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0화 죽창의 전설 (2) >
* * *
-친구들, 혹시 죽창 메타라고…… 들어는 봤나?
“그게 무슨……?”
-너도 한 방, 너도 또 한 방.
“……?”
-죽창 앞엔 만인이 평등하지.
“그거 뭔가 이상한데……?”
-아 물론, 난 빼고 평등하단 말이야.
고오오오-!
어둠 속에서 흘러나오는, 실체 없는 의문의 목소리.
‘죽창 메타(?)’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꺼내는 괴인의 목소리에, 정찰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단 한 사람.
마틴을 제외하고 말이다.
‘미, 미친. 이거, 이안 목소리잖아?’
요새 안에 갇힌 다른 랭커들과 달리 마틴은 이안을 아주 잘 안다.
같은 한국 서버의 유저이기에 앞서 그는 이안과 제법 오랜 기간 싸워 왔기 때문이었다.
마족으로 종족 변경을 하기 전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0그가 속한 길드는 항상 로터스와 대립하는 길드였으니 말이다.
때문에 사실상 이안의 목소리는 그에게 악몽과도 같았다.
‘아, 젠장, 엿 됐다.’
마틴이 아는 이안은 강력하다.
물론 랭커 열 명이서 상대하지 못할 정도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문제는 상황이었다.
이안은 절대로 지는 싸움을 걸어오지 않는 인물이었고, 지금 그들은 이안이 깔아 놓은 판 안에 들어와 있었으니, 이는 무척이나 암울한 상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방어력이 백이건 오백이건 천이건 상관없지.
“……?”
-죽창 앞에선 모두 공평하게 한 방이니 말이야.
“그게 무슨…….”
이어지는 이안의 죽창 예찬론 속에 랭커 중 하나가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지금 이 안에 있는 열 명의 랭커들 중 마틴을 제외한 다른 랭커들은 이안의 목소리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야 급작스레 문이 닫혀 당황했지만, 이제는 시야 한쪽 구석에 떠 있는 요새의 상황판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점 H
소속 진영 : 천군
요새 등급 : D-
방어 타워 : 0
방어 병력 : 1
상황판에 떡하니 떠올라 있는, 방어 타워의 숫자와 방어병력의 숫자.
때문에 마군 진영의 랭커들은 여유롭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이안을 찾아 두리번거릴 수 있었다.
“어디 있나, 친구. 겁쟁이같이 숨어 있지 말고 얼른 나와 보라고. 그 죽창이라는 거, 구경 좀 시켜 달란 말이지.”
랭커 중 하나가 이죽거리며 어둠 속을 향해 소리친다.
지금 랭커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대열을 지켜야 하기 때문.
그것이 아니었다면 이미 이안을 찾기 위해 요새 안쪽으로 흩어졌으리라.
-후후, 죽창이 무섭지 않다면, 날 한번 찾아보는 것도 괜찮겠지.
계속되는 이안의 이죽거림에, 랭커들의 인내심이 드디어 한계에 도달했다.
“대장, 얼른 명령을 내려주십쇼.”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대장. 얼른 놈을 찾아 처치하고 깃발을 꽂아야 합니다.”
그리고 대원들의 이야기에, 대장 카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함정 비슷한 냄새가 나기는 했으나 결국 적은 한명이었으니 정찰대장인 그의 입장에서도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정찰대원들은 전부 요새 안쪽으로 이동하도록. 일부는 녀석을 찾고, 일부는 깃발 포인트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랭커들은 기다렸다는 듯 요새 안쪽으로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명령이 떨어진 순간 이 요새 안에서만큼은 대열이 프리해 졌고, 다들 깃발을 꼽을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버린 것이다.
마틴을 제외한 모든 랭커들의 생각은 모두 동일했다.
‘어차피 적은, 정신병자 같은 놈 하나뿐이야. 깃발 꼽다가 놈이 나타나면, 그때 처치하면 그만이지.’
‘만약 습격당한다고 해도 우린 열이고 놈은 하나야. 저놈 말처럼 한방에 죽을 것도 아니고, 그때 가서 대응하면 돼.’
그리고 모두가 깃발 포인트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도, 카르고 또한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깃발을 꼽기 시작하면 숨어 있던 녀석이 나타날 수밖에 없을 테니.
놈을 찾아 헤매는 것보다 나타났을 때 처치하는 것이, 오히려 더 효율적이라 판단한 것이다.
‘후후, 어리석은 녀석. 시간을 끌려고 이런 짓을 벌인 것 같은데, 아쉽게도 그 장단에 놀아나 줄 생각이 없구나.’
심리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원들의 뒤를 따르는 카르고.
하지만 그 흡족한 표정이 까맣게 타 버리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우웅- 푸욱-!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검이, 그의 등짝에 틀어박혔기 때문이었다.
-천군 진영의 용사 ‘이안’으로부터 강력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생명력이 24,974만큼 감소합니다!
-생명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앞으로 5분 동안 전장에서 이탈합니다.
