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7화 요새방어전(下) (3) >
* * *
이안과 훈이가 진행 중인 요새 증축 퀘스트.
이 퀘스트에서 두 사람이 얻는 공헌도는 무척이나 공평(?)했다.
타워가 처치한 모든 몬스터에 대한 공적치가 정확히 절반으로 양분되어, 두 사람에게 들어오니 말이다.
때문에 훈이 또한 이안과 마찬가지로 120의 공헌도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획득한 공헌도를 확인한 훈이의 입은 헤벌쭉 벌어져 있었다.
“크으, 레이져 타워 미쳤다, 미쳤어!”
훈이와 이안이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재료를 탈탈 털어 만든, 회심의 공성병기인 ‘마력의 광선 타워’.
이 타워와 함께라면, 지금부터 미친 듯이 공적치를 쓸어담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짜샤, 레이져 타워가 아니고 ‘마력의 광선’ 타워라고.”
“아씨.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 중요한 건 벌써 공적치가 200 가까이 쌓였다는 거지.”
“후후. 어쨌든 에픽 몬스터 잡았으니, 이제 한시름 덜었네.”
“맞아. 다음 에픽 몬스터가 바로 나오진 않을 테니, 그때까진 시간을 좀 벌은 것 같아.”
이 첫 번째 에픽 몬스터가 등장한 시각은, 이안과 훈이가 요새에 들어선 지 정확히 1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때문에 이안과 훈이는, 대략 1시간마다 에픽 몬스터 하나 정도를 상대하면 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흠,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게 여유 부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아.”
“하긴, 이 괴물 잡는 데 30분이나 썼으니, 1시간 텀이라고 가정하면 다음 에픽까지 30분도 채 안 남은 거네.”
“그러게.”
이안과 훈이는 의견을 교환하면서도, 망치질을 한시도 쉬지 않았다.
포악한 차원의 망령이 성벽에 입히고 간 피해가 원체 컸기 때문에, 이것을 복구하는 데만 해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땅- 땅- 따앙-!
“그나저나 저 타워 진짜 위력 한번 끝내준다.”
“크, 잡몹들 녹아내리는 거 보니 속이 다 시원하네.”
하지만 노동으로 인해 근육이 비명을 지를지언정, 두 사람의 표정은 싱글벙글하기 그지없었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들이 둘을 무척이나 즐겁게 해 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력의 광선타워’가 ‘포악한 차원 불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포악한 차원 불곰’의 생명력이 425만큼 감소합니다!
-‘포악한 차원 불곰’의 생명력이 509만큼 감소합니다!
-‘포악한 차원 불곰’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처치 기여도 : 100퍼센트
-기여도에 비례하여, 공헌도가 0.33만큼 증가합니다.
-‘포악한 차원 불곰’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기여도에 비례하여, 공헌도가 0.33만큼 증가합니다.
-공헌도가 0.33만큼 증가합니다.
-공헌도가 0.27만큼 증가합니다.
……후략……
에픽 몬스터가 아닌 일반 몬스터들은, 처치 기여도를 100퍼센트 채워 봐야 1의 기여도조차 주지 않는다.
하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듯 워낙 많은 숫자를 처치하다 보니, 이것만으로 쌓이는 공헌도도 벌써 50이 넘어가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이안과 훈이로서는 입가에 웃음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리고 페이즈가 넘어갈수록, 몬스터도 강해지고 공헌도도 올라가겠지.’
깡- 깡- 깡-!
이안은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쉴 새 없이 성벽을 수리하였다.
그리고 이안과 훈이가 망치를 두들길 때마다 여기저기 이가 빠져 있던 성벽에 다시 튼튼한 석재가 채워져 들어갔다.
쿠쿵-!
-성벽 외벽을 수리합니다.
-‘기본벽체’의 내구도가 150만큼 상승합니다.
-‘기본벽체’의 내구도가 172만큼 상승합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렇게 한 15분 정도가 지났을까?
건설 노가다 중에서도 최고의 노가다인 성벽 수리가 드디어 마무리되면서 이안과 훈이의 눈앞에 또다시 흥미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성벽 외벽의 수리가 완료되었습니다!
