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2화 요새방어전(下) (8) >
카일란에서 유저가 몬스터를 처치하였을 때.
몬스터가 아이템을 드롭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로, 몬스터가 사망하는 즉시 킬에 관여한 유저의 인벤토리에 아이템이 지급되는 방식과.
둘째로, 몬스터가 사망한 자리에 말 그대로 ‘드롭’하는 방식이다.
때문에 처치된 아이언 스웜이 드롭한 모든 아이템들을, 훈이와 이안이 공유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력의 응집체’를 비롯한 몇몇 아이템의 경우 훈이와 이안의 인벤토리에 한 개씩 생성되었지만.
마력석과 결정체 등의 광물 류 아이템들은 이안이 싹 쓸어 담은 것이다.
아이언 스웜이 쓰러진 그 자리에 광물들이 그대로 드롭 되었으니.
현장에 있던 이안이 전부 수거하게 된 것.
이안은 빵빵해진 인벤토리를 응시하며 자기 합리화를 시전하였다.
‘아이언 스웜 잡는 데 들인 노력에, 내 지분이 90퍼센트는 되는 것 같으니…… 이 정도는 꿀꺽해도 괜찮겠지, 흐흐흣.’
심지어 성벽을 수리하기에 바빴던 로터스의 길드원들은, 아이언 스웜이 드롭한 광물들을 이안이 주워 담는 것조차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요새 안으로 들어오는 이안을 향해, 이런 어처구니없는(?) 으름장을 놓을 수 있었다.
“이안님, 봤죠? 우리 뇌전포탑 완성해 놓은 거요. 이제 얼른 마력석 여섯 개씩 내놓으시죠.”
“흐흐, 이안 형. 이거 마력석 채굴하다가 몬스터한테 쫓겨서 도망 온 각인데…….”
“맞아. 광산에서 지네같이 생긴 에픽 몬스터가 가끔 등장한다는 얘길 들은 적 있어.”
“그러고 보니…… 방금 우리가 잡은 지네가 그 지네 맞는 것 같네.”
왁자지껄 떠들며, 이안을 반겨 주는 로터스의 어린 양들.
하지만 그들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경직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무도 자신만만한 표정을 한 이안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으니까.
“자, 다들 모이시죠. 지금부터 마력석 분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끄럽던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마력석을 분배하겠다는 말은, 이안이 광물을 전부 구해 왔다는 말과 같았으니 말이다.
“정말…… 마력석 마흔 두 개를 다 채굴해 왔다고?”
“말도 안 돼……! 두 시간 만에 일곱 명분 퀘스트 템을 다 구해 왔다는 거야?”
당황한 표정으로 동시에 이안을 향해 반문하는, 헤르스와 레미르.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던 훈이만이, 평온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관전하고 있었다.
‘보나 마나 먼저 마력석 여섯 개씩 분배하고…… 남은 마력석들을 가지고 추가 노동계약을 체결하겠지.’
이미 한번 당해 봐서인지 이안의 계획을 줄줄이 꿰고 있는 훈이!
‘어디 보자, 오늘 포탈이 닫히기까지 남은 시간이 여섯 시간쯤 되니까…… 한 시간당 마력석 한 개씩, 추가로 노동계약이 체결되려나?’
훈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요새의 망루 위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불쌍한 길드원들이 뻔하기 그지없는 계약을 체결하는 동안, 새로운 에픽 몬스터라도 나타나지는 않는지 망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망루 위에 올라간 훈이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크으……!”
에픽 몬스터는 추가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수많은 차원의 망령들이 요새에 다가오지도 못한 채 녹아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새로 지은 뇌전포탑의 성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지직, 지지지직!
하늘에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뇌전과.
전기구이가 되어 녹아내리는 수많은 차원의 악령들!
-‘포악한 차원 불곰’의 생명력이 1275만큼 감소합니다!
-‘포악한 차원 불곰’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처치 기여도 : 50퍼센트
-기여도에 비례하여, 공헌도가 0.17만큼 증가합니다.
