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8화 차원의 설원 (3) >
* * *
유령들은 설원의 동남쪽에 마군의 진영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 설원 안에는 천군의 진영도 존재했다.
이안은 알지 못했지만, 설원의 서남 쪽에 천군 진영 야영지가 있었으니 말이다.
원래 이 설원으로 처음 입장하는 유저는, 중립 지역의 최전방 천군 진영인 야영지를 통해서 들어오게 되는 것.
그렇다면 왜 이안은 천군 진영을 통하지 않고 남쪽 결계를 통해 들어오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원래대로라면 이 중립 지역에 들어오기 위해선 ‘전투 클래스’의 메인 퀘스트인 ‘거인 레이드’를 세 번째 단계까지 클리어해야 했는데, 이안의 경우 생산 클래스 히든 클래스를 통해 특이한 루트로 입장하게 된 것이니 말이다.
어쨌든 그러한 사실과는 별개로, 이안은 설원 동남쪽을 향해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항상 카카를 앞세워 일정 거리를 띄운 채 이동하였다.
“카카, 앞쪽에 아직 마군들은 안 보이지?”
-그렇다 주인아. 보이면 바로 신호 주겠다.
“오케이, 알겠어.”
그리고 이안은, 대략 이삼십 분 정도를 이동했을 때 드디어 마군 야영지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설원은 차원의 숲보다도 훨씬 복잡하고 넓었지만, 미니맵이 친절하게 위치를 안내해 줬기 때문에 금방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영을 발견한 이안은, 곧바로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하아……. 진영에 쳐들어가는 게 왜 자살행위라고 했는지 알겠네.”
멀리서 카카의 마법 구슬을 통해 확인한 마군 진영의 모습은, 정말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마군 놈들이 개미떼같이 많은 거야 그렇다 쳐도, 무슨 야영지에 방어 타워까지 있냐.’
구슬을 통해 이안이 확인한 마군들의 숫자는 어림잡아 보아도 수백 이상은 되어 보였다.
게다가 처소 곳곳에 망루와 함께 타워도 설치되어 있었으니, 아무리 이안이라 해도 전면전은 자살행위라 할 수 있었다.
‘타워가 기본 타워처럼 보이긴 해도 저거 두세 대 맞으면 바로 사망이겠지.’
이안은 일단 높은 바위봉우리에 올라가 야영지의 모습을 관찰해 보기로 했다.
가장 허술한 지역이 어딘지 파악하고 야영지의 구조를 꿰고 있어야, 몇 명이라도 암살하고 빠져나올 수 있는 각을 재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할리, 저 위까지 올라가자. 최대한 숨어서 올라가야 해.”
크릉- 크르릉-!
할리의 등에 오른 이안은, 빠른 속도로 돌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하였다.
만년설이 쌓여 있어 무척이나 미끄러웠지만, 할리의 민첩성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그닥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타탓-!
“읏-차.”
이어서 봉우리에 오른 이안은 인벤토리에서 망원경을 꺼내어 들었다.
그것은 오래 전에 탐험가 릴슨에게서 빼앗다시피 받아 온 전설 등급의 유물 아이템이었다.
“흐음……. 야영지 내부 구조는 엄청 단순하네. 그나마 다행인 건가?”
마군 진영의 야영지는 삼면이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하지만 이안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더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아무래도 돌산으로 막혀 있는 부분의 방어 시설들이 취약했는데, 할리와 핀이 있는 이안은 얼마든지 돌산을 넘어 침입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 잡고 도망갈 때도 이편이 더 유리하고 말이지.’
망원경에 눈을 가져다 붙인 채, 진영의 곳곳을 열심히 탐색하는 이안!
그런데 잠시 후.
“……!”
뭔가를 발견했는지, 이안의 두 눈이 크게 확대되었다.
“오호, 이건 좀 꿀인데?”
야영지 정문을 통해 너댓 명 정도의 마군 NPC들이 나오는 것이, 이안의 시야에 잡힌 것이다.
이안은 망원경을 더욱 확대하여,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마군 정예병 쿠르투스/Lv.18(초월)
-마군 용사 포르기스/Lv.25(초월)
-마군 정예병 켈프/Lv.18(초월)
……후략……
그리고 그들의 면면을 확인한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망원경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초월 레벨도 생각보다 좀 높고, 용사 계급도 하나 껴 있잖아?’
