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1화 죽창의 전설 (3) >
* * *
순식간에 마군 진영 유저 열 명을 처치해 버린 이안.
이것은 이안의 전투력이 뛰어났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완벽한 설계의 결과물에 더 가까웠다.
‘흐흐, 역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방금 이안의 손에 처치당한 열 명의 랭커들과 마찬가지로 이안 또한 공헌도 일이백에 목숨을 걸던 시절이 있었다.
당장 지난주만 하더라도 이안에게 1천이라는 공헌도는 어마어마한 수준이 아니었던가.
때문에 이안은 이 깃발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미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들어가지 않고 기다렸던 건 정말 신의 한수였어.’
정찰대장 카르고를 처치한 이안은, 깃발 포인트 근처에 숨어서 때를 기다렸었다.
깃발을 설치하는 마군 유저들의 진척도가 절반 이상으로 올라갈 때까지 일부러 기다려 준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깃발 설치를 쉽게 그만둘 수 없을 것이고, 이안의 공격에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을 테니 그 완벽한 타이밍을 노린 것이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더한 욕심쟁이들이었어. 옆에서 동료가 죽어나가는 데도 깃발을 놓지 않을 줄은 몰랐지.”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깃발 포인트 주변에 쓰러져 있는 마군 유저들을 한 번씩 응시하였다.
그리고는 검병을 쥔 손을 쥐락펴락하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모든 상황이 완벽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면 너무 이지한데…….”
애당초 이안이 이 전장에 들어온 이유는 새로운 전투 방식에 더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다.
쉽게 말해 용사의 의식에 도전하기 전 ‘연습’하기 위해 전장에 참가한 것인데, 이대로는 연습이 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지. 조금 위험해도, 좀 더 과감히 움직여야겠어.’
원래 이안은, 아예 이 H거점에 자리를 잡고 계속 마군 유저들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깃발 포인트라는 강력한 미끼를 이용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난이도가 너무 낮은(?) 관계로, 계획을 좀 수정하기로 하였다.
‘싸우다 죽더라도 할 수 없지. 플랜B로 바꿔야겠어.’
계획을 정리한 이안은, 지체 없이 H거점을 빠져나왔다.
마군들 중 누군가 와서 이 거점을 쉽게 점령해 버린다고 해도, 전혀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안이 계속해서 날뛰다 보면, 천군 진영이 지려야 질 수가 없는 판이 되어 버릴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자만이 아닌, ‘자신감’이었다.
* * *
첫 번째 플랜에서 오버슈팅이랄 수 있는 결과를 달성한 이안.
그가 거점을 벗어나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메인 거점이었다.
현재 마군 진영이 공략중인 메인 거점의 바로 다음 순서에 위치한, ‘N’거점으로 향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안의 목적지를 깨달은 캐스터 하인스를 비롯한 시청자들은,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상식선상에서 보기에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으니 말이다.
-아, 지금 이안이 타고 있는 루트로 봐선, 분명 ‘N’거점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정말 이안의 머릿속에 한번 들어갔다 나와 보고 싶은 심정이군요!
여기서 잠깐 전장의 구조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깃발 전장에는 A~T까지 총 스무 곳의 거점이 존재한다.
그중 뒤 순번의 알파벳인 K~T까지가 메인 거점을 지칭하는 알파벳이었다.
그리고 이 알파벳의 개념이란, 무척이나 단순했다.
알파벳의 숫자가 뒤 번호일수록 거점의 레벨이 높은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높은 레벨을 가진 거점일수록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때문에 더 복잡한 요새와 강력한 중립 몬스터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안이 홀로 점령한 거점인 H거점의 가치는, 생각보다 높은 것이었다.
서브 거점 중에는 ‘I’와 ‘J’, 두 곳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닌 곳이 바로 H거점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솔로 플레이로 손쉽게 H거점을 점령한 이안이 N거점으로 향하는 것을, 나지찬을 비롯한 시청자들은 어째서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서브 거점과 메인 거점의 태생적인 차이에 있었다.
서브 거점 중 가장 높은 레벨의 거점인 J거점도 바로 그 다음 알파벳인 K거점이 지닌 가치의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첫 번째 메인 거점인 K거점부터는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따라서 K보다 세 단계나 더 높은 ‘N’거점에 홀로 들어간다는 것은, 이안의 실력을 떠나 자살행위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건 아니야 이안갓. 아무리 이안갓이라고 해도 혼자 메인 거점을 먹으려는 건 무리수라고.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아무리 컨트롤이 좋아도 다굴에는 장사 없는 법인데…….
