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7화 차원의 설원 (2) >
‘차원의 설원’맵은, 맵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눈이 쌓인 평원’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평선이 보일 정도의 광활한 평원이냐 하면, 그런 것은 또 아니었다.
평원의 곳곳에 눈 쌓인 바위산이 솟아 있었으며, 그 바위산의 사이로는 가파른 설곡(雪谷)들이 즐비했으니 말이다.
‘맵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말이지.’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 상대 진영을 만날까 조심했던 것이 민망할 정도로.
복잡하고 넓은 지형을 가진 ‘차원의 설원’ 맵.
그런데 두 곳 정도의 눈 덮인 계곡을 지났을 즈음.
이안은 드디어 이 황량한 계곡에서 어떠한 ‘존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안이 몬스터라고 오인할 뻔했을 정도로, 마치 ‘유령’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 보는 후배님이로구먼. 이 저주받은 땅에는 어쩐 일이신가?
-오호, 다시 전투가 시작될 시즌인가. 정예병을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자네, 이름이 뭔가?
이안에게 다가와 반가운(?)표정으로 말을 거는 유령들.
그런 그들을 향해, 이안은 이런저런 질문을 해 보기로 했다.
어쩌면 괜찮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거니와, 이들이 지금 이안이 찾고 있는 ‘트라피엘의 대장간 터’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안은 최대한 공손히 말을 떼기 시작하였다.
“전 이안이라고 합니다.”
-오호, 이안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거 같은 흔한 이름이로구먼.
-킬킬, 우리 중대에도 분명 이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었을 테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연신 킬킬거리며 웃어 대는 유령들.
그런 그들을 향해, 이안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선배님들…… 제가 궁금한 것들을 좀 여쭤봐도 될까요?”
그리고 이안의 물음에, 유령들은 무척이나 반기며 대답했다.
-오오, 물론이지.
-당연하지. 어서 말해 보시게.
일단 이안은, 이들의 정체를 먼저 알아보기로 했다.
대충 짐작 가는 바는 있었으나, 정확히 해 둬야 운신의 폭을 결정할 수 있을 테니 말이었다.
“제게 ‘후배님’이라 하셨는데…… 혹시 천군 진영의 용사님들이신가요?”
그리고 이안의 물음에, 유령들은 무척이나 기분 좋은 표정이 되었다.
‘용사님’이라는 이안의 말이, 너무 마음에 들었으니 말이다.
-하하, 우리를 용사님이라 불러 줘서 너무 고맙네만. 사실 우리는 자네와 같은 ‘정예병’이라네.
-후후, 우리 모두 용사가 될 ‘뻔’한 정예병들이지.
“용사가 될 뻔하셨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안의 반문에, 가장 앞쪽에 나와 있던 유령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자네는 지금 이 설원에, 용사가 되기 위해 온 것 아닌가?
“네에……?”
-이 설원에서 마군 놈들의 목을 베어, 공헌도를 쌓고 용사가 되기 위해서 여기 온 게 아니냔 말이지.
“아하, 그걸 말씀하시는 거였군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마군 녀석들의 목을 베고 용사가 되어야죠.”
그리고 유령의 그 말에, 이안은 이 상황이 하나둘 파악되기 시작하였다.
‘아하, 여기 이 유령들은 천군 출신의 정예병들이었고, 이 설원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사망하여 유령으로 떠도는 건가 보군.’
물론 이 유령들은 NPC이고 이안은 유저이다.
그 때문에 이안은, 이 유령들이 어떤 콘셉트로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넘어오는 천군 유저들에게 전투에 대한 도움을 주도록 되어 있는 건가 보네.’
아마 이 유령들이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유령들의 머리 위에는, 누구에게나 있는 생명력 게이지가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안의 눈에 이들은 무척이나 쓸모가 많아 보였다.
잘만 구슬리면, 정찰부터 시작해서 시킬 수 있는 역할이 많을 테니 말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이안은, 일단 필요한 정보를 물어보기 시작하였다.
“그나저나 선배님들, 혹시 제가 몇 가지 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까 대답했다시피, 궁금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물어보시게.
“예, 그럼 거두절미하고 여쭙겠습니다. 혹시, 선배님들께선 ‘트라피엘’이라는 대장장이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이안의 질문이 떨어짐과 동시에, 유령들은 무척이나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정확히는 ‘트라피엘’이라는 이름 때문인 듯했다.
-오오……? 자네가 어떻게 그를 아는 거지?
-트라피엘 님이라면 모를 수가 없지. 우리 천군 진영의 영웅인데 말이야.
-전설의 대장장이이신 트라피엘 님을 모른다면, 천군이 아니라 간첩이라 할 수 있지.
유령들의 반응에, 이안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트라피엘을 안다면, 그의 대장간 터를 알 확률도 높았으니 말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그 트라피엘 님이 쓰시던 ‘대장간 터’가 어딘지도 알고 계신가요?”
이안의 질문이 조금 의외였는지, 유령 중 하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그거야 어렵지 않게 찾아 줄 수 있네만……. 그게 왜 궁금한 겐가?
유령의 물음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이안.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하지만 결국 이 NPC들도 다 천군 진영의 인물들이었고.
그 때문에 이안은 솔직히 이야기해도 괜찮다고 판단하였다.
이안의 입이 다시 열렸다.
“전설의 무기……를 만들고자 합니다.”
-……!
-전설의……무기?!
“트라피엘 님을 아신다니, ‘프릭스의 검’에 대해서도 아시겠죠?”