마군 병사들의 전력이 생각보다 강력하자 긴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레벨들은 높아도 장비는 허술해 보이니, 충분히 해 볼 만할 거야.’
야영지의 정문을 나선 다섯 명의 마군병사들은, 정찰이라도 하기 위함인지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본 이안은, 곧바로 카카에게 오더하였다.
“카카, 들키지 말고 저놈들 따라붙어 줘.”
-알겠다, 주인.
“네가 안 죽는 것과 별개로 들키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니까, 거리 좀 유지하면서 따라붙도록 해.”
-정찰 원데이, 투데이 아니다, 주인아.
“후, 길드원들한테 이상한 말투는 또 배워 가지고…….”
카카는 수정구를 계속해서 켜 둔 채, 빠르게 놈들을 따라붙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할리에 다시 올라탄 이안도, 그 뒤를 바짝 쫓기 시작하였다.
‘야영지와 거리가 좀 벌어지면, 그대로 기습해야겠어.’
한차례 마른침을 삼킨 이안은, 전투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장비들의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오랜만에 전투다운 전투를 하게 될 것 같아, 긴장감과 동시에 기대감이 이안의 가슴속에 차올랐다.
* * *
“쿠르투스, 그쪽에도 딱히 마땅한 위치가 없지?”
“그렇습니다, 대장. 아무래도 본진 같은 입지는 찾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후우……. 하긴. 바위산을 등진 평지 같은 지형이 또 있기는 힘들겠지.”
이안이 발견했던 마군 진영의 다섯 병사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그들은 NPC병사들이었다.
“두 개 조로 나눠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대장.”
“흐음……. 켈프, 그러다가 천군 진영의 정찰대라도 만나면?”
“천군 진영은 서쪽 끝자락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벌써 놈들이 왔을 리는 없습니다.”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군.”
“우선 전진기지의 터를 빨리 찾는 것이 중요하니, 두 개 조로 이동하죠, 대장.”
“좋다. 그럼 쿠르투스랑 내가 북쪽으로 움직일 테니, 너희 셋이 서남쪽으로 이동해.”
“예! 대장!”
“알겠습니다, 대장!”
“너무 멀리 움직이진 말고. 무슨 일 있으면 곧바로 지원해야 하니까.”
“예썰!”
이 다섯의 NPC들의 역할은, 이안이 생각했던 것처럼 마군 진영의 정찰병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맡은 임무는, 서쪽으로 전진기지를 건설할 터를 찾는 것이었다.
전진기지를 차근차근 건설하면서 이 설원을 최대한 넓게 점거해야, 천군 진영과의 싸움에서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흐음……. 지형이 좀 별로더라도 자원이라도 풍부한 위치를 찾았으면 좋겠는데.”
세 명의 정예병들을 묶어서 서남쪽으로 보낸 ‘포르기스’는, 쿠르투스와 함께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부하들에게야 천군 진영을 만날지도 모른다며 주의를 요구하기는 하였지만, 사실 그럴 리 없다는 건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천군 진영에서 벌써 동쪽까지 넘어왔을 리는 없을 테니 말이지.’
하여, 온통 좋은 지형을 찾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마군 진영의 용사 포르기스.
그런데, 그렇게 오 분 여 정도가 지났을까.
“커헉!”
바위산을 뒤지던 포르기스는 후방에서 들려온 신음 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야!”
하지만 그가 고래를 돌렸을 땐.
피핑- 피피핑-!
이미 다섯 발도 넘는 불화살이 그의 흉갑에 틀어박힌 후였다.
퍼어엉-!
* * *
5인의 정찰대를 추적하던 이안은, 야영지와의 거리가 충분히 떨어졌다고 판단되자 마그비를 소환하였다.
화르륵-!
지금 상황에서 이안이 생각하는 최고의 전략은, 다름 아닌 게릴라 전략.
‘지형이 험준하니, 적당히 거리를 두고 숨어서 저격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겠어.’
심지어 다섯 명이 또 두 무리로 쪼개진 지금이라면, 이안은 절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용사 계급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일단 둘이 묶여있는 쪽부터 먼저 제거하는 게 맞겠지.’
할리에서 내려 바위틈에 자리를 잡은 이안은, 화염시를 소환하여 활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그의 첫 번째 타깃은 살짝 뒤쳐져 따라가고 있는 정예병 등급의 마군병사.