-‘차원의 악령’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처치 기여도 : 50퍼센트
-기여도에 비례하여, 공헌도가 0.21만큼 증가합니다.
……(후략)……
훈이는 시스템 창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공헌도들을 확인하고는, 흐뭇하기 그지없는 표정이 되었다.
일반 몬스터의 경우, 소수점 단위의 티끌 같은 공헌도를 줄 뿐이긴 하지만.
그것도 쌓이고 쌍히다 보면 충분히 유의미한 공헌도가 되어 모이게 되니 말이다.
“후후, 이거 히든 퀘스트치고 난이도가 너무 쉽잖아? 이대로 가다간, 오늘 포탈이 닫히기 전까지 공헌도 3천은 쌓아 버리겠어.”
3천이라는 공헌도는, 사실 어마어마한 수치이다.
이안이 그토록 고생했던 전투병에서 정예병으로 진급하는 구간이, 정확히 3천의 공헌도를 필요로 하였으니 말이다.
물론 정예병에서 다시 용사로 진급하려면 1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준의 공헌도가 추가로 필요하지만, 훈이는 그것이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다.
이 요새 연계 퀘스트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날이 지날수록 더 강력한 에픽 몬스터를 상대하게 될 것이고, 그만큼 더 많은 공헌도를 드롭할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오늘내일 중으로 공헌도 총합 1만은 뚫을 각이고…….’
훈이는 실실 웃으며 행복한 상상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대로 이안형 옆에만 붙어 있으면, 용사 계급 첫 번째 진급자는 내가 될 수도 있겠어……!’
과연 그렇게 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지만.
적어도 지금 훈이의 표정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어쨌든 아직까지도 공헌도 랭킹 1위는, 훈이의 것이었고.
그것은 무려 ‘세계 랭킹’이었으니 말이다.
* * *
“휘유, 오늘 저녁은 이거면 충분히 해결하겠지?”
뭘 그렇게 잔뜩 구매한 것인지, 양손에 빵빵한 비닐봉지를 든 하린.
동네 마트에서 장을 봐 온 하린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귀가하고 있었다.
‘진성이는 아직도 캡슐에서 안 나왔겠지? 아침에 보니까 무슨 요새 증축 퀘스트 하는 것 같던데…….’
하린은 최근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길드 파티에서 열심히 레벨을 올린 덕에, 이제 곧 용사의 마을에 입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하린의 레벨은, 무려 430대 초반.
더해서 초월 레벨도 두 개만 더 올리면 10레벨을 달성하게 되니, 이제 정말 용사의 마을 입성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12시 땡 하면 바로 저녁 식사 하고, 동네 공원이라도 끌고 가서 산책이라도 시켜야겠어. 요즘 진성이 배가 좀 나온 것 같던데……. 게임 실력을 유지하려면 몸 관리도 필수지.’
저녁 식사 시간치고는 뭔가 많이 이상한(?) 시간대를 계획한 하린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요즘 그녀는, 진성의 매니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위이잉.
익숙한 와이어 소리와 함께, 금방 25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띵동!
알림 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하린은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런데 잠시 후.
“……?”
복도에서 누군가와 마주친 하린은, 큰 눈을 꿈뻑거리며 자리에 멈춰 섰다.
한 층에 두 가구밖에 없는 아파트였기에 이웃이 누구인지 뻔히 알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남자가 옆집 문을 열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자의 외모는, 진한 이목구비를 가진 서양인의 그것이었다.
심지어 하린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무척이나 반갑게 인사하는 외국인!
“앗, 안녕하세욥!”
제법 유창한 한국말에, 하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아, 안녕하세요……? 혹시, 이 집에 이사 오시는 건가요?”
“넵. 내일부터 이삿짐 들어올 거예욥. 잘 부탁 드려욥!”
“그……러시구나……. 어쨌든 반가워요. 앞으로 잘 지내 봐요!”
하린이 스스럼없이 인사하자, 의문의 외국인은 더욱 환한 표정이 되었다.
