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7화 용맹의 전장 (2) >
* * *
용사의 마을에는 많은 콘텐츠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콘텐츠가 다양한 만큼, 얻을 수 있는 보상도 무척이나 다양했다.
하지만 모든 콘텐츠에서 가장 중요한 보상은 당연히 ‘공헌도’라 할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 용사의 마을을 졸업하여 ‘중간자’의 위격을 얻는 것이 이 콘텐츠의 궁극적인 목표였으니 말이었다.
다시 말해 이 용사의 마을에서 모든 콘텐츠에 우선하는 것은 ‘중간자의 위격’을 얻기 위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때문에 지금 이안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사실 용사의 의식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중간자의 위격을 얻기 위한 조건이 몇 가지나 될지는 모르지만, 이안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용사의 의식을 치르는 것도 그 조건 중 하나였으니 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안은 실질적으로 중요하지도 않은 요일전장에 무슨 이유로 참전한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이 ‘용맹의 깃발’ 전장이 데스 페널티가 가장 적은 전장이기 때문이었다.
이 전장 안에서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은 아무리 많이 죽어도 유저에게 전혀 불이익이 없으니 말이었다.
유일한 페널티라고는 부활 대기 시간인 5분.
아이템 세팅을 싹 다 바꾸고 새로운 방식의 전투 스타일을 도전하는 이안에 있어서 이 ‘용맹의 깃발’ 전장만큼 훌륭한 트레이닝 그라운드는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뭐, 중립 지역에서 굴러 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물론 공헌도가 0인 이안의 경우, 그냥 중립 지역에서 계속 죽어도 페널티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하지만 중립지역에 가지 않고 용맹의 깃발 전장에 참여한 것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 중립 지역과 달리, 용맹의 깃발 전장에는 얻을 것이 있다.
이곳에서는 적을 처치할 시 제법 많은 ‘영웅 점수’를 획득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영웅 점수는 용사의 마을 내에서 화폐로 요긴하게 사용되니, 충분히 의미 있는 자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중립 지역에서 상대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적들은, 아직까지 NPC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반면에 요일 전장에서의 전투는 대부분이 유저들과의 전투이다.
새로운 전투 스타일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NPC보다는 유저를 상대하는 게 훨씬 더 나은 선택지인 것이다.
카일란의 인공지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NPC들의 전투지능이 세계 각국의 랭커들과 비교될 정도는 아닐 테니 말이다.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이렇게 용맹의 전장에 참전하게 된 것이었다.
덕분에 신이 난 것은 용맹의 깃발 전장을 중계중인 각국의 게임 채널 방송국들이었다.
대부분의 선두 그룹 랭커들이, 메인 퀘스트 때문에 요일 전장에 참전하지 못하는 요즘, 그들 중에서도 가장 핫한 인물인 이안의 등장은, 너무나도 훌륭한 떡밥이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 카일란을 하는 전 국민이 이안의 팬이나 마찬가지인 한국의 경우, 그가 요일 전장에 참전한 것만으로 시청률이 두 배 이상 뻥튀기되었을 정도였다.
-이안! 드디어 그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지난주, 그리고 바로 엊그제 있었던 수요일의 전장까지……. 그동안의 이안 없던 요일 전장은, 마치 앙꼬 없는 찐빵과도 같았죠.
-루시아 님 말씀이 맞습니다. 물론 지난 전장까지도 재미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스포츠 경기로 따지면 마치 2군 경기를 보는 느낌이었달까요?
-하인스 님의 비유가 정말 적절하시네요. 첫째 주에 이안을 비롯한 선두 그룹의 랭커들이 워낙 대단한 전투들을 보여 줘서인지, 확실히 지난주부터의 요일 전장은 아쉬운 감이 있었어요.
-어쨌든 오늘은 그가 왔습니다, 여러분! 아직까지 이 사실을 모르는 친구가 주변에 있다면, 지금이라도 얼른 연락 돌리세요! 지금 막 전투가 시작되었으니, 아직 늦지 않았거든요!
YTBC의 캐스터인 하인스와 루시아.
그들의 흥분된 목소리만 들어 보더라도, 한국의 카일란 팬들이 얼마나 이안을 기다려 왔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자, 그럼 하인스 님.
-넵!
-이안갓의 등장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뤄 두고, 이 ‘용맹의 깃발’ 전장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해서, 전장에 대해 설명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군요.
-호호, 아니에요, 하인스 님. 어차피 이제 대부분의 시청자분들께서 전장의 룰에 대해 알고 계실 테니, 간략하게 포인트만 짚고 넘어가면 될 것 같아요.