‘지금……!’
완벽한 각을 잡은 이안은, 당겼던 활시위를 망설임 없이 놓았다.
그리고 연속해서, 미친 듯이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하였다.
피핑- 피피핑-!
지금 이안이 자리 잡은 위치는, 두 명의 마군병사가 걷고 있는 위치보다 훨씬 더 높은 고지대였다.
하여 지금의 구도는 이안이 마군 병사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국.
때문에 이안의 화살을 피할 수 있는 장애물 따위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았고, 이안의 화살들은 정확히 목표물을 향해 쏘아졌다.
퍼퍽-!
-고유능력 ‘지옥의 화염시’를 발동합니다.
-‘마군 정예병 쿠르투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지옥불’ 표식이 생성됩니다.
-‘마군 정예병 쿠르투스’의 생명력이 892만큼 감소합니다!
-‘마군 정예병 쿠르투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지옥불’ 표식이 생성됩니다.
-정령 ‘마그비’의 고유 능력, ‘불의 악마’가 발동합니다.
-정령 ‘마그비’의 화염시가 ‘마군 정예병 쿠르투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지옥불’ 표식이 생성됩니다.
……중략……
-‘지옥불’ 표식이 최대치로 중첩되어, 표식이 강력한 폭발을 일으킵니다.
-‘마군 정예병 쿠르투스’의 생명력이 1975만큼 감소합니다!
-‘지옥의 화염시’ 고유능력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초기화됩니다.
한번 화염시를 소환했을 때, 이안이 연사할 수 있는 불화살은 최대 스무 발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안이 쏘아내는 불화살은, 정령력이 허락하는 한 거의 무한대라 할 수 있었다.
표식이 폭발하면 화염시 자체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초기화되어 버리니 계속해서 연사가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천룡군장을 2세트까지 맞춘 지금.
이안이 쏘는 불화살의 위력은 지랄맞기 그지없었다.
무려 18레벨이라는 높은 초월 레벨을 가진 마군의 정예병 쿠르투스의 생명력이, 벌써 50퍼센트 밑으로 떨어졌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것은 이안조차도 놀랄 만한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크, 저 녀석들 방어구가 허접해서 그런가? 딜 차지게 잘 박히는구먼!’
신이 난 이안은, 이번엔 타깃을 바꿔 ‘용사’계급의 마군병사를 향해 화살을 퍼부었다.
화살에 난자당한 쿠르투스가 황급히 몸을 굴러 바위 뒤편으로 숨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 거기 잠깐 숨어 있으면 형이 금방 안식을 찾아 줄게.’
이어서 신나게 화살을 퍼부은 이안은 숨어 있던 자리에서 용수철 튕기듯 튕겨 올라왔다.
원래는 계속해서 저격 위주로 녀석들을 사냥하려 했었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저놈들은 생각보다 약하고, 내 활은 생각보다 강했으니까.’
타탓-!
심지어 이안은, 쏘아낸 화살이 제대로 목표물에 맞는지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그대로 놈들을 향해 뛰어내리기 시작하였다.
화살은 이안이 굳이 보고 있지 않아도 어차피 목표물에 맞을 테니 말이다.
우우웅-!
이어서 이안이 든 천룡군장의 보주가 푸른 보랏빛으로 빛나기 시작하였다.
이안은 두 마군병사에게 세트 아이템으로 강화된 ‘천룡 소환’을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미리 분노를 꽉 채워 놓길 잘 했어. 이런 소규모 전투에선 분노를 채울 방법이 없을 테니까.’
천룡군장 세트의 고유 능력인 천룡 소환은, ‘천룡의 분노’를 100스택 쌓아야 발동시킬 수 있는 ‘필살기’ 격의 고유 능력이다.
그리고 이 스택은 적을 한 명 처치할 때마다 3포인트씩 쌓인다.
하지만 이안이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미리 스택을 쌓아 놓았기 때문에, 첫 번째 한 방은 이렇게 발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펄럭-!
높은 바위봉우리에서 뛰어내리자, 이안의 망토가 펄럭인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것인지, 커다란 바위 뒤쪽에 몸을 숨겼던 두 마군병사가 두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당연히도 그들이 이안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잘 가라, 친구들. 아마 이건 좀 아플 거야.”
콰아아아-!
이안의 손에 들린 푸른 보주에서, 이미 거대한 보랏빛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으니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