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2화 설원의 학살자 (3) >
* * *
각 진영에서 설원으로 들어올 수 있는 루트는, 각각 두 가지다.
첫째는 이안이 그랬던 것처럼 생산 직업 히든 퀘스트를 받아 차원의 숲에서 들어오는 방법이 있고, 둘째는 거인 레이드에 성공한 뒤 천군 진영의 야영지를 통해 정식으로 들어오는 방법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메인으로 설계되어 있는 진입 루트는 당연히 후자라고 할 수 있었다.
히든 퀘스트를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때문에 이 ‘차원의 설원’이라는 맵은, 사실 ‘차원의 숲’과 완벽히 별개의 맵이라고 할 수 있었다.
12시간의 접속 시간 제한이 있는 차원의 숲과는 달리, 24시간 동안 머물러도 상관없는 지역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아직 거인 레이드를 클리어하지 못한 이안의 경우 차원의 숲이 열리는 12시간 외에는 입장할 방법이 없었지만, 어차피 이곳에서 나가지만 않는다면, 24시간 내내 파밍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해서 이안은, 10퍼센트의 공헌도를 소모하여 부활하는 것의 표율이 나빠질 때까지 무한 파밍할 생각이었다.
‘한 텀에 얻을 수 있는 공헌도가 전체 공헌도의 10퍼센트와 가까워지면 더 이상 자폭 테러의 효율이 나오지 않을 테니까.’
예를 들어 이안이 한 번 죽으면서 얻을 수 있는 공헌도가 2~3만 정도라고 가정했을 때, 대략 15~20만 정도의 공헌도가 모인다면 더 이상 효율이 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었다.
‘어디 보자……. 내가 이번에 파밍한 공헌도가 3만 정도니까 앞으로 한 네다섯 번 정도는 더 트라이해도 괜찮겠어.’
공헌도가 20만일 때 사망한다면, 부활에 필요한 공헌도만 2만에 육박하니 까딱 실수하거나 어떤 변수라도 생겨 일찍 사망한다면 오히려 공헌도 손해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 그럼 어디 한 번 2차 파밍에 들어가 볼까?”
전설의 무기 제작 퀘스트는 파밍이 전부 끝난 뒤에 진행할 생각이었다.
이미 퀘스트 조건은 전부 완료되었으며, 제한 시간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파밍을 끝내기 전에 한 번쯤은 그 장군이라는 놈의 목도 한번 노려 봐야지.’
검붉은 가시갑주에 시커먼 기운을 뿜어내고 있던, 마군진영 장군 ‘무스카’의 위용.
죽기 직전에 봤던 그의 모습을 떠올린 이안은 입맛을 다시며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부활 지점의 앞쪽에는 멀찍이 천군 진영이 보였지만, 일단 지금은 그냥 지나쳐 갈 생각이었다.
나중에 들러본다고 해서 진영이 어디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고작 2시간 정도의 파밍으로 얻은 3만에 육박하는 공헌도가 너무도 달콤했으니 말이다.
* * *
쿵- 쿵- 쿵-.
뚝딱뚝딱.
기이잉-!
수많은 노동의 소리들이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용사의 요새.
처음 이안과 훈이가 입주(?)했을 때만 해도 휑하기 그지없던 용사의 요새에는, 이제 제법 많은 타워들이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타워란, 비단 이안과 훈이가 지어 놓은 A-11섹터의 타워들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 하루 사이에 생산 직업의 랭커들이 제법 퀘스트를 시작하였고, 이안과 훈이 외에도 너댓 팀 정도가 추가로 요새에 입성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일본 서버의 대장장이 랭커인 ‘료우’또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크, 역시 카일란은 갓겜이야. 용사의 마을에도 생산 클래스 랭커들을 위한 콘텐츠를 따로 마련해 뒀을 줄이야.”
요새에 입성하여 타워를 짓기 시작한 료우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노동한 끝에, 첫날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을 정도의 공헌도는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이 요새에서 진행해야 할 퀘스트만 산더미인 것 같으니……. 공헌도 요건 채웠어도 최대한 타워를 만들어 둬야겠어.’
