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8화 요새방어전(下) (4) >
* * *
차원의 숲 초입의 어느 한 구석.
이안과 훈이의 명령을 받은 소환수들은 열심히 벌목 작업에 한창이었다.
서걱- 서걱- 서걱-!
“아이, 오빠 잘 좀 해 봐. 그렇게 느려서 언제 백 개 채우겠어?”
“시끄럽다. 지금 열심히 하고 있는 거 안 보이냐.”
서걱- 서걱- 쿵-!
카르세우스의 어깨에 올라탄 채, 열심히 벌목 현장을 감독중인 엘카릭스.
그리고 그 둘의 옆에는 이안에게 받은 도끼를 열심히 휘두르고 있는 라이도 있었다.
“크릉, 이거 너무 어렵다. 그냥 발톱으로 부러뜨리면 안 될까?”
도끼질이 잘 되지 않자 짜증이 났는지, 연신 콧김을 내뿜는 라이.
그런 그를 향해, 엘카릭스가 고개를 저으며 다독였다.
“안 돼, 라이. 그렇게 했다가는 쓸모없는 재료만 늘어난다구.”
“크릉. 엘카릭스, 나 이거 그만하고 싶다. 적들과 싸우는 게 훨씬 더 재밌다. 크릉!”
“자꾸 그렇게 투덜대면 아빠한테 이른다?”
“크릉!”
그리고 이렇게 화기애애(?)한 이안의 소환수들 옆에는, 무식하게 벌목 중인 훈이의 언데드들도 있었다.
스하아아-!
“군주께서 기다리신다!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 버려라!”
“이 숲을 밀어서 평원으로 만들어 버리자!”
“키릭- 키리릭-!”
데스나이트들의 지휘 아래 마구잡이로 나무들을 쓰러뜨리는 훈이의 언데드들.
그런 그들을 본 엘카릭스는 언데드 진영의 총책임자(?)인 데스나이트 발람을 향해 핀잔을 주었다.
“아니, 발람! 흑단목이 아니면 필요 없다니까? 왜 아무 나무나 다 베고 있는 건데?”
“우리는 그런 거 모른다.”
“……?”
“흑단목은 나무가 아닌가?”
“맞……지.”
“그럼 나무를 베면 흑단목을 베는 거 아닌가?”
“에……?”
알 수 없는 논리를 펼치며, 나무란 나무를 닥치는 대로 베어 넘기는 훈이의 언데드들!
그렇게 차원의 숲 남쪽에 있는 봉우리 하나가, 점점 민둥산으로 변해 가기 시작하였다.
* * *
한편, 소환수들이 열심히 나무를 베고 있던 그 시각.
“흐음, 망령들을 따라가야 그 녀석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요새에 일꾼(?)들을 배치해 놓고 차원의 숲에 나온 이안은, 쉴 새 없이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차원의 망령.
이안이 망령을 찾으려는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아이언 스웜’을 찾아내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망령들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불이 들어와 있는 광산이 북동쪽에 몰려 있으니까……. 저쪽 길목에서 기다리다 보면 악령들의 움직임을 찾을 수 있겠지.’
빠르게 머리를 굴린 이안은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아이언스웜만 찾아낸다면 마력 결정 마흔 개쯤은 우습게 모을 자신이 있다.
하지만 본인이 정해 놓은 2시간이라는 시간은 그리 넉넉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자, 어디 있니, 친구야? 어서 모습을 보여 주렴.’
손에 들고 있는 번쩍이는 황금 곡괭이를 한차례 응시한 이안은, 히죽 웃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수비대장으로부터 받은 이 곡괭이의 성능은, 기본 곡괭이의 몇 배 이상을 보여 준다.
때문에 이번에 아이언스웜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이안은 정말 영혼까지 털어먹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이안이 분주히 걸음을 놀리고 있던 그때.
키릭- 키리릭-!
이안의 귓전으로 낯익은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찾았다!”
