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1화 설원의 학살자 (2) >
* * *
방어 태세를 갖추며 천천히 포위해 오는 적들을 향해, 이안이 정령 마력을 다 태워 가면서까지 불화살을 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천룡군장의 위엄’ 고유 능력은 정령 마력이 얼마가 남아 있든 같은 위력으로 발동되며 모든 마력을 소모시키니 말이다.
그리고 정령 마력을 전부 소진하여도 어차피 근접전에서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수백이 넘는 마군들을 헤집고 다니면서 불화살을 날릴 것도 아니고, ‘천룡의 분노’고유 능력은 마력 대신 ‘천룡의 분노’라는 특수한 소모값을 사용하니까.
어찌 되었든 ‘천룡군장의 위엄’ 고유 능력을 제대로 발동시킨 이안은, 아공간에서 쉬고 있던 소환수들을 전부 소환하기 시작하였다.
이제부터는 정말 전력을 다해서 치열하게 전투해야 하였다.
“까망이, 빡빡이, 라이, 카르세우스!”
푸릉- 푸릉-!
캬아아오-!
어차피 이안이 부활하면, 모든 재사용 대기 시간은 초기화된다.
소환수가 죽기 전에만 역소환해 두면, 부활하는 즉시 다시 소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이안은 아무런 부담 없이 소환수들을 전부 소환할 수 있었다.
“아빠, 적들이 엄청 많아요!”
“크릉, 아주 재밌어 보이는 전장이다.”
소환되자마자 호들갑을 떠는 엘카릭스와 원 없이 싸울 생각에 신난 라이.
이어서 이안을 따라 암벽 아래로 내려온 카카가, 광역 디버프를 시전하였다.
“어둠이…… 내린다.”
고오오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그것을 기점으로 이안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전장에는 우두머리가 있다.
즉, 모든 진영에는 ‘장군’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말이다.
지금 이안이 쳐들어온 마군 진영의 야영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용사 계급의 위 단계라 할 수 있는 ‘장군’계급.
하지만 이 장군이라는 계급은 용사의 마을 설정상 유저들이 도달할 수 있는 계급은 아니었다.
장군의 계급에 다다를 정도로 공헌도를 쌓는 것보다 용사의 협곡을 졸업하는 게 먼저였으니 말이다.
야영지의 모든 전투 지휘를 총괄하는 마군 진영의 장군 ‘무스카’는 황급히 말을 타고 진영의 후미를 향해 내달렸다.
“야비한 천군 진영 놈들……. 설마 이 시점에 바위산을 넘어 기습을 해 올 줄이야.”
말은 야비하다 하였으나, 사실 무스카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방어 타워가 없는 후방으로 천군 진영의 대군이 기습해 온 것이라면, 정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대체 바위산을 어떻게 넘은 거지? 우리 파수병들이 눈치 못 챌 정도로 은밀하게 군대를 움직일 수는 없었을 텐데…….’
사실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설마 한 명이 쳐들어온 것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거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살행위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너희 둘은 나 따라오지 말고, 천군 진영 쪽 추가 지원군이 없는지 정찰하도록.”
“예, 장군님!”
“명을 받듭니다!”
“나머지는 나와 함께 침입자들을 처단한다!”
“존명尊命!”
무스카는 용사 계급 이상으로만 이루어진 자신의 친위대를 대동하여, 바람처럼 진영을 가로질러 후방으로 이동해 왔다.
그런데 현장에 도착했을 때 무스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천군의 침략으로 인해 초토화되어 있을 줄 알았던 진영의 후미가, 너무도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무스카의 눈에 보이는 피해라고는 화살에 맞아 쓰러져 있는 몇 명의 보초병이 전부였다.
멀찍이 바위산 위에서 요란하게 전투하는 병사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무스카가 생각하던 그림과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천군군대의 기습으로 진영 내부가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당황한 무스카는, 현장에 있던 용사계급의 십인장 하나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자네.”
“예, 장군님!”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천군 진영은 어째서 진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거지?”
그리고 무스카의 물음에, 십인장은 한쪽 무릎을 굽히며 보고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척-.
“기습해 온 천군 진영의 군대는 우리 방어군의 기세에 눌려 바위산을 넘어오지 못하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드린 그대롭니다, 장군. 장군께서 오시지 않아도 될 뻔 했습니다. 애초에 저 바위산을 넘기 위해서인지, 기습대는 무척이나 소수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소수라면, 대략 어느 정도의 규모를 말함인가.”
“제가 추측하기론, 한두 개 소대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두 개 소대라면, 서른 명 정도……?”