-현재 등급 : 기본 벽체
-현재 내구도 : 200,000/200,000
-‘기본 벽체’에 대한 이해도가 15만큼 상승합니다.
-‘기본 벽체’에 대한 이해도가 30이 되었습니다.
-‘견고한 벽체’ 등급으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합니다.
-필요한 자재 : 흑단목 150개, 차원의 조각 1,000개
“오호.”
“어?”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동시에 탄성을 내지르는 이안과 훈이.
두 사람이 놀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건축물을 ‘수리’하는 것으로도 이해도를 높일 수 있다는 점과 둘째, ‘차원의 조각’이라는 자재가 완전히 처음 보는 것이라는 점.
훈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이안을 향해 물었다.
“형, 차원의 조각은 어디서 구하는 걸까?”
“글쎄. 차원의 마력석 정제할 때도 저런 재료는 본 적 없잖아?”
“맞아. 광산에서 채광할 때도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저런 건…….”
이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뒤져 보아도 차원의 조각이라는 아이템에 대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뭘까? 기다리다 보면 알게 되려나?’
일단 ‘차원의 조각’에 대한 궁금증을 접어 둔 이안은, 타워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다시 요새 안쪽으로 들어갔다.
곧 다음 페이즈가 시작될 것이고, 그 전에 ‘마력의 석궁 타워’를 전부 ‘마력의 포탑’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게 목표였다.
“훈이, 내가 왼쪽부터 업그레이드 작업할 테니까, 네가 오른쪽부터 시작해.”
“알겠어, 형!”
티버의 대장간에서 마력석 제련을 시작했던 오전 11시부터, 거의 5시간 동안을 끊임없이 노동하는 이안과 훈이.
아마 카일란을 플레이하는 대다수 라이트 유저들이 두 사람의 하루 일과를 본다면 혀를 내두르며 두 눈을 의심할 것이었다.
평범한 근성과 열정으로, 절대 소화할 수 있는 분량의 노가다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때, 두 사람의 귓전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으, 드디어 찾았네.”
“두 사람, 여기서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예요?”
무척이나 낯익은 목소리에, 곧바로 시선을 돌리는 이안과 훈이.
“여, 왔어?”
“뭐야, 이안 형. 지원군이라는 사람들이 우리 길드원들……이었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들의 정체는 이안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헤르스와 로터스 길드원들이었다.
* * *
“아니, 이안이랑 훈이가 퀘 도와준다고 해서 따라온 건데…….”
깡- 깡-!
“왜 우리가 니들 퀘를 도와주고 있는 거냐고, 지금!”
깡- 까강- 깡-!
차원의 요새 A-11섹터에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노가다의 소리들.
훈이와 이안으로 구성되어 있던 2중주의 노가다 음악이, 어느새 총 9중주의 풍성한 오케스트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후, 역시 이안이를 따라오면 몸만 고생하는 건데…….”
“언제 우리가 그걸 몰랐던 적이 있었나요?”
“하긴, 그것도 그래요.”
깡- 깡- 까강-!
쉼 없이 투덜거리며 망치를 두들기는, 새로 투입된 노가다꾼들은 당연히 헤르스를 비롯한 일곱 명의 로터스 길드원들이었다.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망치질 소리만큼이나, 쉴 새 없이 투덜거리는 로터스의 수뇌부들.
하지만 투덜거리는 것과 별개로, 그들은 이안과 훈이 못지않게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새 이안이라는 고용주에게 길들여져 버린 것이었다.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뻔뻔한 얼굴로 말하는 이안을 향해, 분노(?)한 레미르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와, 이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네.”
“거짓말이라니, 누나.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는데?”
어이없는 표정이 된 헤르스가 옆에서 레미르를 거들었다.
“네가 나한테 분명히 우리 퀘스트 도와줄 테니 오라고 불렀었잖아. 설마 아니라고 발뺌할 거야? 나한테 채팅 로그도 다 남아 있거든?”
