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8화 용맹의 전장 (3) >
* * *
사라와 바네사는 오늘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던 중 생각지도 못했던 히든피스를 찾은 덕분에 두 사람 모두 뛰어난 장비를 얻었기 때문이다.
특히 ‘영웅(초월)’등급의 지팡이를 얻게 된 사라의 경우, 얼른 마법을 캐스팅해 보고 싶어 손이 근질거릴 지경!
‘흐흣, 오늘 용맹의 깃발 전장을 캐리하는 건 내가 될 거라고.’
사라는 다른 선두 그룹의 랭커들과 비교했을 때 용사의 마을에 늦게 진입한 편이었다.
따로 길드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항상 쌍둥이 자매 둘이서만 움직이다 보니 랭킹에 비해 조금 진도가 늦은 것이다.
하지만 진입 후 메인 퀘스트를 순조롭게 잘 풀어 간 덕에, 지금은 20위권 위쪽으로 올라와 있었다.
이것은 두 사람의 실력을 방증하는 결과였다.
‘그리고 오늘 이 스태프와 함께 용맹의 깃발 전장을 캐리 한다면, 거의 10위권을 바라볼 수 있게 되겠지.’
기분이 좋아졌는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사라를 보며, 옆에 있던 바네사가 한마디 했다.
“언니, 너무 흥분해서 실수하면 안 돼.”
그에 사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한다.
“……이게 내가 할 소리를 하네.”
두 자매는 지난주 깃발 전장에서도 이미 제법 높은 성적을 거둔 전력이 있었다.
때문에 전력이 한층 강화된 오늘은, 더욱 기대에 차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 이제 슬슬 중립 거점 진입인가?”
“좋아. 언니, 골렘은 일단 버리고 깃발 파수꾼부터 잡아야 되는 거 알지?”
“당연하지. 깃발은 무조건 우리가 꽂아야 된다고.”
중립 지역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몬스터인 차원의 골렘은 1천 포인트도 넘는 엄청난 양의 영웅 점수를 드롭한다.
하지만 공헌도가 최우선인 두 자매에게 골렘은 큰 의미가 없었다.
골렘을 비롯한 중립거점의 몬스터들은 단 1포인트의 공헌도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두 자매가 깃발 파수꾼을 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바로, 다른 중립 몬스터와 달리 깃발 파수꾼은 공헌도 증폭 버프를 걸어 주기 때문이었다.
파수꾼을 한 마리라도 처치하면 그 시점으로부터 10분 동안 획득하는 모든 공헌도가 30퍼센트만큼 증가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깃발 파수꾼을 가장 많이 처치하면, 깃발 선점이 유리해진다.
깃발 파수꾼을 한 마리 처치할 때마다, 깃발을 설치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10퍼센트만큼씩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파수꾼 처치 버프 없이 깃발을 설치하면 거의 5분이 걸리지만, 열 마리의 파수꾼을 독식할 수만 있다면 꽂는 즉시 깃발이 설치되는 것.
물론 딱 열 마리인 깃발 파수꾼을 한 사람이 독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으니, 아무리 빨라도 2분 정도는 잡아야 한다고 할 수 있었다.
‘좋았어. 깃발 하나당 360포인트니까. 딱 세 번만 성공해도 공헌도 1천이야.’
점점 가까워지는 첫 번째 중립 거점을 보며 마른침을 삼키는 사라.
그리고 잠시 후, 거점 진입을 알리는 메시지와 함께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점(중립 지역)의 영역에 진입하였습니다.
-거점을 지키는 적으로부터 공격받을 수 있습니다.
꽹- 꽹- 꽹- !
“전군, 진격하라!”
“대열을 유지하고 적들을 상대하라!”
“빠르게 거점을 점령하고 다음 거점으로 이동하자!”
각각의 부대를 맡고 있는 백인장 계급 NPC들의 우렁찬 고함 소리와 함께 일제히 전장을 향해 몰려나가는 유저들.