마군 진영의 정찰대장 카르고는 그렇게 아무 소리조차 내 보지 못한 채 전장에서 아웃되어 버리고 말았다.
* * *
“크, 너도 한 방. 너도 또 한 방!”
“……팀장님, 지금 감탄하실 때예요?”
“감탄해야 할 때가 따로 있는 건 아니잖아, 김 주임.”
“…….”
“저 대사, 너무 멋지지 않아?”
“별로요.”
“너도 한 방, 너도 또 한 방! 모두에게 공평한 이안의 죽창!”
“후우……. 우리 팀장님께서 드디어 실성하신 게 분명해.”
모니터링실에서 이안의 개인 영상을 지켜보던 기획 3팀의 나 팀장과 김 주임.
그들은 사실 콘텐츠 파괴자 이안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모니터링실에 내려와 있었던 것이지만, 어느새 이안의 활약을 관전하는 관전 모드가 되어 있었다.
처음엔 한숨만 푹푹 쉬던 김 주임도, 결국 나지찬에 동화되어 버린 것이다.
“와, 방금 어떻게 된 거죠, 팀장님?”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라이가 어둠 잠식 발동시켜서 순식간에 마군 녀석의 뒤로 접근한 다음, 이안이 공간 왜곡 써서 위치 바꿔 버린 거지.”
“아…….”
“놀라운 건, 위치를 바꾸기 전에 이미 평타 캐스팅이 시작되고 있었단 거야.”
“헐, 그게 가능해요?”
“나도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가능하네.”
“…….”
“저렇게 당하면 진짜, 왜 죽었는지도 모르겠어.”
“크, 역시 이안 갓!”
무려 용사 계급의 마군 NPC를 한 방에 보내 버리는 이안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두 사람.
특히 나지찬은 아예 기획자의 본분을 잊기라도 한 듯, 순수하게 이안의 플레이에 감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된 이유가 정말 나지찬이 기획자의 본분을 잊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지찬의 표정이 편안한 것은, 그 반대의 이유에서였다.
‘캬, 이 시점에 벌써 용사의 마을 졸업 각이 보이다니. 역시 이안은 이안이야.’
분명히 이안은 용사의 마을 밸런스를 마구잡이로 파괴하는 중이었다.
현 시점에서 나지찬이 보기에, 이안의 전투력은 다른 랭커들의 두세 배는 되는 듯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지금 이곳이 ‘용사의 마을’이라는 부분이었다.
‘차라리 잘됐어. 괴물 같은 이안만 빨리 졸업시켜 버리면, 용사의 협곡 밸런스는 다시 맞출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용사의 마을에서의 강력함은, 결국 용사의 마을 안에서 한정된다.
물론 용사의 마을에서 거둔 성적이 졸업 이후까지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그게 지금처럼 밸런스가 붕괴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용사의 마을에서 얻은 아이템들은 결국 협곡 바깥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으니, 이안이 들고 있는 저 죽창(?)이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소용없는 것.
이안에게 용사의 마을 아이템을 가지고 나갈 수 있게 해 주는 ‘빛나는 차원의 마력석’이라는 아이템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을 사용하더라도 전설의 무기는 가지고 나갈 수 없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을 저 핵몽둥이에 사용할 기회는 없을 것이었다.
애초에 ‘전설의 무기’라는 콘셉트가 차원의 거인을 처치하기 위해 존재하는 아이템이었고, 차원의 거인을 처치하고 나면 스토리상 천군의 진영에 ‘귀속’될 예정이었으니까.
‘뭐, 천룡군장 세트 정도는 들고 나가겠지만……. 그건 적어도 밸붕템 수준은 아니니까.’
앞으로 이어질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그리던 나지찬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만약 이안이 저 핵몽둥이를 용사의 마을 밖으로 들고나간다고 생각하면, 그것보다 아찔한 경우의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자, 이안. 더욱 신나게 날뛰어 줘. 네가 1초라도 빨리 용사의 마을에서 나갔으면 좋겠으니까 말이야.’
나지찬은 정말 진심으로, 이안신을 향해 기도했다.
선량한 용사들을 괴롭히는(?) 외래종이, 어서 빨리 아름다운 협곡을 나갔으면 하는 바램으로 말이다.
* * *
사람은 누구나 ‘이성’을 가지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것은 감정에 지배당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H거점에 들어온 마군 랭커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성은 분명 아니라고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전부 깃발 거점에 모여 있었다.
정찰대장인 카르고가 갑작스레 ‘의문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옹기종기 깃발에 모여 깃발 설치 작업에 한창인 것이다.
심지어 ‘깃발 파수꾼’ 버프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설치하는 데 거의 5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리건만, 한두 명도 아니고 열 명 모두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깃발을 설치 중인 것이다.
‘침착하자, 마틴. 공헌도가 무려 1천이 넘어. 분명 이안이 습격해 오겠지만, 나만 아니면 돼.’
정예병 기준 중립 지역 깃발 설치의 공헌도가 360이었고, 적 진영 깃발 설치는 그 세 배인 1,080의 공헌도를 준다.
