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2화 전설의 시작 (3) >
* * *
차원의 숲 깊숙한 곳의 광산.
광맥이 자리한 동굴의 안쪽에 긴장한 표정을 한 몇몇 유저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제법 격렬한 전투를 벌인 것인지 온통 땀으로 범벅되어 있는 유저들의 얼굴.
그리고 잠시 후 입구에 모인 그들은, 나직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크, 아무리 둘러봐도 광맥 입구는 하나인 것 같습니다.”
“이번엔 제대로 찾았군요. 여기라면 안정적으로 채굴을 해 볼 수 있겠어요.”
“자, 몬스터들이 몰려오기 전에 서두릅시다. 차원의 기운이 생성된 지 10분 정도 지났으니, 우리 네 사람이 5분 씩 돌아가며 입구를 지키면 되겠어요.”
“좋아요. 그러면 개인당 채굴 시간 15분 정도는 확보되는 거니까. 운 좋으면 마력석 두 개까지도 채굴이 가능하겠어요.”
“두 개는 무슨. 전 한 개라도 띄웠으면 좋겠네요. 이번에도 못 띄우면 진짜 위험해지는데…….”
의견을 교환한 뒤 빠르게 각자의 포지션으로 이동하는 유저들.
그리고 서둘러 채굴을 시작한 유저 중에는 가장 먼저 레이드 맵에 입장한 ‘훈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후, 단순 노가다 퀘스트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하드코어한 난이도일 줄이야.’
훈이 일행이 레이드 맵에 입장한 지는 벌써 4시간도 넘게 지났다.
하지만 그동안 훈이가 채굴할 수 있었던 마력석은 고작 두 개뿐.
앞으로 맵이 닫히기까지는 8시간도 채 남지 않았고, 그 안에 못해도 네 개의 마력석은 더 채굴해야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는 최소 조건이 충족된다.
마력석 채굴 페이스를 더 올리지 못한다면, 최소 조건조차 충족하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심지어 일행 내에서 훈이가 가장 많은 마력석을 채굴한 것이었으니, 퀘스트의 난이도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이 사실만 봐도 짐작이 가능했다.
‘이안 형 광산에서 알바(?)했던 경험이 있었기에망정이지, 채굴 처음 하는 거였으면 첫날부터 퀘스트 실패할 뻔했어.’
마계에 있는 이안의 광산에서, 종종 일손을 거들어 주었던(?) 이안의 충복 훈이.
때문에 훈이의 채광 실력은 제법 수준급이라 할 수 있었다.
깡- 깡- 까앙-!
훈이의 곡괭이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연신 동굴의 석벽을 두들긴다.
그리고 그런 훈이의 모습을, 옆에 있던 유저 하나가 부러운 듯 쳐다보았다.
“훈이 님은 흑마법사 클래스이신데, 어떻게 그렇게 곡괭이질을 잘하세요?”
신의 말판 전장에서 천군 진영의 ‘의무대장’ 포지션으로 활약했었던, 귀여운 외모를 가진 금발의 여성 유저 료이카.
그녀의 물음에, 훈이의 양 볼이 붉게 물들었다.
“하, 하핫. 제가 이래 봬도 한때 이안 형의 노예……. 아니, 그게 아니고. 원래 어둠의 군주는 못하는 게 없거든요.”
마치 여자라는 생물과 처음 대화하는, 남중, 남고 나온 공대생처럼 온몸을 움찔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훈이였다.
그런데 평소에는 여성 유저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던 훈이가, 어째서 이렇게 굳어 버린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훈이는 료이카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해 버린 것이다.
‘너, 너무 예쁘잖아……!’
훈이의 주변에는 사실 ‘미녀’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여성 유저들이 제법 많았다.
로터스의 부길드마스터인 피올란부터 시작해서, 이안의 여자 친구인 하린. 그리고 홍염의 마도사인 레미르까지.