그런데 그 순간!
띠링-!
전장에 있는 모든 유저들의 눈앞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시스템 메시지가 주륵 하고 떠올랐다.
-‘천군’ 진영이 첫 번째 거점을 점령하였습니다.
-현재 스코어 – 천군 1 : 마군 0
분명 전투는 이제 시작이건만, 거점을 점령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라 버린 것이다.
* * *
콰쾅- 콰콰쾅-!
마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기라도 한 듯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비산하는 수많은 바위 파편들.
그리고 폭발하듯 부서져 비산하는 바위 조각들의 사이로, 한 남자가 우두커니 서있었다.
“…….”
검을 내려친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하지 않고 굳어있는 남자.
그의 정체는 바로, 이안이었다.
‘크으, 이게 바로 딜뽕에 취하는 기분이구나!’
사실 그가 굳어 있는 것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떠있는 몇 줄의 메시지.
그 메시지들을 음미하느라, 잠시 멈춰 있었던 것뿐이었다.
-‘차원의 골렘’에게 강력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전설의 차원 무기’ 효과가 발동하였습니다.
-‘차원 방호막’을 60만큼 관통합니다.
-‘차원의 골렘’의 ‘차원 방호막’이 전부 관통되었습니다.
-‘차원의 골렘’의 생명력이 19,820만큼 감소합니다.
-‘차원의 골렘’을 처치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처치 기여도 100퍼센트
-영웅 점수를 2,350만큼 획득합니다.
원래 중립 지역을 지키는 차원의 골렘은 어마어마한 맷집과 방어력으로 유명했다.
기본 방어력이 어마어마한데다 차원 방호막을 60이나 가지고 있어서, 차원 속성을 제외한 모든 피해를 60퍼센트만큼 무효화시키니 말이다.
때문에 어지간한 공격으론 500이상의 대미지를 박는 것도 쉽지 않았으며, 심지어 이안조차도 처음 이 녀석을 만났을 당시 1천대의 대미지를 넘어 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안의 눈앞에 떠 있는 피해량은 무려 2만에 육박하는 기가 막힌 수치였다.
이것은 이 괴물 같은 녀석을, 단 세 방에 터뜨려 버릴 수 있는 무지막지한 파괴력.
심지어 이 숫자가 더욱 대단한 이유는 방금 이 공격이 ‘치명적인 피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말이 좋아 ‘강력한 피해’라고 떠오른 것이지 이것은 그냥 빗맞지 않은 대부분의 공격에 떠오르는 수식인 것이다.
만약 방호막 관통 효과가 없었다고 해도 8천에 가까운 대미지가 나온 셈이니 ‘전설의 차원 무기’효과로 방호막을 무시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해하기 힘든 수준의 공격력이라 할 수 있었다.
대체 이안의 이 어처구니없는 대미지는 어떻게 가능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당연히, 이안이 새로 세팅한 장비들의 옵션과 관련이 있었다.
‘역시 평타에 몰빵한 게 답이었어.’
지금 이안의 장비들은, 원래의 장비들보다 등급 자체는 오히려 더 낮았다.
원래의 장비들은 전부 유일 등급 이상의 장비들이었는데, 현재 이안이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은 천룡군장 세트를 빼면 대부분 희귀 등급 이하였기 때문이다.
‘옵션을 다 맞추려면 일정 부분 다른 성능을 포기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이 세팅을 통해 이안이 얻은 것은 무려 70퍼센트가까이 추가된 ‘일반 공격력’ 증가 옵션이었다.
총체적인 다른 스텟들을 포기하면서 평타 공격력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사실 이 옵션은 카일란에서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옵션은 아니었다.
옵션으로 향상되는 것이 ‘평타’ 공격력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공격 스킬을 사용할 시 효율이 급감하니 말이다.