퀘스트 클리어 조건이 충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노가다를 하는, 노동 본능 기질을 가진 료우.
료우는 함께 들어온 길드원들과 더불어 땀을 뻘뻘 흘리며 노가다를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료우뿐 아니라 이 요새 안에 입주한 생산클래스 유저들 모두가 그러했다.
그들은 마치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체계적으로 움직이며 재료를 수급하고 타워를 올렸다.
“후후, 이 정도면 우리 길드 방어 타워가 가장 훌륭한 것 같죠?”
“역시 료우 님의 생산 스킬은 엄청난 것 같아요. 하루 만에 석궁 타워가 다섯 개나 생기다니요.”
“하핫, 그거야 다른 길드원분들께서 재료 수급을 잘해 주신 덕분이지요. 광석과 흑단목이 부족했다면, 제가 아무리 열심히 건설해 봐야 타워가 나오겠습니까?”
“겸손하시긴요.”
“특히 광석 수급이 정말 엄청났어요. 마력의 철광석 원석만 거의 스무 개는 채굴해 오셨으니…….”
“뭐, 어찌되었든. 이대로만 쭉 달리자고요. 전투클래스 관련 퀘스트야 순위권을 내주고 말았지만, 생산 클래스 쪽에서는 우리 길드가 세계 랭킹 1위라는 걸 보여 줘야지요.”
“동감합니다.”
일본 서버의 대장장이 클래스 랭킹 1위인 료우.
그리고 그가 길드 마스터로 있는 월영月影 길드는 일본 서버에서 무척이나 유명했다.
길드원이 스무 명도 채 안 되는 소수정예임에도 불구하고, 최상위권의 길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유명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유명한 것은, 길드원 전원이 생산클래스의 랭커들이라는 부분 때문이었다.
일본 서버에서 유명한 네임드급 아이템의 대부분이, 월영길드에서 만들어 낸 아이템들일 정도.
때문에 생산 클래스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자, 이제 3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여러분. 타워 하나 더 올리고. 석궁 타워 두 개는 업그레이드까지 끝내고 마무리하죠.”
“오케이! 좀 타이트해 보이긴 하지만, 못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알겠습니다, 마스터!”
료우의 오더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월영 길드의 생산 직업 랭커들!
그런데 이들의 대화를 보면, 뭔가 이상한 부분이 하나 있다.
분명히 이들 길드의 섹터 근처에 이안과 훈이의 섹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의 진척도가 가장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들은 고작 일반 등급의 타워 다섯 개를 지어 놓고 어째서 유일 등급의 타워로만 도배되어 있는 이안과 훈이의 요새보다 앞서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들이 처음 이 요새에 입성할 때부터 이미 말도 안 되는 수준에 올라와 있던 이안과 훈이의 요새는 애초에 경쟁 상대에 집어넣지 않은 것이다.
뒤늦게 요새증축 퀘스트에 합류한 생산 클래스 유저들은, 이안과 훈이의 A-11섹터를 NPC들의 작품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판단이라 할 수 있었다.
분명 생산 클래스 랭커들은 가장 빠른 루트로 퀘스트를 진행하여 요새 증축 퀘까지 도달하였는데, 처음 들어온 날부터 아예 넘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유일 등급의 타워들이 빼곡하게 깔려 있는 섹터가 있었으니…….
당연히 그 섹터가 NPC들의 작품이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후후, 좋았어. 파르텔 님, 용사의 마을이 처음 열린 지 이제 보름 정도 지난건가요?”
“대략 그런 셈이죠.”
“그럼 보름 뒤면, 분야별 공헌도 랭킹이 뜨겠네요?”
“그렇죠. LB사에서 한 달에 한 번 씩 용사의 마을 분야별 랭킹을 발표한다고 했으니까요.”
“크, 분야별 랭킹 10위까지의 보상이 ‘카일란의 밤’ 초대권이라던데……. 생산 클래스 쪽에서는 저희 길드에서 다 먹도록 하죠.”
“당연한 말씀!”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듯.
A-11섹터의 주인이 유저라는 사실을 모르는 월영 길드의 길드원들은, 신이 나서 망치질을 계속하였다.