그리고 1천이라는 공헌도는, 깃발 전장에서 어지간히 활약해도 얻기 힘든 수준의 공헌도인 것.
중립 지역이야 유저가 깃발을 꽂는 경우도 제법 있었지만, 적진에 깃발을 꽂는 것은 보통 양 진영의 장군이었으니.
분명 정찰대에게는 신이 내린 기회가 온 것이었다.
때문에 이안을 여러 번 경험한 마틴조차도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깃발을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우우웅-!
-천군 진영의 거점, H거점의 깃발 포인트에 깃발을 설치합니다.
-현재 진척도 : 27.35퍼센트
-깃발을 설치하는 동안,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자리에서 움직일 시 깃발 설치가 중지되며, 진척도가 10퍼센트만큼 감소합니다.)
-현재 진척도 : 27.95퍼센트
-현재 진척도 : 28.22퍼센트
……후략……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는 진척도를 보며, 마틴은 기도했다.
‘오, 제발……! 죽어도 좋으니까, 공헌도는 먹고 죽게 해주옵소서!’
만약 이안에게 죽어서 5분간 아웃된다 하더라도 1천이라는 어마어마한 공헌도만 획득할 수 있다면, 마틴은 정말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진척도가 절만을 뚫고 60퍼센트를 넘기 시작할 때 까지 이안이 나타나지 않자, 마틴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행복회로는 더욱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현재 진척도 : 59.25퍼센트
-현재 진척도 : 64.77퍼센트
……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직까지 이안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 상관없었다.
지금 마틴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깃발 공헌도뿐!
심지어 마틴은, 이안이 나타나서 다른 경쟁자(?)들을 처단해 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래, 이안갓이랑은 나름 미운정도 쌓였고, 그래도 한국 유저인 나를 가장 나중에 공격하지 않을까?’
행복회로를 넘어 판타지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마틴의 뛰어난 상상력!
그리고 마틴의 진척도가 70퍼센트를 넘을 즈음, 드디어 깃발 포인트에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크허억!”
-정찰대원, ‘필립스’ 유저가 사망하였습니다!
“허윽!”
-정찰대원, ‘리하윈’ 유저가 사망하였습니다!
“끄으윽…….”
-정찰대원, ‘바스’ 유저가…….
죽창(?)에 당한 동료들이 하나둘 사망하기 시작했지만, 마틴은 단 한 차례도 깃발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이제 와서 손을 떼기엔, 너무 먼 길을 와 버렸으니 말이었다.
‘딱 30초! 30초만 있으면……!’
깃발에서 손을 떼는 순간 90퍼센트에 가까워 가는 진척도가 10퍼센트 차감될 터.
게다가 이안을 상대로 이길 자신도 없었으니, 뒤돌아 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 이안이랑 협상을 하는 거야. 깃발이 설치되고 나서 날 죽이면. 녀석이 바로 깃발을 설치해서 공헌도를 한 번 더 먹을 수 있을 테니. 거부할 이유가 없겠지.’
나름대로 잔머리까지 굴려 완벽한 계획을 짠 마틴은 이안의 눈치를 보며 계속해서 깃발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안의 검이 그를 향하기 직전.
마틴은 깃발에서 손을 떼고 이안과의 협상을 시작하였다.
어차피 남아 있는 경쟁자도 없었으니 10퍼센트의 진척도가 떨어진다 해서 문제될 것도 없었다.
“자, 잠깐. 이안. 검 좀 내려놓고 내 말을 들어 보라고.”
그리고 마틴의 얼굴을 확인한 이안은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그 또한 마틴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호, 이게 누구신가. 호왕 길드의 마틴 님 아니신가.”
이어서 마틴은 이안에게 생각해 두었던 딜을 시작하였다.
이안으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 우리 다 같이 윈윈이잖아, 안 그래?”
“흐음.”
“아니지. 결국 가장 이득 보는 건 너 아니겠어? 킬 포인트는 킬 포인트대로 올리고, 공헌도는 공헌도대로 가져가고.”
말을 마친 마틴은, 이안이 넘어왔다고 확신하였다.
자신이 여기서 그냥 죽는다면 이안은 깃발 공헌도를 가져갈 기회가 없을 테니.
분명 깃발을 다 설치할 때까지 기다려 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마틴이 생각하지 못한, 하나의 변수가 있었다.
“그럴싸한 딜이었다, 마틴.”
“……?”
“하지만 아쉽게도…… 협상은 결렬이야.”
말을 마친 이안은 그대로 마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안의 행동에 마틴은 반응조차 해 보지 못한 채 죽창에 몸을 내어주고 말았다.
“커헉……!”
-천군 진영의 용사 ‘이안’으로부터 강력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생명력이 25,435만큼 감소합니다!
-생명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앞으로 5분 동안, 전장에서 이탈합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부릅뜬 채 까맣게 변해 가는 마틴의 얼굴.
그런 그를 향해 이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한마디를 던졌다.
“난, 공헌도에 별로 관심이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