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7화 전설의 시작 (8) >
* * *
“다들 무사히 탈출하신 것 맞죠?”
“으, 갑자기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괴물이 튀어나올 줄이야……. 전 무사합니다, 요나스 님!”
“저도 무사해요.”
“저도 잘 빠져나왔습니다.”
파티장 ‘요나스’의 말에, 파티원들은 저마다 생존신고(?)를 하며 먼지구덩이 바깥으로 기어 나왔다.
그리고 뿌연 먼지를 뒤집어쓴 유저들 중에는 훈이도 있었다.
‘쳇, 확실히 괴물 같은 놈이기는 했지만, 공략해 볼 생각조차 안 하고 도망치다니.’
훈이의 입은 지금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파티의 리더인 요나스의 리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료이카 님의 광역힐이라면, 충분히 버티면서 약점을 찾아볼 여력이 있었을 텐데…….’
방금 전 훈이 일행은 ‘아이언스웜’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에픽 몬스터를 만났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의 상황처럼 모두가 먼지더미를 뒤집어쓴 채 광산 뒤편으로 피신하게 되었고 말이다.
‘저 요나스라는 녀석, 신의 말판 때부터 참 마음에 안 드는 놈이었어. 대체 저 실력으로 리더를 왜 하겠다고 한 거야?’
지금 파티의 리더인 요나스는 신의 말판 전장에서 천군 진영의 첫 턴을 받았던 돌격대장 유저였다.
전장이 열리자마자 바로 삽질하여 천군진영의 사기를 푹 꺾어 놓았던 장본인.
때문에 훈이는, 처음부터 요나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다만 너무 자신 있게 파티 리더를 자처해서 그에게 리더를 맡겨 놓았을 뿐.
‘이안 형이었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분명 싸워 봤을 텐데 말이지.’
게다가 항상 로터스의 길드 파티를 리드하던 이안의 통솔력과 비교하기 시작하자, 훈이는 녀석이 더욱 마음에 안 들었다.
훈이는 어느새 모든 기준을, 이안에 맞춰 비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속으로 툴툴거리던 훈이의 귓전으로 천상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훈이 님, 무사하셨네요. 다치신 덴 없는 거죠?”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료이카!
걱정 어린 그녀의 물음에, 훈이는 언제 불만이었냐는 듯 다시 헤실헤실 웃기 시작했다.
“다치다니요. 제가 말입니까? 어둠의 군주를 너무 과소평가하시는군요. 후후……!”
생명력 게이지가 절반도 채 남지 않았지만, 뻔뻔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활짝 웃는 훈이!
놀라운 것은, 료이카가 그런 훈이의 허세에 제법 장단을 잘 맞춰 준다는 점이었다.
“역시 훈이 님은 대단해요! 저는 괴물이 날뛰는 통에 정말 죽을 뻔했는데…….”
“하, 하하.”
료이카와 대화하는 훈이의 얼굴에는, 근심걱정 따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파티 리더의 오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며, 퀘스트가 잘 풀리지 않고 있음에도 말이다.
듣고 있노라면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천상의 소리와도 같은 료이카의 목소리.
하지만 료이카의 입에서 다시 ‘채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훈이는 잊고 있던 현실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제 괴물은 사라졌으니, 다시 빨리 채광하러 움직여야겠어요.”
“그, 그러게요,”
“다행히 바로 근처에 있는 광맥으로 차원의 기운이 옮겨간 것 같으니. 서둘러 움직여 보도록 하죠.”
료이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훈이는, 다른 파티원들을 한번씩 살펴보았다.
그들도 료이카와 마찬가지로 미니맵을 확인한 것인지, 빠르게 정비를 마치고 다음 광산을 향해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들 마음이 급해 보이긴 하네.’
현재 훈이의 인벤토리에는, 총 네 개의 차원의 마력석이 들어 있었다.
퀘스트 완료 최소 조건인 여섯 개까지도, 아직 두 개나 부족한 상황.