-하핫, 그럼 얼른 ‘용맹의 깃발’ 전장에 대해 간단하게 브리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깃발 전투가 시작되기까지 3분 정도 걸릴 테니, 그 안에 깔끔하게 설명드리도록 하죠.
카일란 오픈 초기부터 호흡을 맞추기 시작하여, 이제는 죽이 척척 맞는 루시아와 하인스.
루시아의 토스를 이어 받은 하인스는 용맹의 깃발 전장에 대한 룰을 간략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1. ‘용맹의 깃발’ 전장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거점을 점령해야만 한다.
*전장에는 총 스무 곳의 거점이 존재하며, 주어진 시간이 전부 지난 시점에 더 많은 거점을 보유하고 있는 진영이 승리하게 된다.
*만약 시간이 전부 지났을 때, 보유하고 있는 거점의 숫자가 양 진영이 동일하다면 ‘최후의 전장’으로 소환되어, 그곳에 있는 하나의 거점을 먼저 점령하는 진영이 승리하게 된다.
*만약 주어진 시간이 전부 지나지 않았더라도, 한쪽 진영이 모든 거점을 점령한다면. 남은 시간과 관계없이 콜드 게임으로 전투에서 승리하게 된다(콜드 게임으로 전투에서 승리하게 될 시, 승리한 진영의 모든 유저들이 전장에서 획득한 공헌도를 300퍼센트로 적용받는다).
2. ‘용맹의 깃발’ 전장에서 공헌도를 획득하는 방법은 세 가지이다.
적을 처치하거나, 타워를 철거하거나, 거점에 깃발을 꼽아 점령하거나.
*적을 처치했을 시 처치한 대상의 계급과 공헌도에 비례하여 공헌도를 획득하며, 사망하지 않고 킬 포인트를 늘릴 때 마다 획득하는 공헌도가 증가한다(대상이 지금껏 획득한 모든 공헌도 총합의 0.6퍼센트획득) (연속 킬 보너스가 쌓일 때마다, 추가로 0.2퍼센트씩 증가).
*방어 타워를 철거했을 시 방어 타워의 레벨에 비례하여 공헌도를 획득한다(방어 타워의 레벨×50).
*거점에 깃발을 꼽아 점령하였을 시 본인의 계급에 따라 획득하는 공헌도가 결정된다(정예병 계급 기준 360포인트 획득).
3. 전장에서 승리할 시, 승리한 진영으로 참전한 모든 유저들에게 하루 동안 ‘용맹의 함성’ 버프가 부여된다.
*용맹의 함성
-모든 전투 능력 : +3퍼센트
-획득하는 모든 공헌도 : +3퍼센트
-획득하는 모든 영웅 점수 : +5퍼센트
물론 좀 더 세부적으로 파고들자면, 용맹의 깃발 전장에는 이보다 훨씬 다양하고 구체적인 룰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직접 플레이하는 유저가 아닌 이상에야 이 정도만 알아도 전장을 감상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으니, 하인스는 더 이상 설명을 늘리지 않고 마무리하였다.
-매번 느끼는 부분이지만, 이 ‘용맹의 깃발’ 전장의 룰이 신의 말판 전장에 비해서는 한결 이해하기 편한 것 같네요.
-맞습니다, 루시아 님. 사실 신의 말판 전장은 저도 아직까지 전부 다 이해하질 못했거든요, 하하.
-이렇게 복잡한 룰 속에서 매번 멋진 장면을 보여 주는 랭커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 멋진 플레이들을 이렇게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인 것 같습니다.
룰에 대한 설명이 다 끝난 뒤에도, 루시아와 하인스는 이런 저런 랭커들과 관련된 잡담을 떠들기 시작하였다.
전장은 오픈되었지만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는 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리니, 그동안 할 말들을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잡담이 시작된 지 10초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래서 이번 전장에 참여한……!
-갑자기 왜 그러세요, 하인스 님?
루시아와 마주보며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던 하인스가 돌연 말을 멈추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 지금……! 갑자기 돌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여러분!
* * *
용맹의 깃발 전장의 맵은 무척이나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지형적으로 약간의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가로로 기다란 형태의 단순한 맵이니 말이다.
길쭉한 맵에 총 열 개의 메인 거점이 가로로 늘어서 있었었으며, 남쪽과 북쪽에 각각 다섯 개 씩의 서브 거점이 추가로 줄지어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장이 열리면서 소환되는 양 진영의 유저들은, 각각 동쪽과 서쪽 끝에서 스타트하게 되어 있었다.
맵의 반대편에서 소환된 양 진영의 유저들이, 최대한 빠르게 거점을 점령하며 서로의 진영을 향해 세력을 확장시켜 가는 구조인 것이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면, 유저들은 설정된 대열과 위치를 유지한 채로 첫 번째 목적지를 향해 진격하게 된다.