* * *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다.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남을 위해 손해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여럿 중 하나만이 살아남아야 한다면, 그것이 ‘내’가 아니면 의미가 없는 것이 사람인 것이다.
하물며 내가 양보해야할 대상이, 겨우 며칠 전에 처음 만난 생판 몰랐던 사람이라면.
그 ‘양보’라는 것이 정상적으로 이뤄질 리 만무하였다.
“후유, 결국은 이렇게 되어 버렸네.”
천군진영의 선두그룹이었던 료이카는 한숨을 푹 쉬며 차원의 숲을 나서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녀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룹의 리더 격이었던 요나스는 물론 페드릭과 리아스, 그리고 세이플까지.
그녀의 곁에는 이들 중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료이카는, 모든 랭커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선두 그룹을 제 발로 박차고 나온 것일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어째서 그렇게 된 것일까?
“이안 님과 훈이 님이 계셨더라면 조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려나…….”
료이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선두 그룹을 박차고 나온 것이 아니었다.
천군 진영의 선두 그룹은 그녀가 파티를 나오던 시점에도 이미 해산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바로 30분 전쯤 있었던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러니까 요나스님 말은 일단 두 명에게 공적치를 전부 몰아주자는 거죠?”
“그……렇죠. 지금 상황에서 다른 방법은 없지 않습니까? 다 같이 퀘스트에 실패하는 것보단, 그래도 한두 명이라도 다음 단계로 올라서는 것이…….”
“그럼 그 공적치를 몰아 받을 유저는 우리 중에서 누가 되는 건가요?”
“그야 방금 조금의 공헌도라도 획득한 저와 페드릭 님이 몰아받는 게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
“휴우, 그럼 저희 세 사람은, 그냥 희생하라는 소리군요.”
“그, 그렇다기보다는 공익을 위해서…….”
“공익은 무슨. 됐습니다. 저 그냥 파티 탈퇴하고 따로 방법 찾아보겠습니다.”
“세이플 님!”
“저도 마찬가집니다. 공익은 무슨 얼어 죽을 공익. 제 눈에는 그냥 두 분의 이기심밖에 보이질 않는군요.
“디아스 님……!”
“이렇게 된 거 그냥 각자도생하죠.”
랭커들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 료이카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다른 랭커들만큼, 욕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 명의 ‘랭커’로서, 다른 랭커들보다 앞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 욕심이 다른 랭커들만큼은 아니었으며, 그녀는 누군가와 갈등하고 반목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성향이었다.
때문에 만약, 세이플과 디아스가 요나스의 제안에 수긍했더라면 그녀는 군말 없이 대세를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말았고, 그것을 보기 싫었던 료이카는 가장 먼저 파티에서 탈퇴하여 요새를 향해 돌아가고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남은 시간은 오랜만에 푹 쉬어야겠어. 체력 비축해서 내일 다른 멤버들이랑 다시 트라이하는 게 훨씬 속 편할 것 같아.’
아직도 다투고 있을지 모를 네 사람이 떠오르자, 료이카의 입에서 다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우, 그 파티에는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아.”
또 한 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료이카.
그런데 숲을 벗어나 요새가 보이기 시작하자 료이카의 머릿속에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나저나 이안 님이랑 훈이 님은 대체 어디로 가신 걸까? 아무리 두 사람이 대단하다고 해도, 이번 퀘스트는 둘이서 깰 수 있는 퀘스트가 아닐 텐데…….”
두 사람을 떠올리자 다시 활력이 생긴 료이카는 접속을 종료하기 전에 두 사람의 행방을 한번 찾아보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만약 오늘 퀘스트를 트라이하지 않은 것이라면 내일 그들과 함께 퀘스트를 진행하고 싶었으니 말이다.
“히히, 훈이 님이랑 퀘스트하면 정말 재밌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커다란 마법사 모자를 푹 눌러쓴, 우스꽝스러운 훈이의 모습을 떠올린 료이카의 입에 피식 하고 실소가 떠올랐다.