-에이, 그래도 이안갓이라면 무슨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방법은 무슨 방법. N거점이면 요새 위에서 밀랍궁수만 수백이 넘게 지키고 있을 텐데, 죽창이 아무리 강력해도 찌를 기회조차 없을걸.
심지어 이안의 추종자들이 대부분인 한국 서버의 시청자 채팅방에도 무리수라는 의견이 절반에 달할 정도였으니, 이안의 행보가 얼마나 무모해 보이는지 알 수 있었다.
-자, 이안이 정말 N거점의 근처까지 움직여 왔습니다. 이안은 정말 이대로 거점에 쳐들어갈까요?
-어렵네요, 하인스 님. 만약 이안이 저희가 모르는 엄청난 수를 가지고 있어서 거점을 점령한다 해도, 금방 마군 진영의 대군이 이곳에 당도할 겁니다.
-그렇죠. 방금 전에 대략적인 상황을 확인한 바로는, 이미 L거점이 거의 점령된 상황이었거든요!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기대가 되는 이유는 왜일까요.
-하하, 그거야 오늘 이안갓이 보여 준 장면 중에, 정상적인 상황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지만 상황이 기이(?)할수록, 반대로 시청자들의 기대는 더욱 커져만 갔다.
상황이 무모해 보일수록 이안이 보여 줄 행보에 대한 기대치는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잠시 후, 이안이 N거점의 구역을 밟기 바로 직전.
YTBC의 방송실에는 일시적으로 정적이 흘렀으며, 수천 명이 들어차 있는 채팅창도 일시적으로 동결됐다.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모두가 이안의 행보에 집중한 것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엇……!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인스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N거점의 구역에 진입하기 직전, 이안이 돌발적인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 * *
-‘비어 있는 벙커’에 입장하셨습니다.
-건축물 특성 ‘은폐’가 발동합니다.
-지금부터 최대 15분 동안, 벙커가 클로킹Cloaking 상태에 돌입합니다.
-벙커 내에서 적을 공격하거나 벙커 밖으로 이동할 시, 클로킹 상태는 자동으로 해제됩니다.
-적이 디텍팅 계열의 마법을 사용할 시 클로킹 상태가 즉시 해제됩니다.
마치 중립 지역과 중립 몬스터가 존재하는 것처럼 깃발전장의 곳곳에는 특별한 중립 건축물이 존재했다.
천군 진영이건 마군 진영이건 관계없이 필요에 따라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구조물이 있는 것이다.
전장의 넓은 구역을 관찰할 수 있는 구조물인 ‘망루’나, 생명력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 ‘회복의 샘’.
그리고 지금 이안이 몸을 숨긴 ‘비어있는 벙커’ 같은 곳이 바로 그런 중립 구조물이었는데.
이러한 구조물들은 거점의 범위 안에만 존재한다.
여기서 거점의 범위 안이란, 거점을 지키는 요새 안쪽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의 일정범위까지를 이야기하는 것.
그런데 재밌는 것은 지금 이안의 상황이었다.
이안은 분명 N구역의 거점 안에 있는 벙커에 들어와 있었는데, 구역을 지키는 중립몬스터들과 적대상태가 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크, 역시 되네. 지난 전투에서 봤던 게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중립 거점의 몬스터들은, 유저가 해당 거점의 범위 내에 들어서는 순간 그를 적대자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 판정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째, 거점의 땅을 밟거나.
둘째, 거점을 지키는 방어군의 시야에 발견되거나.
이 둘 중 하나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거점의 범위 안에 들어왔다고 인식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안은 그 두 가지 조건을 전부 피했기에, 몬스터들과 적대되지 않은 상태로 거점 내에 있는 벙커에 들어올 수 있었다.
‘중립 구조물의 영역은 역시 거점의 땅으로 인식되지 않는군.’
이안이 이 두 가지 조건을 피한 방법은 간단했다.
N거점의 망루에 있는 ‘차원의 밀랍 병사’가 시선을 돌린 틈을 타 까망이의 ‘어둠의 날개’ 고유 능력을 시전하였고, 허공에 뜬 채로 순식간에 가까운 벙커까지 접근한 뒤 그 안으로 쏙 하고 들어간 것이다.
정말 찰나지간에 기민하게 움직여 밀랍파수꾼의 시야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어차피 벙커의 바깥으로 나가면 바로 적대상태가 될 텐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이것은 이안이 세운 플랜 B의 핵심이 되는 전략이었다.