대열에서 벗어나면 어떠한 공헌도도 획득할 수 없게 되어있으니 개인행동을 하는 것은 사실상 힘든 구조였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전장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초반에 유저들끼리 단합하여 중립 상태인 거점을 빠르게 점령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어차피 어느 한쪽 진영의 전력이 압도적인 경우는 거의 없었고, 때문에 처음에 한번 전선이 형성되고 나면 그것을 뒤집기가 무척이나 힘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에 한해서 예측 가능한 전개였을 뿐.
애초에 다른 유저들과 참전 목적 자체가 다른 이안이 전장에 포함되어 있었으니, 그것으로 이미 ‘일반적’이라는 전제는 깔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푸릉- 푸르릉-!
전장에 진입하자마자 까망이를 소환한 이안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등에 안착한 순간, 까망이의 고유 능력인 ‘어둠의 날개’가 발동되었다.
촤아아아-!
어둠의 날개는, 이안이 가진 모든 고유 능력들 중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돌진 계열의 스킬이다.
그리고 이안이 이 스킬을 사용했다는 것은××.
“어어, 누가 대열을 이탈했어!”
“누구야? 어느 나라 유저야?”
그 즉시, 천군 진영의 대열을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열 망가뜨리지 말고 빨리 돌아와! 어차피 혼자 나가서는 아무것도 할 게 없다고!”
순식간에 전방으로 튀어나온 이안의 귓등으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그 소리를 들은 이안은 피식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할 게 없기는 왜 없어? 당장이라도 이 녀석을 휘둘러 보고 싶어서 근질거리는데 말이야.’
전장에 입장한 수백 명의 유저들 중 한국 서버 랭커들의 숫자는 채 스무 명 도 되지 않는다.
때문에 튀어나가는 이안의 뒷모습만으로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유저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하, 시작부터 별종이 하나 끼어 있네.”
“전장에 적용되는 룰을 읽어 보기는 하고 들어온 건가?”
튀어나간 것이 이안임을 알아보지 못한 다른 서버의 랭커들로서는, 그저 똥 밟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이안은,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줄 여유가 없었다.
미리 생각해 뒀던 ‘기습’을 실행하려면, 최대한 빨리 움직여서 남쪽의 협곡을 선점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메인 거점의 점령이 다 끝나고 나면, 마족 놈들은 분명 남쪽 라인부터 병력을 움직여 올 거야. 그 전에 내가 한 곳만 점령해 놓으면, 재밌는 그림이 그려지겠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처음 전장이 열렸을 때, 전장 내에 존재하는 스무 개의 거점은 양 진영 중 어떤 진영의 거점도 아닌 중립 지역이다.
그렇다면 깃발만 들고 뛰어가서 거점에 꼽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 또한 당연히 아니었다.
모든 중립 지역은 중립 몬스터들이 지키고 있었으며, 그들을 처치하지 않고서는 거점 점령이라는 게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몬스터들은 대충 구성된 전력으로 금방 처치할 수 있을 만큼 허약한 개체들이 아니었다.
때문에 메인 거점이라 할 수 있는 중앙 라인을 먼저 전력을 다해 점령한 뒤.
그 다음에 노리게 되는 곳이 아래위의 서브 거점들이었다.
메인 라인의 열 개 거점 중 가까운 다섯 개를 안정적으로 확보해 둔 뒤 상대 진영의 눈치를 봐 가며 아래위로 병력을 이동시키는 전략이 보통인 것이다.
그리고 이안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런 일반적인 상황에서 오는 허점이었다.
‘마족 놈들이 메인 거점 점령을 끝내기 전에, 남쪽 서브거점 하나를 점령해서 길목을 막아 버려야겠어.’
이안이 지금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적 진영의 주력 병력을 상대로 홀로 맞서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주력이 메인 거점에 있는 상태에서 서브 거점을 점령하기 위해 내려오는 병력들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 관건은, 거점을 지키고 있을 차원의 골렘을 내가 솔플로 잡을 수 있냐는 건데…….’
까망이를 타고 빠르게 이동하는 와중에도, 이안은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전투를 시뮬레이션해 보았다.
밤을 세워 가며 세팅한 아이템들이 생각대로만 성능을 발휘해 준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
그리고 그렇게 쉴 새 없이 이동하며 10여 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거점(중립 지역)의 영역에 진입하였습니다.
-거점을 지키는 적으로부터 공격받을 수 있습니다.
새롭게 떠오른 두 줄의 메시지와 함께 거점을 지키는 거대한 차원의 골렘이 이안의 시야에 모습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