인사를 마친 하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옆집 아주머니 이사 갈 생각 없어 보였는데……. 갑자기 왜 이사를 가신거지?”
그런데 하린이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기 전.
외국인이 다급히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 혹시, 제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욥?”
“부탁요?”
“옙.”
“말씀해 보세요. 들어나 보죠, 뭐.”
이어서 잠시 뜸을 들인 남자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그, 이안갓한테 말 하나만 전해 주세욥.”
“……?”
“게임 친구 ‘마크올리버’가 옆집에 이사 왔다구욥.”
* * *
충실한 로터스의 신하들(?)과의 교섭을, 성공리에 마무리한 국왕 이안.
한결 가벼운 마음이 된 이안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핀의 등 위에 올라 이동하고 있었다.
“후후, 포탈이 닫히기까지 앞으로 다섯 시간도 넘게 남았으니…… 그때까지 공장 풀가동하면 유일 등급 타워 서너 개는 더 완성할 수 있겠어.”
이안은 훈이의 예상과 거의 비슷한 계약 조건을 길드원들에게 내걸었다.
훈이가 예상했던 것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면, 노동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많은 광물을 지급하도록 옵션을 달아 놓은 것.
오래 일할수록 높은 효율이 나도록 설계하여, 일곱 명 중 단 한 명도 자정까지 이탈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크으, 이제 오늘 퀘스트는 클리어한 거나 다름없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이안은,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것은, 이안이 두 손으로 받쳐 들어야 할 정도로 커다란 크기를 가진 ‘쇳덩이’였다.
“티버가 이 녀석의 비밀만 풀어 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투박하고 무식하게 생긴 커다란 은빛 쇳덩이.
그런데 특이한 것은, 쇳덩이의 주변으로 은은한 푸른 기운이 넘실거린다는 것이었다.
‘아이언 스웜’의 심장
등급 : 영웅 (초월)
분류 : 잡화
차원의 숲에 서식하는 에픽 몬스터, ‘아이언 스웜’의 심장이다.
오랜 시간 마력석을 먹고 자란 아이언 스웜의 심장은, 강력한 차원의 힘을 품고 있다.
봉인된 아이템입니다.
(제련에 성공하면, 아이템의 봉인이 해제됩니다.)
유저 ‘이안’ 에게 귀속된 아이템입니다.
다른 유저에게 양도하거나 팔 수 없으며 캐릭터가 죽더라도 드롭되지 않습니다.
아이언 스웜을 처치하고 얻은 아이템들 중, 이안조차도 처음 보는 종류의 아이템은 두 가지였다.
지금 이안이 손에 들고 있는 ‘아이언 스웜의 심장’ 아이템과, 인벤토리 한편에 잘 보관되어 있는 ‘신비한 마력의 결정체’ 아이템.
그리고 그중 ‘신비한 마력의 결정체’는, 정보 창을 읽은 것만으로도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에픽 몬스터를 처치할 때마다 나오는 ‘마력의 응집체’와 마찬가지로, 상위 등급의 타워를 제작할 때 필요한 재료였으니 말이다.
아직 어떤 타워를 짓는 데에 필요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야 시간이 지난다면 자연스레 알게 될 터.
하지만 이 ‘아이언 스웜의 심장’은, 정보 창을 꼼꼼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어떻게 쓰이는 아이템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강력한 ‘차원의 힘을 품고 있다.’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알 수 없었으니 말이었다.
‘대체 이건 어디에 써야 하는 물건일까? 이것도 타워 건설에 쓰이는 물건이려나……?’
물론 이안 또한 광물 제련은 수없이 해 봤기 때문에, 굳이 티버에게 가지 않더라도 직접 이 녀석을 제련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안이 굳이 이렇게 티버에게까지 찾아가는 이유는, 아이템 정보 창에 떡하니 명시되어 있는 ‘등급’ 때문이었다.
무려 ‘영웅(초월)’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등급을 가진 아이템이었으니.
섣불리 제련을 시도하다가 망치기라도 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안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안을 태운 핀은 어느새 요새의 본진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