평타에 한정되어 있는 ‘일반 공격력 증가’옵션보다는, 공격 스킬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치명타 확률 증가’나 ‘공격 속도 증가’ 등의 범용적인 옵션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더 고효율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지금 이안의 손에 쥐어 있는 무식한 녀석은, 그로 하여금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 결과가 지금 이안의 눈앞에 떠 있는 19,820이라는 어마어마한 대미지이고 말이다.
‘흐흐……. 컨트롤이 까다롭긴 하지만, 확실히 손맛 하나는 죽여주는군.’
물론 다른 옵션들을 포기한 만큼, 무조건적인 장점만 가진 세팅은 아니었다.
치명타 확률을 거의 다 포기했음은 물론이고, 원래의 세팅보다 방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데다 스킬 공격력부터 시작해서 기동성까지 크게 손해를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정령 마력과 소환 마력 등 스킬의 위력과 직접 연결되는 옵션들마저 다 포기해 버렸으니, 지금 이안의 세팅은 그야말로 한 방의 평타 공격에 모든 옵션을 ‘몰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까딱 실수하면 골로 갈 수도 있겠지만, 스릴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지.’
마치 펀치 기계를 치고 점수를 감상하기라도 하듯 전설무기의 파괴력 감상을 마친 이안.
예상했던 것 이상의 성능을 두 눈으로 확인한 이안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할리의 등에 올라탔다.
타탓-!
움직임이 이전과 달리 무척이나 무거워졌으니 이제 소환수 탑승 없는 전투는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할리나 핀, 까망이 등의 민첩성 높은 소환수를 탑승해야만, 어느 정도 원하는 수준의 움직임을 발휘할 수 있으니 말이다.
크허엉-!
이안을 태운 할리는 크게 포효하며, 전방을 향해 빠르게 뛰어나갔다.
첫 번째 골렘을 터뜨리며 무기의 성능을 여실히 확인하였으니, 이젠 고지에 깃발을 꼽으러 갈 시간.
거점 깃발을 지키는 열 마리의 깃발 파수꾼을 처치하는 것이, 이안의 다음 목표였다.
“할리, 이쪽으로!”
크르릉- 크헝-
거점 요새의 구조는 제법 복잡한 편이었지만, 이미 훤히 꿰뚫고 있는 이안의 앞길을 막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간간이 중립 몬스터에게 포위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는 했으나.
퍼억-!
-‘차원의 밀랍 전사’에게 강력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차원의 밀랍 전사’의 생명력이 23,780만큼 감소합니다.
-‘차원의 밀랍 전사’를 처치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처치 기여도 100퍼센트
-영웅 점수를 95만큼 획득합니다.
몽둥이찜질(?) 한 방이면 그대로 길이 열렸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좋아, 저 벽만 넘으면 바로 깃발 포인트겠지.’
덕분에 중립 지역의 요새 한복판까지 순식간에 진입해 들어온 이안.
“토르, 소환!”
그워어어-!
콰아앙-!
마지막으로 진입을 막고 있던 거대한 석벽까지 부숴 버린 이안은, 지체 없이 그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오랜만에 세리아에게서 되찾아온 ‘떡대’를 소환하였다.
“떡대, 어비스 홀!”
그륵- 그르륵-!
오랜만에 이안에게 소환된 것이 기쁜지, 거구를 들썩이며 뛰어나가는 떡대.
쿵- 쿵- 쿵-!
이어서 떡대의 손에서 발출된 어비스 홀이 깃발 위에 정확히 소환되었고, 깃발 주변을 지키던 파수꾼 열 마리는 그대로 심연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우웅-!
그 위로 이안의 몽둥이찜질이 떨어져 내렸음은 당연한 순서라고 할 수 있었다.
콰앙- 콰쾅-!
-‘차원의 깃발 파수꾼’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차원의 깃발 파수꾼’의 생명력이 21,120만큼 감소합니다.
-‘차원의 깃발 파수꾼’의 생명력이 24,275만큼 감소합니다.