이안의 말에, 유령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당연히 알지.
-프릭스의 검이라……. 크, 프릭스님의 용맹한 자태가 떠오르는군.
“그 ‘프릭스의 검’을 설계한 설계 도안이 필요합니다. 아마 트라피엘 님이 작업하시던 대장간 터에 그게 있을 거구요.”
유령들은 이제, 이안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이해한 듯 보였다.
단순해서인지, 표정에 감정이 아주 잘 드러나는 친구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유령들은, 이안에게 대답하기 전에 자기들끼리 뭔가를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저놈들……. 지들끼리 무슨 얘길 하는 거지?’
이안은 유령들이 나누는 대화가 궁금하여 귀를 쫑긋 세워 보았지만, 웅성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분명 소리가 작은 것은 아니었는데, 유령들끼리의 대화는 들을 수 없도록 설정되어 있는 듯했다.
‘그래도 저렇게 뭔가 얘기한다는 건. 도안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가?’
그리고 이안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회의(?)를 마친 유령들이 다시 이안의 앞으로 둥둥 떠 왔다.
이어서 가장 앞쪽에 선 유령이, 이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 프릭스의 검 설계 도안이 필요한 거지?
이안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린 그 도안을 찾아 줄 수 있다네.
“……!”
-한 반나절 정도 고생하면,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유령의 말에, 이안은 기분이 좋아졌다.
설원 맵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어서, 도안을 찾는 것이 힘들 줄 알았는데.
이렇게 술술 풀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령들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단, 그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네.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런 조건 없이 설계 도안을 구해 주리라고는, 처음부터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말씀하세요. 들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 드리죠.”
그리고 이안의 대답에, 이번에는 유령들이 잠시 머뭇거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뜸을 들이는 거야?’
이어서 잠시 후, 유령들의 조건을 들은 이안의 두 눈이 살짝 확대되었다.
-프릭스는 우리 천군 진영의 전설적인 용사일세.
“알고 있습니다.”
-그가 전설의 검을 쥘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그의 용맹이 출중했기 때문이지.
“……?”
-자네의 용맹을 증명해 보이게. 설원 동쪽의 마군 야영지에 가서, 마군들을 열 놈 이상 해치우고 돌아온다면…… 자네의 용맹을 인정해 주도록 하지.
그리고 유령의 말이 끝난 순간,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들이 울려 퍼졌다.
띠링!
-‘용맹을 증명하라!’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용맹을 증명하라! (히든/에픽)’
전설의 무기를 만들고자 하는 당신에게는, 과거 전설의 무기였던 ‘프릭스의 검’의 도안이 필요하다.
그리고 차원의 설원에서 만난 ‘천군 정예병의 망령’들은, 이 도안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망령들은, 당신의 용맹을 확인하기 전까지 도안을 찾아 줄 수 없다고 한다.
전설의 무기를 가질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망령들은 당신에게, ‘용맹’을 증명할 것을 제안하였다.
당신이 만약 혼자의 힘으로 ‘마군 정예병’들을 처치하고 돌아온다면, 그들에게 용맹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설원 동남쪽에 있는 ‘마군 야영지’로 가서 마군의 정찰대를 암습하자.
열 명의 마군들을 처치하고 돌아온다면, 망령들은 기꺼이 당신에게 도안을 넘겨줄 것이다.
퀘스트 난이도 : AAA(초월)
퀘스트 발동 조건 :
‘전설의 무기 제작 (에픽)(히든)’ 퀘스트 보유
‘정예병’계급 이상 보유
퀘스트 진행 조건 : 파티를 하지 않고 혼자 움직여야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제한 시간 : 360분
*‘마군’소속의 적 열 명을 처치하면 퀘스트가 완료됩니다.(유저, NPC 무관, 정예병 이상의 계급만 인정)
보상 : ‘프릭스의 검 설계 도안’, 공헌도 500
*유저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퀘스트의 내용은 어렵지 않았다.
마군 소속의 정예병 이상을 열 놈 처치하고 돌아오면, 그것으로 끝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안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무려 트리플A 등급의 퀘스트 난이도였다.
‘중간계에서 이런 난이도는 본 적이 없는데…….’
심지어 파티를 할 수 없다는 조건까지 붙어 있는 것을 보니, 얼마나 어려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절로 마른침이 넘어가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난이도인 것이다.
꿀꺽.
그리고 그런 난이도를 증명이라도 하듯, 유령들이 이안을 향해 몇 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이안, 무리는 하지 마시게.
“……?”
-전설의 무기를 가질 자격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일세.
-사실 우리는, 자네가 이 임무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는다네.
-혼자 마군 진영의 야영지에 침입한다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이기 때문이지.
앞에서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유령들을 보며, 이안은 더욱 오기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
‘난이도에 불가능이라고 찍혀 있어도 도전할 판인데, 고작 트리플A 가지고 저런 호들갑이라니.’
피식 웃은 이안은, 다시 유령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는 한마디 한마디에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기 시작하였다.
“제 걱정이라면 붙들어 매시고…… 저 없는 동안 도안이나 찾아 두시죠, 선배님들.”
-흠……?
“제가 금방 가서, 뚝배기 정확히 열 개 터트리고 올 테니까요.”
-뚝배기……? 그게 뭐야?
유령들이 웅성이든 말든, 이안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걸음을 돌렸다.
퀘스트를 받았기 때문인지, 미니 맵에는 어느새 마군 진영의 위치를 알리는 화살표가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