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9화 죽창의 전설 (1) >
‘용맹의 깃발’ 전장을 이끌고 있는, 마군 진영의 장수 ‘켈타’.
그는 지금, 무척이나 당황한 상태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타이밍에, 천군진영에 선수를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이제 막 전투가 시작되는 타이밍에 중립 거점 하나를 선점 당했으니, 전장을 이끄는 장수로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야비한 천군 놈들……! 편법을 쓴 게 분명해.’
켈타는 천군 진영에서, 전술을 바꾼 것이라고 판단했다.
원래대로라면 메인 거점을 먼저 하나씩 점령하는 게 정석이지만, 북쪽이나 남쪽의 서브 거점을 먼저 공략한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메인 거점에 비해 서브 거점의 중립 몬스터가 훨씬 더 소규모였으니, 이렇게 빨리 거점을 점령했다면 그것밖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한 것.
물론 그렇다고 가정해도 너무 빠른 시점의 거점 점령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예 주력 병력을 전부 다 이끌고 서브 거점을 점령한 걸까? 그렇게 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컸을 텐데.’
공략이 단순한 편인 첫 번째 메인 거점을 공격하는 와중에도, 켈타의 머릿속은 적잖이 복잡해졌다.
전장이 열리자마자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 발생하였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힘든 것이다.
‘일단 정찰대라도 보내서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야겠어. 놈들이 어딜 먹었는지 확인이라도 해야, 이쪽도 전략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생각을 정리한 켈타는, 그의 친위대 중 두 명을 불러 명령했다.
“카르고, 마르칸.”
“예, 장군님!”
“하명하십시오!”
“너희 둘에게 각각 한 개 소대를 맡기겠다. 마르칸은 북쪽으로, 카르고는 남쪽으로 움직이도록.”
“명을 받듭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장군!”
두 부하의 힘찬 대답에 흡족한 표정이 된 켈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거점을 공격할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너희들의 임무는 정찰.”
“옙!”
“천군진영에서 점령한 거점이 어느 지점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존명……!”
* * *
카일란의 콘텐츠는 다양하다.
그리고 그 다양한 콘텐츠들은 그에 걸맞게 정말 많은 볼거리들을 제공한다.
각종 퀘스트들부터 시작해서 PVP, 길드전, 나아가 생산 클래스들의 제작 방송까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수많은 카일란의 팬들이 항상 목말라하는 콘텐츠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최상위권의 랭커들이 진행하고 있는 신규 콘텐츠들.
사람들이 그것에 목마른 이유는 간단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랭커들은 자신이 진행 중인 퀘스트들을 공개하고 싶지 않아 했고, 때문에 방송에 공개되는 내용은 한정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용사의 마을 ‘요일 전장’은 이러한 팬들의 니즈를 아주 잘 충족시켜 주는 콘텐츠라 할 수 있었다.
매주 수, 금, 일요일에 진행되는 이 요일 전장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시청자들에게 낱낱이 공개된다.
애초에 공개할 때부터 LB사에서 ‘방송’을 전제로 개발한 콘텐츠라고 공표하였으니, 요일 전장에 참여하는 모든 유저들은 참여하는 순간 자신이 방송에 등장할 수 있음을 동의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게임 방송 관계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팬들이 이 요일 전장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인기를 방증하기라도 하듯 오늘, 명실공이 한국 최고의 랭커 이안이 등장하는 금요일의 전장은 수백만에 육박하는 한국 유저들이 라이브 방송을 시청하는 중이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인가요, 여러분! 이안이 오늘, 수많은 팬 여러분들을 위해 희생이라도 하려는 건가요?!
-하인스 님, 희생이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지금 이안이 대열을 이탈해서 아예 솔로 윙을 하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저러면 공헌도는 하나도 먹을 수가 없어요.
-아, 그러고 보니……!
-이안은 혼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일까요?
방송이 시작되자마자 돌발행동을 벌이기 시작하는 이안 때문에, 처음부터 시청자들의 분위기는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캬, 이래서 이안갓이지. 영상이란 영상을 다 찾아봐도, 무슨 짓을 할지 예측이 안 된단 말이야.
-님들, 이안은 아예 공헌도를 포기한 걸까요? 아까 보니까 랭킹 목록에서도 사라졌더라고요.
-헐, 엊그제 내가 확인했을 때만 해도 이안갓이 랭킹 2위였는데 갑자기 랭킹에서 사라지다니요?
-아마 퀘스트 진행 중에 뭔가 실수를 해서, 공헌도를 다 날려먹은 거 아닐까요? 그래서 아예 공헌도 자체를 포기하고, 요일 전장에 들어와서 저렇게 깽판치고 있는 거고요.