이안은 바로 이 자리에서, 중립 진영과 마군 진영의 전투가 시작되기를 기다릴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중립몬스터들의 어그로가 전부 마군 놈들에게 집중되면, 그때 여길 나서면 되겠지.’
중립 몬스터들의 입장에서는 이안도 적이고 마군들도 적이다.
때문에 먼저 타깃팅한 대상을 우선적으로 공격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안은 그 타이밍을 노리는 것이다.
‘난전 속에서 전투를 벌이면, 컨트롤 숙련도를 올리긴 최상의 환경일 거야. 어그로를 분산시켰으니 허무하게 죽을 일은 없을 테고……. 한계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기 딱 좋은 상황이 만들어지겠지.’
벙커 안에 자리 잡은 이안은 본격적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아무리 어그로가 분산되어있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대다수의 마군 유저들은 작정하고 이안을 노릴 터.
이안은 ‘중립 몬스터’라는 아군 아닌 아군을 등에 업고, 마군 진영과 신명나게 싸워 볼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안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번 전투는, 최근 들어 이안이 해 왔던 전투 중 가장 난이도 높은 전투가 될 것임을 말이다.
* * *
와아아-!
둥- 둥- 둥-.
우렁찬 전고 소리가 전장의 하늘에 울려 퍼진다.
순식간에 첫 번째 거점을 점령한 마군진영의 기세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전장에 장엄히 울려 퍼지는 우렁찬 북소리.
마군 진영의 장수 ‘켈타’는,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제군들은 듣거라!”
“명을 받듭니다!”
“우리 마군 진영은, 이 기세를 몰아 다음 거점을 곧바로 점령할 것이다!”
“와아아!”
“후퇴는 없다. 오로지 직진만이 있을 뿐! 우리의 힘이라면, 야비한 천군 진영의 계략을 정면으로 박살 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천군 진영에 원인불명(?)으로 선취점을 내주기는 하였지만, 켈타가 생각하기에 지금 마군의 기세는 분명 대단하였다.
지금까지 여러 번 깃발 전장에 참전한 그였지만, 이렇게 빨리 첫 번째 거점을 점령해 낸 것은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서브거점 하나 잃은 것 따위로 승기를 빼앗았다 생각하면 큰 오산이지. 메인거점에서 우위를 점하는 게 훨씬 중요하니 말이야.’
첫 번째 메인 거점을 점령하여 자신감을 되찾은 켈타는, 능숙하게 진영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하였다.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릇 병사들의 사기.
병사들의 기세가 꺾이기 전에 폭풍처럼 몰아치는 것이 그의 전략 아닌 전략이었다.
아직 남쪽 서브거점으로 보낸 정찰대가 돌아오진 않았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북쪽에 점령된 거점이 없다는 것은, 분명 남측 서브거점 하나를 천군 진영에서 먹었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리고 마군 진영이 향하는 N거점의 위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마군 진영의 병력들은 금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방패병 앞으로!”
척- 처처척-!
켈타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마군 진영의 병사들.
그들 중에는 유저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대부분 NPC 못지않게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고 있었다.
이안과 같은 변종이 아닌 다음에야, 이 깃발 전장에서 장군의 명령은 거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거점의 영토를 밟으면, 놈들은 분명 요새 바깥으로 기어 나올 것이다. 그때를 기다려 전면전을 벌인다!”
N거점의 범위까지 쉬지 않고 진격하여 들어온 마군의 병사들은, 방패병을 앞세운 채 자리에 일제히 멈춰 진형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켈타의 말처럼, 거점 요새의 성문이 일제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두두- 두두두두-!
이어서 성문을 열고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차원의 밀랍병사들.
그것을 확인한 켈타는 자신의 검을 뽑아 들어 번쩍 치켜 올렸다.
그리고 이어서, 전방을 향해 검을 힘껏 뻗어 내었다.
“전구운, 돌격!”
“와아아아!”
어지간한 국가 간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대규모로 맞붙기 시작하는 마군 진영과 중립 진영의 병사들.
그러나 처음 팽팽해 보였던 양 진영 간의 균형은, 조금씩 조금씩 마군 진영의 우세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애초에 전력 자체가 마군이 강한 것도 있지만, 켈타의 지휘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후후, 좋아! 이대로 방어선을 뚫고 요새를 점령하라!”
새빨간 익룡의 등에 올라탄 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는 켈타.
그런데 잠시 후.
“음……?”
뭔가를 발견한 켈타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