“그렇습니다, 장군. 정말 많아야 서른 정도로 추정됩니다.”
십인장의 보고를 들은 무스카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천군진영에서 그런 소규모로 의미 없는 기습을 할 리가 없는데……?’
물론 험준한 바위산을 넘기 위해서는 많은 병력이 움직이기 힘들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한두 개 정도의 소대로 기습하는 것은 하지 않느니만 못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리 기습이 완벽히 성공하더라도, 피해다운 피해를 입히는 것은 불가능한 규모였으니까.
바로 지금의 상황처럼 말이다.
‘정말 천군진영의 기습이었다면, 이렇게 얌전하게 끝날 리 없어. 이건 분명히 뭔가 이상해.’
빠르게 판단을 마친 무스카는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렸다.
그러자 그를 따라온 친위대들도 일제히 말에서 내려섰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산으로 올라가 봐야 할 것 같군.”
그러자 무스카에게 보고를 올리던 십인장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장군님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그래.”
곧 종료될 게 분명한 상황에 장군이 직접 올라가겠다는 것이 의아했지만, 감히 장군의 말에 토를 달 수는 없는 것이기에, 십인장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명을 받듭니다.”
* * *
험준한 바위산은, 이안에게 있어 완벽한 전장이었다.
두 다리로 뛰어다니는 마군 병사들보다 우월한 기동성을 가질 수 있는 이안의 입장에서, 지형적 조건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인 것이다.
그리고 전력이 절대적으로 밀리는 지금의 상황에서 지형적 유리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라이, 오른쪽 저놈부터 처치해!”
“크릉-! 알겠다, 주인!”
카카의 광역 디버프 덕에 ‘어둠 잠식’ 패시브를 발동시킨 라이는 어마어마한 이동속도와 민첩성으로 미친 듯이 바위산을 누비며 뛰어다녔다.
70퍼센트나 되는 치명타 확률 버프에 50퍼센트의 이속버프가 추가되니, 라이의 전투력은 신화등급인 다른 소환수들에 비해 결코 밀리지 않았다.
촤라락-! 콰득-!
날카롭고 거대한 발톱으로, 사정없이 마군 병사를 공격하는 라이.
그리고 당황하여 뒤를 돈 마군 병사를 향해 할리의 솥뚜껑 같은 앞발이 그대로 작렬했다.
퍼억-!
물 흐르듯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공격의 연계.
손발을 맞추며 전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라이와 할리의 연수합격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컥……!”
물론 이안의 소환수들 중 가장 등급이 낮은 할리의 공격력은 약한 편이었지만, 그것은 상관없었다.
할리에게는 한계를 뛰어넘는 기동성과 평타에 묻어나는 ‘기절’ 패시브가 있었으니 말이다.
퍽- 퍼퍽-!
마군 병사의 뒤를 잡은 할리가 앞발을 들어 연달아 뒤통수를 후려갈기자, 여지없이 ‘기절’효과가 적용되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칠 이안이 아니었다.
퍼펑-!
-‘야영지 보초병 엘핀’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마군 진영의 ‘정예병’등급 보초병을 처치하셨습니다.
-공헌도가 400만큼 상승합니다.
-적을 처치하여, ‘천룡의 분노’가 3포인트만큼 차오릅니다!
-‘천룡의 분노’가 전부 차올랐습니다.(100/100)
-‘천룡소환’ 고유 능력이 활성화됩니다.
깔끔하게 400의 공헌도를 추가한 이안은 곧바로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보주를 치켜들었다.
‘천룡소환’고유 능력은 정령 마력이 없어도 분노만 있으면 사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에서 무척이나 유용한 스킬이었다.
캬아아오-!
이안의 보주에서 또다시 뿜어져 나온 천룡이 커다랗게 포효하며 마군 병사 하나를 향해 달려든다.
그리고 할리를 탄 이안 또한, 천룡의 뒤를 바짝 따라붙으며 빠르게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파팟-!
이어서 또 다시, 할리와 라이의 연계 공격이 시작되었다.
촤락- 퍼퍼퍽-!
이안이 가진 대부분의 소환수들이 광역 위주로 고유 능력들을 운용한다면, 라이와 할리는 단일 대상에 특화된 소환수들.
-마군 진영의 ‘정예병’등급 보초병을 처치하셨습니다.
-공헌도가 400만큼 상승합니다.
지금 이안이 운용하는 전략은 간단했다.
우선 빡빡이로 어그로를 끌어 두고 엘카릭스와 뿍뿍이의 서포팅으로 버티면서, 그 위에 광역기를 뿌려 댄다.