-헉. 우리 이안느님이 세계 랭킹 1위 하셔야되는데……. 윗님 말이 정말이면 좀 슬퍼질 거 같은데요.
-하아, 윗분들. 신앙심이 부족하시네. 우리 이안갓에 대한 믿음이 이렇게 부족해서야.
-……?
-우린 그냥 갓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에 믿음으로 보답해 드리면 되는 겁니다.
-이렐루야…….
-그냥 믿으세요. 그리고 이제 이안갓께서 뭘 또 보여 주시려는 건지 경건한 마음으로 지켜보십시오.
-크으, 역시……! 제 믿음이 부족했군요.
그리고 대열을 이탈한 이안이 중립 거점 몬스터들의 뚝배기를 부수기 시작했을 때, 라이브로 시청하고 있던 팬들은 말 그대로 폭주하기 시작하였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안의 검에서 터져 나오는 파괴력에 열광한 것이다.
특히 거점의 차원 골렘을 부숴 버렸을 땐 시청률이 천정을 뚫고 올라갔을 정도였다.
-지금 내가 뭘 잘못 본 거 같은데……. 방금 칼질 세 방에 골렘 터진 거, 실화인가요?
-미……친. 저거 대체 무슨 칼임? 이안, 어디서 엑스칼리버라도 뽑아 온 각임?
-님들, 어딜 봐서 저게 검인가요. 저건 그냥 몽둥이 같은데.
-키야……! 몽둥이건 검이건, 나는 지려 버렸다!
-혹시 이안 공헌도 랭킹에서 사라진 게 공헌도 팔아서 저 검 뽑아 온 건 아닐까요?
-오, 그럴싸하다!
-공헌도 몇만 썼다고 가정해도, 저런 핵 몽둥이 정도면 바꿀 만한 거 같은데요.
-ㅇㅈ합니다.
-맞음. 저런 검 하나 들면, 공헌도 몇만 쯤은 내가 해도 순식간에 모을 수 있겠다.
-그건 아닌 듯.
수많은 팬들의 기대에 걸맞게, 아니, 그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활약을 처음부터 보여 주는 이안.
때문에 YTBC의 방송은 자연스레 이안의 개인 방송이 되다시피 하였다.
잠깐이라도 천군이나 마군 진영으로 화면을 돌린다 싶으면, 순식간에 수십, 수백 개의 항의 글이 올라왔으니 말이다.
-아, 옵져버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아 놔. 지금 이안갓 틀어 줘야지 어딜 트는 거임.
-지금 거기 보게 생겼음? 이안이 거점 점령하기 직전인데?
-여기 노잼들은 아직 싸움도 시작 안 했구먼!
수많은 팬들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안의 행보는 더욱 파격적으로 이어져 갔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한 마음으로 이안이 마군 진영과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과연 이안의 몽둥이찜질이 마군 진영의 랭커 유저들을 상대로는 어떤 위력을 보여 줄지가 너무 궁금했으니 말이다.
* * *
호왕 길드의 리더이자, 마족이 되기 전, 스플렌더 길드의 길드 마스터였던 한국 서버의 랭커 마틴.
지난 주 용사의 마을에 처음 입성한 그는, 오늘이 두 번째 깃발 전장 참전이었다.
‘후, 침착하자, 침착해.’
지난 금요일 깃발전장에 참여했을 당시, 마틴의 계급은 ‘신병’에 불과했다.
때문에 지난주에 전장에서 그가 한 일이라고는, 적 진영의 랭커를 만나면 열심히 도망 다니다가 사망하는 일 뿐이었다.
전장이 지속되는 내내, 1킬 12데스 라는 치욕적인 성적을 기록했으니 말이다.
유일한 1개의 킬 포인트조차 어부지리로 운 좋게 획득한 것이었으니.
얼마나 처참한 전투였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주엔 적응이 덜 돼서 부진했지만……. 오늘은 다를 거라고.’
해서 마틴은 이번 깃발 전장에 참여하기 전에 정말 단단히 준비하였다.
상위권 성적을 올렸던 랭커들의 움직임과 전략들을 분석해 보며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그의 완벽한(?) 계획은 시작부터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하였다.
전장 초반부터 천군 진영에 느닷없이 점령 포인트가 올라가더니…….
-‘천군’ 진영이 첫 번째 거점을 점령하였습니다.
-현재 스코어 – 천군 1 : 마군 0
“뭐야, 왜 이래?”
마군 십인장 중 하나가 그를 정찰대로 차출해 버린 것이다.
“예? 정찰대에 합류하라고요?”
“그렇다. 너, 너. 그리고 너. 이렇게 셋은 나를 따르도록.”
지난 전투에서는 이런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마틴의 계획에도 들어가 있지 않았던 것.
‘이, 이러면 곤란해지는데…….’