“맞아, 이 거짓말쟁이!”
“와아아, 국왕이 개국공신들을 농락한다!”
“로터스의 국왕 이안을 탄핵하라!”
“폐위시키자!”
헤르스가 팩트를 꺼내 들며 이안에게 항의하자, 요새 곳곳에서 노동하고 있던 노동자들(?)이 너도나도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실 이들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퀘스트를 도와주겠다는 말에 만반의 준비를 하여 달려왔건만, 영문도 모른 채 노가다를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요새 증축’ 퀘스트를 받지 않은 이들에게는 공헌도가 분배되지도 않아서, 일곱 명이 열심히 일한 대가가 전부 이안과 훈이에게 돌아가는 구조인 것.
하지만 금방이라도 파업할 기세인 노동자들을 상대하면서도, 이안의 표정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워, 워. 왜들 이러십니까. 전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
“저는 분명히, 여러분의 퀘스트를 도와주기 위해 부른 것이 맞으니까요.”
이안의 대답에, 레미르를 비롯한 노동자들은 순간적으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이안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지금 여러분이 받은 퀘스트는 ‘차원의 마력석’을 채굴해야 하는 퀘스트가 아닙니까?”
이안의 물음에, 레미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그, 그렇지.”
“그렇다면 오늘 밤 12시가 되기 전에, 한 사람당 여섯 개 씩의 차원의 마력석만 확보하면 되는 것이고요.”
이번에는 옆에 있던 헤르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맞아. 그건 그래.”
이어서 씨익 웃어 보인 이안이 말을 이어 갔다.
“자, 그럼 지금부터 딜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또다시 뜬금없는 말을 하는 이안을 향해, 레미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질문했다.
“딜? 무슨 딜?”
하지만 이안의 다음 말이 이어진 순간.
레미르의 두 눈은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 꺼낸 말이, 너무도 파격적이었으니 말이다.
“정확히 지금부터 2시간 내로, 제가 여러분에게 필요할 모든 차원의 마력석을 모아오도록 하죠.”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유신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안을 향해 반문하였다.
“그게 말이 돼?”
카윈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였다.
“맞아. 형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무슨 수로 우리 일곱 명의 퀘스트 조건을 혼자서 달성해?”
“그것도 2시간 만에……?”
지금 이 요새 안에서 이안을 제외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훈이뿐었다.
평소 같았다면 저 어린양들의 사이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훈이는 순간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후우, 저거 어디선가 많이 본 패턴 같은데…….’
심지어는 이안의 화법에 말려들어 가기 시작한 다른 길드원들에게 감정이입되기 시작한 훈이.
그런데 이안과 길드원들의 대화를 구경하던 훈이의 머릿속에, 문득 궁금증이 하나 떠올랐다.
‘그나저나 저 형은, 대체 그 많은 마력석들을 어디서 구해 오는 걸까?’
정신없이 퀘스트를 하다 보니 잊고 있었던, 마력석들의 출처에 대한 궁금증이 떠오른 것이다.
‘이번에는 알 수 있으려나……?’
그리고 훈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이안과 길드원들의 대화는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면, 어쨌든 네가 총 마흔두 개의 마력석을 2시간 내로 구해 올 수 있다는 거지?”
레미르의 물음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안!
“그렇다니까. 대신 내가 오기 전까지, 훈이를 도와서 ‘차원의 뇌전 포탑’을 만들어 둬야 해.”
그리고 두 사람의 옆에 있던 헤르스가 이 대화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래, 좋아. 그 뇌전 포탑인지 뭔지는 어떻게든 만들어 놓을 테니까, 넌 2시간 내로 마력석 마흔두 개 구해 와야 해.”
“오케이, 좋았어. 그럼 이걸로, 계약 성립!”
이안이 대체 무슨 수를 쓰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국 로터스 길드원들은 그 제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지금부터 광석을 캐러 간다 해도 퀘스트 실패 확률이 더 높은 마당에, 사실상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는 제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헤르스와 길드원들은 알 수 없었다.
방금 이안과 맺은 노예계약(?)이, 사실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