그리고 충분히 양념된 적을 타깃팅하여 할리, 라이와 함께 하나씩 암살하는 것이다.
마나 번Mana burn효과로 인해 마군 진영 병사들의 스킬들이 죄다 묶여 ㅍ있기 때문에, 변수 없이 작전 운용이 가능한 것.
거기에 흑기린 까망이의 광역 디버프인 ‘공포’까지 겹치니, 이안은 생각보다 오래도록 공헌도 파밍을 계속할 수 있었다.
빡빡이의 도발이 풀릴 때쯤 까망이로 공포를 걸어 어그로를 분산시키고 그 사이 빡빡이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모든 스킬들이 재사용 대기 중일 때에는, 이안이 직접 하르가수스를 타고 어그로를 끌기도 하였다.
강하 컨트롤을 활용하여 10초 정도만 버티면, 그 사이 빡빡이를 비롯한 ‘버티기 조’의 생명력이 제법 회복되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매커니즘으로 버티는 것은, 무한히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슬슬 마나가 회복되기 시작한 마군 병사들이 고유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누적된 대미지로 가랑비에 옷 젖듯 이안의 생명력이 줄어들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이안은, 1포인트의 공헌도라도 더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한 놈만 더! 한 놈만 더!’
-마군 진영의 ‘정예병’등급 보초병을 처치하셨습니다.
-공헌도가 400만큼 상승합니다.
-마군 진영의 ‘용사’등급 파수병을 처치하셨습니다.
-공헌도가 900만큼 상승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뜻하지 않았던 의외의 선물(?)을 또 한 번 받을 수 있었다.
-연속해서 20명의 마군 병사를 처치하셨습니다!
-지금부터 10분 동안, ‘적 처치’로 획득하는 모든 공헌도가 두 배로 적용됩니다.
이안의 양 쪽 입꼬리가 귀에 걸렸음은 당연한 수순.
‘으하하핫! 좋아, 좋아!’
100포인트 얻기조차 힘들었던 공헌도가 미친 듯이 축적되고 있었으니, 이안은 신이 나서 없던 힘도 생길 지경이었다.
-공헌도가 1800만큼 상승합니다.
-공헌도가 1800만큼 상승합니다.
-공헌도가 800만큼 상승합니다.
……후략……
그리고 그렇게, 이십분 정도가 지났을까?
-소환수 ‘카르세우스’를 소환해제 하였습니다.
-소환수 ‘빡빡이’를 소환해제 하였습니다.
버티고 버티다가 한계가 온 소환수들을 하나씩 소환해제 한 이안은, 결국 홀로 남게 되고 말았다.
“이 끈질긴 놈! 죽어라!”
“지금까지 잘도 버텼다, 이놈!”
요리저리 뛰어다니며 게릴라전을 펼치는 이안이 얄미웠는지, 악착같이 그를 향해 달려드는 마군의 병사들.
결국 이안은, 바위산 한복판에서 장렬히 전사할 수밖에 없었다.
-‘야영지 보초병 사르무스’로부터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생명력이 전부 소진되었습니다.
-‘전투 불능’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야가 완벽히 까맣게 물들기 직전, 뭔가를 발견한 이안의 눈이 살짝 확대되었다.
‘어, 저놈은 병사가 아니고 장군이잖아?’
정신없이 전투하느라 발견하지 못했었는데, 바위봉우리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 남자를 발견한 것이었다.
생명력이 소진되어 바닥에 쓰러지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무스카’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
확실히 ‘장군’답게 강렬한 위용을 뿜어내는 무스카였지만, 그를 발견한 이안의 감상은 무척이나 단순하였다.
‘크, 저놈을 잡으면 공헌도를 얼마나 벌 수 있을까?’
오직 이안의 관심사는, ‘공헌도’ 하나뿐!
그리고 시야가 완벽히 어두워졌을 때.
이안의 눈앞에 기다렸던 시스템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띠링-
-보유 중인 공헌도의 10퍼센트(4,781)를 사용하여, ‘천군 야영지’에서 즉시 부활할 수 있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공헌도 : 47,812
-부활하시겠습니까?(Y/N)
-부활을 포기하고 사망할 시 공헌도는 차감되지 않으며, 일반적인 사망 페널티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너무 당연하게도 이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부활을 선택하였다.
‘당연히 오케이지. 파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야영지에서 부활’을 선택하셨습니다.
-잠시 후, ‘천군 진영의 야영지’로 소환됩니다.
이어서 사망 이펙트로 인해 까맣게 변한 이안의 전신이 다시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