……후략……
평타 세팅으로 인해 낮아진 광역 공격의 위력을 커버하기 위해, 이안이 생각해 낸 떡대의 어비스 홀.
물론 광역 스킬들만큼 넓은 범위를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방법을 쓰면 적어도 어비스 홀에 빨려 들어온 개체들 정도는 일망타진이 가능했다.
좁은 위치에 모아놓은 뒤 휩쓸듯 검을 휘두르면 이렇게 몸집이 작은 몬스터들은 공격 범위 안에 거의 다 들어오니 말이다.
그리고 요새의 몬스터들 중 가장 생명력이 적은 깃발 파수꾼들이, 이안의 핵 몽둥이를 버텨 낼 리 만무하였다.
-‘차원의 깃발 파수꾼’을 처치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차원의 깃발 파수꾼’을 처치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중략……
-지금부터 10분 동안 ‘깃발 파수꾼의 가호’ 버프가 적용됩니다. (획득 공헌도 : +30퍼센트)
-깃발 설치에 걸리는 시간이 10퍼센트만큼 감소하였습니다. (현재 소요 시간 : 25초)
-깃발 설치에 걸리는 시간이 10퍼센트만큼 감소하였습니다. (현재 소요 시간 : 0.01초)
정상적인 공략으로는 서너 마리를 선점하기도 쉽지 않은 깃발 파수꾼들을, 순식간에 열 마리 모두 처치해 버린 이안.
파수꾼 버프까지 챙긴 이안은 꽂혀 있던 중립 깃발을 뽑아듦과 동시에 천군 진영의 깃발을 그대로 꽂아 버렸다.
척-!
그리고 열 마리의 깃발 파수꾼을 독식한 덕에 이안이 꽂아 넣은 깃발은 그 즉시 설치되었다.
지금까지의 용맹의 깃발 전장과 비교해 본다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빠른 점령 타이밍이라 할 수 있었다.
띠링-!
-중립 지역 ‘H’의 깃발 포인트에, 천군진영의 깃발을 꽂아 넣었습니다.
-중립 지역 ‘H’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특수한 조건으로 인해 공헌도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중략……
-거점 점령 기여도 : 100퍼센트
-한계를 초월한 기여도를 달성하였습니다.
-‘전설적인 용사’ 버프를 적용받습니다.
-지금부터 90분 동안, 적 진영의 병사에게 입히는 피해가 15퍼센트만큼 추가로 증가합니다.
-지금부터 90분 동안 입는 모든 피해가 5퍼센트만큼 감소합니다.
이안은 눈앞에 정신없이 떠오르는 메시지들을 보며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버프까지 받았으니 이것은 이안이 더욱 날뛸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 준 격이 된 것이다.
‘얼쑤, 이거 아예 판까지 깔아 줘 버리네?’
이안의 시선이 시야 구석에 있는 작은 정보 창을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전장이 끝나기까지 남은 시간이 떠올라 있었다.
-용맹의 깃발 전장 : 남은 시간 : 175분 29초
남은 시간은 대략 175분.
이안의 버프가 유지되는 시간은 90분.
하지만 이안은 버프의 시간이 부족한 것을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전장에 주어진 시간이 다 지나지 않더라도, 스무 개의 거점을 전부 점령하면 게임은 종료되니 말이다.
그리고 이안은, 이 버프가 끝나기 전에 충분히 ‘콜드 게임’을 만들어 낼 자신이 있었다.
“이제 슬슬 마족 놈들을 괴롭혀 주러 움직여 볼까?”
펄럭이는 천군 진영의 깃발을 뒤로한 채 어디론가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이안.
그리고 그 순간 이안의 눈앞에 한 줄의 메시지가 추가로 떠올랐다.
-‘천군’ 진영이 첫 번째 거점을 점령하였습니다.
-현재 스코어 - 천군 1 : 마군 0
이것은 이안뿐 아니라, 이 전장 안에 들어와 있는 모든 이들의 눈앞에 떠오른 ‘월드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