이 타임인 3시간 중 고작 2시간 만에 결판이 나 버린 이번 깃발 전장.
때문에 용맹의 깃발 전장을 방영하던 세계 각국의 방송사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금요일 요일 전장 방송 시간으로 거의 4시간을 잡아놨는데 2시간 만에 전투가 끝나 버렸으니, 시간이 너무 많이 비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당황도 잠시.
그들은 4시간도 오히려 짧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2시간 동안의 전장에서 나온 하이라이트 영상을 다시 재생해주고 설명해 주는 것만으로 시간은 훌쩍 훌쩍 지나가 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거의 모든 하이라이트 영상에는 이안의 모습이 등장했다.
마치 순한 양떼를 습격한 한 마리 사나운 늑대처럼, 마군 진영을 헤집고 다니며 몽둥이를 휘둘러 대는 이안의 모습.
그것은 전 세계 카일란 유저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건…… ‘혼모노’다. 사스가 이안……!
-이쯤 되면 이안이 빼박 세계 랭킹 1위인 건 인정해야 되는 부분 아님?
-물론 이안이 대단하긴 하지만, 이번 전장에 진짜 랭커들이 너무 많이 빠져 있었음. 난 아직 랭킹 1위 운운은 성급하다 봄.
-윗님 말씀도 일리가 있음. 선두 그룹 대부분이 메인퀘 한다고 요일 전장 참전도 못 했는데……. 여기서 양학했다고 세계 랭킹 1위 논하는 건 무리가 있을 듯.
-하……. 방송은 보고 말씀들 하는 건지 모르겠네. 혹시 이안이 몇 킬 했는지는 알고 얘기하는 건지? 마계 랭킹 1위 카이가 온다고 저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음?
-글쎄. 이안이 들고 있던 그 사기 템만 쥐여 주면, 카이도 충분히 400킬 가능할 거라 보는데.
-이 친구, 너무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네. 내가 400킬이 얼마나 미친 성적인지 다시 한 번 알려 줄게.
-……?
-이번 깃발전장 러닝 타임 정확히 134분 50초였고, 이안이 올린 킬은 395킬이야. 이안은 전장이 열려 있는 2시간 14분 동안, 분당 거의 3킬을 해낸 미친놈이라고.
-그것도 세계 각국 상위 1퍼센트들만 상대로 말이지.
방송이 진행되는 중에도, 방송이 끝난 이후에도 전 세계 카일란 커뮤니티에서는 이안에 관한 논쟁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논쟁들은 이번 전장에 참전했었다는 한 해외서버 유저의 발언으로 인해 더 크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안이 강했던 이유는 단지 무기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는 대부분 전투병이거나 정예병이었던 반면,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이미 ‘용사’계급을 달고 있었다.
용사 계급이 되기 위해 필요한 공헌도는 10만.
그리고 현재 가장 선두를 달리고 있는 랭커들의 달성 공헌도는 3만을 갓 넘은 수준.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이안이 이미 ‘용사’라는 떡밥은,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건 또 대체 무슨 소리임? 이안이 용사라고?
-헐, 그래서 그렇게 강했던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이안이 착용한 투구랑 망토를 아는데, 그거 정예병 등급 아이템이었어. 이안이 용사 계급이었다면, 뭐라도 용사 템을 끼고 나왔어야 맞겠지.
-그럼 이안이 들고 있던 몽둥이는? 그게 용사 템 아닐까?
-글쎄. 그 몽둥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도, 용사 계급 달고 정예병 템을 한 개라도 착용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용사의 마을에서, 유저의 계급을 겉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아이템뿐이다.
해당 계급이 되어야 착용 가능한 아이템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착용 중인 아이템을 보고 계급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전장에서 이안은 거의 정예병 등급의 장비들을 착용하고 나왔다.
이안으로서는 일반 공격 대미지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한 단계 아래의 장비들을 착용했던 것이지만, 다른 유저들은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안이 용사 계급이었다고 발언한 해외 랭커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시스템 메시지였다.