깡- 깡- 깡-!
이미 생산 클래스 분야의 공헌도 랭킹 1,2위를, 로터스 길드에서 싸그리 쓸어갔음을 알았더라면 이들은 아마 허탈감에 망치 들 힘조차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 *
꽹- 꽹- 꽹-!
마군 야영지의 동쪽 끝에서, 커다란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 씨, 또야?”
“이번에도 그놈들인가?”
“아니 그 자식들은 한번 매운맛을 봤으면 그만오지 왜 자꾸 쳐들어오는 거야, 귀찮게?”
“그러니까 말이야. 그렇게 소규모로 와 봐야, 우리 진영은 끄떡도 하지 않을 텐데 말이지.”
적의 침입을 알리는 꽹과리 소리에, 마군 야영지의 병사들을 투덜거리며 무기를 챙겼다.
이번으로 벌써 세 번째.
천군 진영의 계속되는 소규모 기습(?)에 그들은 이제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가랑비에 옷 젖듯, 우리 지금까지 제법 많은 병력을 잃었어.”
“그런가? 사망자가 총 몇 명쯤인데?”
“지금까지 총 오륙십 명 정돈 기습에 당한 것 같던데?”
“흠, 확실히 그 정도면, 생각보다 피해가 있기는 했네.”
“그렇지.”
“하지만 잃어버린 병력이야 어차피 내일이면 다시 살아 돌아올 거고……. 우리 방어 시설은 전부 다 멀쩡하잖아?”
“하긴 네 말도 일리가 있네.”
“대체 이놈들은 뭘 위해서 이 의미 없는 기습을 계속하는 걸까?”
“글쎄, 그걸 내가 알면, 이미 십인장, 아니, 백인장으로 진급했겠지.”
용사의 마을 안에 있는 각 진영의 NPC들은 유저들과 마찬가지로 사망해도 부활이 가능하다.
마치 유저들의 데스 페널티처럼 한 개의 초월 레벨이 다운됨과 동시에 24시간 뒤에 부활하게 되는 설정인 것이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용사의 마을 NPC들은 전쟁을 통해 경험치를 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죽으면 초월 1레벨에 해당하는 경험치를 잃어버리지만, 죽지 않고 계속해서 경험치를 쌓다 보면 초월 30레벨이 넘을 때까지도 레벨 업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각 진영의 일반 병사들 레벨이, 15~25 사이에 수렴하게 되어 있던 것.
그리고 개중 뛰어난 활약으로 죽지 않고 계속 레벨이 오른 NPC들은, 25레벨이 넘어가면서 십인장, 백인장으로 진급하게 된다.
그렇게 삼십 레벨이 넘어가면, ‘장군’이 될 수 있는 자격까지 생기는 것이고 말이다.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이안이 쳐들어올 때마다 치열하게 방어전을 벌이는 마군 진영의 병사들.
하지만 이안의 목적이 뭔지 알 턱이 없는 마군 병사들로서는, 매번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하였다.
애초에 마군 병사들의 목표는 진영의 구조물들을 지켜 내는 것이었는데, 이안은 그러한 구조물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안이 원하는 것은 오직, 최대한 많은 킬 포인트를 올리는 것!
그리고 이번 세 번째 자폭 테러 작전은, 이안에게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전투였다.
이안은 첫 번째 두 번째 전투에서 각각 3만 이상의 공헌도를 쌓는 데 성공했고, 때문에 전장에 진입하는 지금, 이안이 보유하고 있는 공헌도는 7만이 넘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조금 더 쉽게 한 줄로 풀어 이야기하자면, 이안은 이번 전투에서, ‘용사’계급으로 진급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었다.
‘이거 설레는데. 용사 계급으로 진급하면 어떤 특전이 있으려나?’
용사 계급은, 사실상 이 용사의 마을을 졸업할 시점에 얻어야 하는 최종 계급이다.
원래 카일란 기획 팀의 의도대로라면, 한 달 동안 모든 퀘스트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둬야 달성이 가능한 계급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제 갓 보름 정도가 지난 이 시점.
이안이라는 변종이 또 일을 내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