* * *
독일 서버의 유명한 쌍둥이 랭커 듀오인 사라와 바네사.
항상 둘이서만 붙어 다니며 게임을 플레이하기로 유명한 그녀들은, 용사의 마을에서도 듀오를 고수하였다.
물론 불가피한 경우에 다른 랭커들과 함께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지간해서는 듀오로 모든 퀘스트를 진행한 것이다.
때문에 같이 마을에 진입했던 다른 랭커들보다 조금 속도 면에서 뒤쳐진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별로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게임은 즐기려고 하는 것이었고, 둘이 할 때보다 더 즐겁게 게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앞으로도 굳이 다른 유저들과 파티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사라 언니, 오늘 내로는 군락 섬멸 퀘 끝낼 수 있을까?”
“글쎄. 쉽지는 않겠지만, 뭐, 해 봐야지.”
지금 두 사람의 용사의 마을 계급은 신병 등급을 갓 벗어난 ‘전투병’ 등급이었다.
하여 그들이 진행 중인 메인 퀘스트는 C단계의 퀘스트인 군락 섬멸전.
군락 섬멸전 퀘스트는 사실, 이 용사의 마을 메인 퀘스트들 중 가장 평범한 퀘스트였다.
난이도가 쉬운 것은 결코 아니었으나, 인간계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구조로 퀘스트가 짜여 있었으니 말이다.
“포악한 불곰 사십 마리. 차원의 마령술사 스물. 차원의 악령 칠십이라…….”
“으, 불곰이나 악령은 잡기 쉬워도, 마령술사는 진짜 까다로운데…….”
“그러게. 그래도 어쩌겠어. ‘악령의 군락’에 들어가려면, 결국 킬 포인트는 다 채워야 하는걸.”
사라와 바네사는 퀘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퀘스트 정보 창에 쓰여 있는 좌표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퀘스트 정보 창에 차원의 숲 곳곳에 퍼져 있는 차원의 마령술사들이 위치한 곳이 좌표로 표시되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그들을 처치하려는 것이다.
“흣- 차!”
언제나처럼 바네사의 소환수인 ‘코르투스’에 올라탄 두 쌍둥이 자매는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오르기 시작하였다.
휘이이잉-!
거대한 그린드래곤인 코르투스의 날개가 펄럭이기 시작하자, 사방으로 휘청이는 차원의 숲 나무들.
“코르투스, 북서쪽으로 이동하자. 정확한 좌표는 가면서 다시 찍어 줄게.”
“알겠다, 주인.”
바네사의 명령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하는 코르투스.
그리고 다음 순간.
두 자매를 태운 코르투스는 북서향을 향해 날개를 펄럭이기 시작하였다.
코르투스는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제법 빠른 속력으로 허공을 가르기 시작하였다.
쉬이이익-!
“흐음, 역시 소환술사는 여러모로 편리하단 말이지.”
코르투스의 돌기 위에 여유롭게 앉아, 만족스런 표정으로 등을 쓰다듬는 사라.
그런 그녀의 모습에, 바네사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꾸하였다.
“편리한 게 아니라 대단한 거겠지. 소환술사는 대단한 존재들이라고.”
“그래, 어련하실까. 킥킥.”
퀘스트 창에 떠 있는 좌표를 찍어 놓은 채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두 자매.
하지만 두 사람의 여유로운 시간은 그리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쿠르릉- 쿠르르릉-!
지진이 나기라도 한 건지 사시나무 떨 듯 흔들리기 시작하는 숲속의 나무들.
“뭐, 뭐지? 보스급 몬스터라도 등장하는 건가?”
긴장한 사라는 코르투스의 등을 꽉 부여잡은 채, 마법을 사용하여 사방을 스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
그녀는 이 거대한 소음의 정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저, 저 남자는…… 이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