대부분의 파티원들이 훈이와 비슷한 상황이거나 한 개쯤 더 모자란 상태일 것이었다.
‘남은 시간은 5시간 정도……. 두 개 정도 더 캐는 게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진짜 아슬아슬할지도 모르겠어.’
훈이는 살짝 안타까운 표정으로 료이카를 힐끔 응시했다.
그가 알기로, 현재 료이카의 인벤토리에 있는 마력석은 총 세 개.
높은 확률로 퀘스트 실패가 뜰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인 것이다.
‘내가 세 개를 더 캐서 료이카 님께 하나 드려야 하는데…….’
카일란을 플레이한 후 처음(?)으로, 누군가를 걱정하기 시작하는 훈이.
한편 훈이의 걱정과 별개로 정비를 마친 파티원들은 다시 또 이동하기 위해 빠르게 대열을 갖추었다.
“또 어떤 에픽 몬스터가 나타날지 모르지, 흩어지지 말고 함께 움직입시다.”
짧게 오더를 마친 요나스가 앞장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뒤로 파티원들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훈이 또한, 마지못한 표정으로 파티의 뒤쪽에 따라붙었다.
파티가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혼자서 채광 퀘스트를 진행하는 건 무리였으니 말이다.
‘료이카 님만 아니었으면, 지금이라도 이안 형 찾아가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한차례 입맛을 다신 훈이는 옆에서 걷고 있는 료이카를 힐끔 응시하였다.
그러자 꿀꿀해졌던 기분이 다시 빠르게 정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헤헤.”
자신도 모르게, 또 한차례 헤벌쭉 웃음을 흘리는 훈이!
하지만 훈이의 실없는 웃음은 오래도록 이어질 수 없었다.
파티의 목적지였던 다음 광맥에 도착하자마자, 너무도 낯익은 뒷모습을 발견했으니 말이다.
“저, 저 형이 어떻게 벌써 여기에……?”
* * *
이안이 아닌 일반 유저들 기준에서 광산 진입의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1. 미니 맵에 떠오른 차원의 기운을 확인한다.
2. 차원의 기운이 모여 있는 광맥을 향해 이동한다.
3. 광맥에서 광물들을 갉아먹고 있는 악령들을 퇴치한다.
4. 돌아가면서 다른 몬스터들의 침입을 막고, 나머지는 채굴을 시작한다.
때문에 훈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미니 맵 확인하고 온 거면 우리보다 빠를 수가 없는데……?’
방금 전까지 훈이 일행이 있던 광맥은 이곳과 고작 5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 가장 가까운 광맥이었다.
때문에 훈이의 파티보다 빠르게 광맥에 도착해 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 훈이의 눈앞에 있는 이안은, 먼저 도착한 것을 넘어 여유롭게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이미 수십 마리도 넘는 악령들을 전부 때려눕힌 뒤 말이다.
미리 이곳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할 수 있었다.
‘저 형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공략법을 찾아낸 건가?’
훈이의 눈동자에, 또다시 불신의 빛이 어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당장 이안에게 달려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뿐.
하지만 심란한 훈이의 머릿속과는 별개로, 광산 안쪽에서는 규칙적인 곡괭이질 소리만이 묵묵히 퍼져 나올 뿐이었다.
깡- 깡- 깡-!
그리고 뒤늦게 이안을 발견한 다른 파티원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 대체 어떻게 벌써 와 있는 거지?”
“운이 좋았던 거 아닐까요? 마침 이 옆을 지나고 있었는데, 미니 맵에 불이 들어왔다든가…….”
“세이플 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빨리 광맥에 도착해 있을 수 없겠죠.”
“뭐, 어찌 됐든 잘되었네요. 저분이 악령들을 퇴치해 놓으신 덕에, 좀 편하게 자리 잡을 수 있겠어요.”
이안과 수많은 시간을 동고동락한 훈이는 그의 뒤통수만 살짝 봐도 이안임을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유저들은 달랐다.