그는 깃발전장에서 이안의 손에 두 번이나 사망한 마계 진영의 유저였고, 이안에게 피격당한 순간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서 그의 계급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천군 진영의 용사 ‘이안’으로부터, 강력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난전 중인 데다 수없이 많은 메시지들이 지나가던 탓에 전투가 진행되던 중에는 긴가민가하였지만, 전투가 끝나고 시스템 로그를 확인해 보니 명확히 알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어진 다른 마계 유저들의 발언으로 인해 이안이 용사 등급이라는 것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미친……. 혼탁하다, 혼탁해. 이안, 무슨 치트키라도 쓴 거임?
-대체 공헌도 10만은 어떻게 채운거지? 아니, 그전에 그렇게 압도적인 공헌도를 갖고 있는데 어째서 공헌도 랭킹에는 이름이 없는 거야?
-LB사에서 랭킹 차트에 이안만 빼 버린 것 아닐까요?
-??? 대체 왜?
-버그라고 항의 전화 올까 봐…….
-오, 그럴싸하다.
그리고 상황이 이쯤 되자, LB사의 고객 상담실 전화기는 다시 불이 나기 시작했다.
이안이 들고 있던 무기가 버그템이 아니냐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현재 이안의 공헌도와 계급을 공개해달라는 이야기까지.
물론 상담실에서는 ‘모두 정상적인 플레이이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정책상 유저 개인의 정보를 공개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만 반복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한명.
이 논란 속에, 어마어마한 배신감(?)을 느낀 유저가 한 명 있었다.
“하아, 이거 실화? 이안 형이 이미 용사 계급이라고?”
그는 바로, 오늘도 기분 좋게 타워디펜스(?)를 완수하고 공헌도를 쌓은 훈이.
아직도 천군진영의 공헌도 랭킹 1위인 것을 확인하고, 흡족해 하며 게임에서 로그아웃했던 훈이는 카일란 공식 커뮤니티에 도배되다시피 되어 있는 이안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확인하고는,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모니터 앞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한편. 세계적으로 카일란 커뮤니티들이 시끄러운 가운데, 세상 누구보다도 태평한 남자가 한명 있었으니.
“흐음, 이 정도면 연습은 충분히 된 것 같고……. 이제 용사의 의식에 도전할 준비를 한 번 해 볼까?”
그는 바로, 용맹의 깃발 전장을 캐리한 후 유유히 사라진 이안이었다.
“이 정도 영웅 점수면, 용사 템으로 옵션 세팅도 충분히 가능하겠어.”
깃발 전장이 끝난 후 이안에게 남은 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영웅 점수였다.
공헌도을 획득하지 못한 대신 남들은 1천 포인트도 모으기 힘든 영웅 점수를 몇만 단위로 모아 버렸으니, 이것으로 용사 계급의 아이템을 무한 매입하여 필요한 옵션이 뜰 때까지 제작 노가다를 다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예병 계급의 아이템들로 옵션 노가다를 하는 데에 7~8천 정도의 영웅 점수가 깨졌으니, 9만 정도의 영웅점수가 있는 지금, 충분히 용사 계급 아이템으로도 무한 노가다가 가능할 터.
신이 난 이안은, 마을의 각종 장비상점에 들러 무한 쇼핑을 시작하였다.
“아저씨, 여기부터 저기까지. 싹 다 주세요.”
“응? 자네, 이거 다 용사 계급 아이템인 건 알고 하는 말인가?”
“물론이죠.”
“용사 계급 아이템들은, 한 파츠당 거의 영웅 점수 1천 포인트는 필요하다네. 자네가 말한 대로 다 사면 1만 포인트도 넘게 있어야 하는데…….”
“반대편 진열대까지 다 살 거니까. 일단 계산부터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헉……! 아, 알았네.”
-‘황금 깃장 투구’ 아이템을 구입하셨습니다.
-영웅 점수 1,080을 소모하였습니다.
-‘챠우거의 골판 장갑’ 아이템을 구입하셨습니다.
-영웅 점수 950을 소모하였습니다.
-‘천룡비늘 흉갑’ 아이템을 구입하셨습니다.
-영웅점수 1,150을 소모하였습니다.