그렇다고 십인장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마틴을 지목한 이상 그의 대열은 정찰대에 속하게 되었고, 만약 대열을 이탈한다면 공헌도는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나마 그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것은 ‘정찰’이라는 임무 자체의 난이도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이 돌발임무를 성공했을 시 얻게 되는 제법 괜찮은 공헌도 버프.
-‘카르고의 정찰대’에 합류하였습니다.
-정찰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시 20분 동안 ‘뛰어난 활약’ 버프를 얻게 됩니다.
-‘뛰어난 활약’ 버프가 지속되는 동안, 획득 공헌도를 30퍼센트만큼 추가로 획득합니다.
‘그래, 계산이 조금 어긋나기는 했지만, 버프를 잘 활용하면 오히려 더 나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거야.’
가까스로 마음의 평정을 찾은 마틴은 자신과 함께 차출된 정찰대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정찰대에 차출된 다른 유저들 또한 마틴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홀리 쉿. 난 점령전에 참가하고 싶다고.”
“정찰이나 하려고 깃발전장에 참전한 게 아닌데…….”
“젠장. 빨리 임무 완수하고 본대로 돌아가야겠어.”
제각기 불만을 표출하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카르고’의 뒤를 따르는 유저들.
마틴을 포함한 열 명의 유저들은 신속히 본대를 벗어나서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남쪽에 있는 다섯 개의 서브 거점 중 천군 진영에 넘어간 거점이 있는지 확인하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말도 안 되기는 거긴 하지만, 남동쪽 첫 번째 서브 거점에 천군 진영의 깃발이 꽂혀 있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조금이라도 이 정찰 임무가 빨리 끝나길 바라는 마틴은 가장 가까운 거점에 천군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기를 바랐다.
만약 남쪽 서브거점 다섯 개 중에 천군 진영이 점령한 거점이 하나도 없다면, 모든 거점을 다 돌아보고 와야 임무가 완수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들 정찰대가 출발한지 5분 정도가 지났을까?
정말 놀랍게도 마틴의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소대장님, 저기 천군 진영의 깃발입니다!”
“H거점이 천군 진영에 점령당한 것 같습니다!”
마군 진영과 가장 가까운 남쪽의 서브 거점인 ‘H’거점에 천군 진영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마군 유저들은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소원을 빌었던 마틴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말도 안 되게 짧은 시간에 점령된 천군 진영의 첫 번째 거점이 남쪽의 서브 거점 중 마군 진영과 가장 가까운 위치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
그런데 놀람이 가시고 나자 마틴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잠깐, 거점에 방어 타워가 하나도 안 보이잖아?’
분명히 천군 진영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점의 요새에는 단 하나의 방어 타워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방어 타워만 없는 것이 아니라 거점 자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 보였던 것.
‘이거 혹시…… 빈집……?’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마틴은 머리를 빠르게 굴리기 시작하였다.
‘천군 놈들, 여길 먹은 다음에 허겁지겁 본대로 복귀한 게 분명해. 기습적으로 서브 거점을 먼저 먹기는 했어도, 결국 메인 거점에서 밀릴까 봐 불안했던 거겠지.’
마틴은 자신이 생각한 가설을 정찰대장 카르고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카르고를 비롯한 마군 병사들은 허점투성이인 마틴의 가설에 넘어갔다.
‘비어 있을지도 모르는 거점’이라는 떡밥이 그 허점들을 충분히 가리고도 남을 만큼 먹음직스러웠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우리는 저 거점에 깃발을 꽂고 나서 복귀한다.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도록!”
카르고의 명령이 떨어지자, 정찰대는 신속하게 거점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마틴이 말한 대로 정말 ‘빈집털이’가 가능한 것이라면, 막대한 공헌도를 그대로 주워 담을 수 있을 터.
중립 지역에 깃발을 꼽는 것보다 적진에 깃발을 꼽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공헌도를 주기 때문에, 유저들의 표정에는 탐욕이 들어차기 시작하였다.
아마 대열을 유지해야 한다는 깃발 전장의 룰이 아니었다면, 이미 앞 다투어 거점 깊숙이 뛰어 들어갔을 터.
마틴은 싱글벙글 웃으며 카르고의 뒤를 바짝 따라붙어 요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열의 가장 앞자리가 마틴이었으니 깃발 공헌도를 먹을 확률이 가장 많은 것도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흐흐, 이게 웬 떡이냐!’
하지만 잠시 후.
모든 정찰대원이 거점의 요새 안쪽으로 진입했을 때…….
드르륵- 쿵-!
커다란 굉음과 함께, 열려 있던 요새의 석문이 그대로 닫혀 버렸다.
“……!”
그리고 당황한 유저들의 귓전으로 누군가의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친구들, 혹시 죽창 메타라고…… 들어는 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