신의 말판 전장에서만 잠깐 함께했던 랭커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고는 그저 ‘어떤 유저’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다가가자 모두가 이안을 알아볼 수 있었다.
광맥의 입구에서 망을 보고 있는(?) 이안의 마스코트 뿍뿍이를 발견했으니 말이다.
“앗, 저기!”
“뿍뿍이가 있어요!”
“안에서 채굴 중인 유저가 이안 님인가 봅니다.”
“오호, 이안 님도 드디어 정예 찍고 메인 퀘 진입하셨군요.”
뿍뿍이를 발견한 파티원들은 그의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뿍뿍이는 어느새 전 서버 카일란 유저들이 아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뭐 하니, 뿍뿍아?”
미국 서버의 랭커 세이플의 물음에, 뿍뿍이는 도도한 표정으로 대꾸하였다.
“뿌뿍. 여기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지키고 있었다뿍.”
“그, 그래? ”
생각지 못했던 대답에, 살짝 당황한 세이플.
하지만 뿍뿍이의 말이 이어지자, 훈이를 제외한 파티원들은 전부 피식거리며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뿍, 주인이 여길 지키라고 했지만, 예쁜 누나가 있으니 들여보내 주겠뿍.”
뿍뿍이가 등껍질을 씰룩거리며 료이카의 앞으로 다가왔으니 말이다.
훈이의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뿍뿍이는 모른 척 무시하였다.
그리고 뿍뿍이를 발견한 료이카의 두 눈에서는 하트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어머, 이안 님 거북이잖아! 너무 귀여워!”
“난 뿍뿍이다, 예쁜 누나. 거북이라고 부르지 말아 줬으면 좋겠뿍.”
“그래, 알겠어, 뿍뿍아. 저 안쪽에는 이안 님이 계신 거지?”
“그렇뿍. 우리 주인, 하루 종일 곡괭이질만 하고 있다뿍. 심심해 죽겠뿍.”
“오, 그래?”
이어서 이안에게 훈이 못지않게 경쟁심을 느끼고 있는 요나스는, 훈이에게 재빨리 궁금했던 부분을 물어보았다.
“그럼 뿍뿍아, 이안 님은 광물 좀 많이 채굴하셨니?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으셨을 텐데, 마력석 한두 개 정도는 채굴하셨을까?”
직접적으로 물어본 것은 요나스였지만, 그것은 파티원들 대부분이 궁금했던 부분이었고, 때문에 모두는 뿍뿍이의 다음 대답을 숨죽여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뿍뿍이의 말이 이어졌다.
“음, 마력석이 뭔지 잘 모른다뿍. 하지만 확실한 건 두 개는 아닐 거다뿍.”
뿍뿍이의 대답에, 훈이와 요나스의 얼굴에 동시에 화색이 돌았다.
두 개를 채굴하지 못했다면, 아직 하나 정도밖에 얻지 못한 것일 테니 말이다.
“그, 그래?”
“역시 그렇지?!”
거의 동시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하는 요나스와 훈이.
하지만 두 사람의 환희가 혼돈 속으로 사라지는 데는,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뿍. 왜냐면 아까 티버한테 갔다 오는 길에, 주인이 광석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라고 했다뿍.”
“……?”
“너무 많아서 걱정……이라고?”
“그렇뿍. 우리 주인 아까 수비대장한테 칭찬도 받았뿍.”
“뭐, 뭐라고?”
“주인한테 용사의 마을 최고의 광부라고 했뿍. 그리고 멋지게 생긴 곡괭이도 하나 선물해 줬뿍.”
뿍뿍이의 말에, 유저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안을 향해 쏟아졌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안이 쉴 새 없이 놀리고 있는 곡괭이를 향해 쏟아진 것.
그리고 다음 순간, 훈이의 입에서 허탈함이 가득 찬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고, 곡괭이가 황금색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