……후략……
마치 로또를 연속해서 열 번 정도 맞은 벼락부자처럼 상점에 있는 용사 계급 아이템을 싹 다 쓸어 담는 이안!
‘흐흐, 이거 싹 다 분해해서 노가다하면, 내 전설검에 어울리는 장비들로 풀 세팅이 가능하겠지.’
인벤토리가 터져나갈 정도로 아이템을 매입한 이안은, 곧바로 티버의 대장간으로 향하였다.
이제 파밍이 끝났으니, 또다시 노가다의 시간이었다.
“티버, 저 왔습니다.”
“오, 이안! 그렇지 않아도 방금, 자네의 소식을 들었다네.”
“제 소식이요? 어떤 소식인데요?”
“어떤 소식이긴. 방금 세이카림 장군께서 자네의 활약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가셨어.”
“오호, 그래요……?”
“내가 만들어 준 ‘이안의 검’의 성능이 괜찮았나 보지?”
“물론이죠. 이거, 역시 전설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물건이었어요.”
“크, 자네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엄청 뿌듯하구먼.”
티버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이안은, 항상 전세 놓은 듯 쓰던 구석의 모루에 다가가 인벤토리를 풀어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구경하던 티버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자네, 대체 또 뭘 만들려고 그러는 겐가?”
“티버 님이 만들어 주신 검에 어울리는 장비들을 만들고 싶어서요.”
“오호?”
“이런 멋진 검을 들고 전투를 해 보니, 지금까지 제가 갖고 있던 장비들이 너무 비루해 보이더라구요.”
“크하핫! 자네는 역시, 내 실력을 알아봐 주는군.”
여느때처럼 능숙하게 이어지는 이안의 아부에,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진 티버.
그런 티버를, 이안은 더욱 집요하게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티버.”
“음?”
“혹시 절 좀 도와주실 생각 없습니까?”
“도와달라?”
“아무래도 제 실력만으로는, 티버가 만들어 주신 검에 어울리는 장비들을 만들어 낼 수 없을 것 같거든요.”
“허허, 이 사람이 겸손은……. 자네의 망치질 실력도 이제 충분히 수준급이라네.”
“아닙니다, 티버. 아직 제 실력은 티버의 발끝도 따라가기 힘들죠.”
이안의 계속된 아부에, 양쪽 입꼬리가 아예 귀에 걸려 버린 티버!
그리고 이안의 마지막 한 방에, 결국 티버는 넘어가고야 말았다.
“부탁드립니다, 티버. 티버라면 전설의 검 뿐 아니라 전설의 갑주도 완성하실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전설의 갑주! 그래, 그런 물건을 만들려면, 확실히 내 도움이 필요하기는 하겠지.”
그렇지 않아도 이안이 가지고 온 수많은 장비들에 흥미가 동했던 티버는, 결국 대장간의 문을 걸어 잠그고 말았다.
함께 전설의 갑주를 만들어 보자는 이안의 떡밥을 덥썩 물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안의 무한 노가다 열차에 탑승한 티버는 밤새 망치질을 멈출 수 없었다.
딱히 이안이 강제한 것은 아니지만, 망치질을 멈추지 않는 이안을 보며 경쟁심이 발동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후읍! 자, 어떤가, 이안. 이 정도면 정말 대단한 성능을 가진 갑주가 탄생한 것 같군.”
“역시 티버! 그럼 이제 건틀릿을 만들어 보도록 하죠.”
“허억, 허억! 이 정도면 건틀릿도 완성된 것 같네.”
“좋습니다! 그럼 이제 부츠를……!”
그렇게 티버와 함께 밤새 노가다하여, 결국 모든 부위에 자신이 원하는 옵션을 만들어 낸 이안이었다.
“크으, 훌륭하군. 영웅 점수 9만을 싹 다 녹인 보람이 있어.”
어느새 모루에 엎드린 채 잠에 빠진 티버를 뒤로한 채, 모든 장비를 착용한 이안은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이제 원하는 수준의 장비를 전부 맞췄으니 ‘용사의 의식’에 도전하기 위한 첫 번째 준비가 끝난 것.
이안은 두 번째 준비를 위해 ‘차원의 숲’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