게다가 길드원들 중에서도 제법 미녀들이 많았으니 나름 꽃밭(?)에서 게임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훈이는 단 한 번도 누가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훈이가 사랑에 빠지기엔, 훈이 주변에 있는 여성 유저들의 나이가 너무 많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다들 훈이를 꼬맹이 취급하니 그 어떤 감정이 싹트려야 싹틀 수 없는 것.
하지만 료이카는 달랐다.
훈이보다 두세 살 정도 많은 듯 보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동년배’라 할 만했던 것이다.
게다가 꼬맹이 취급하는 누나들과 달리, 꼬박꼬박 ‘님’ 자를 붙이며 훈이에게 사근사근 대해 주니, 이것은 그의 인생에 머리털 나고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역시 훈이 님은 못하는 게 없군요. 훈이 님 옆에서 채굴하는 것 좀 배워야겠어요.”
방긋 웃으며 훈이의 옆에 자리를 잡고 곡괭이질을 시작하는 료이카.
그런 그녀를 힐끔 보며, 훈이는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래, 이 차원의 거인 레이드는 기필코 내가 캐리하고 말겠어. 이번만큼은 이안 형한테 양보할 수 없지.’
신의 말판 전장에서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사랑의 힘으로 다시 찾은 훈이.
훈이는 의욕을 활활 불태우며, 다시 곡괭이질을 시작하였다.
깡- 깡- 까앙-!
지금쯤 이안도 정예병이 되어 이 숲에 진입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혼자서는 퀘스트 진행이 쉽지 않을 터.
운 좋게 먼저 진입한 유저들을 만나거나 후발대와 함께한다면 다행이지만, 혼자서 이 퀘스트를 진행했다가는 높은 확률로 클리어에 실패할 것이었다.
‘이안 형은 지금 뭐하고 있으려나? 이제 슬슬 맵에 들어왔으려나?’
하지만 이안을 떠올리고 생각할수록, 훈이는 다시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설마…… 벌써 채굴을 시작한 건 아니겠지?’
훈이는 문득, 이안이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이 레이드 맵 안에 들어와 있는 한 이안의 근황을 알아볼 방법은 없었다.
‘차원의 숲’ 맵에 진입하는 순간, 모든 종류의 메시지가 차단되니 말이다.
‘휘유, 그래. 일단 이안 형은 신경 쓰지 말고 내 일이나 열심히 하자. 적어도 오늘까지는, 내 공헌도가 더 높을 테니 말이야.’
가까스로 평정을 찾은 훈이는, 다시 곡괭이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훈이가 무아지경에 빠져든 순간.
띠링-!
-‘차원의 마력석’을 채굴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차원의 마력석 : 3/6
훈이를 기분 좋게 만드는 한 줄의 시스템 메시지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 * *
차원의 숲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은 차원 마력을 좋아한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에너지원이기 때문이었다.
차원 마력이 충만한 광물을 섭취할수록 더욱 강력한 몬스터로 진화하는 차원의 숲 몬스터들.
그리고 그렇게 최대한 많은 차원 마력을 섭취한 몬스터들은, 다시 거인의 먹잇감이 된다.
-그리하여 충분한 차원 마력이 모이게 되면, 잠들어 있던 차원의 거인이 깨어나게 되는 것일세.
티버가 했던 이야기를 복기해 본 이안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후후,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이동 중에 발견한 ‘차원의 악령’을 따라 숲의 서쪽 끝에 있는 광산까지 도착한 이안.
그리고 지금 이안의 시선은 시야 한쪽 구석에 떠올라 있는 미니 맵을 향해 있었다.
우웅- 우우웅-!
작은 공명음과 함께, 미니 맵에 떠올라 있던 다섯 개의 푸른 기운이 스르륵 하고 사라졌다.
이어서 사라진 푸른 기운들은 다시 새로운 위치에서 천천히 점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섯 개의 푸른 빛 중 하나는 지금 이안이 도착해 있는 광맥의 위에서 밝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안이 미리 도착한 이 광맥에, 차원의 마력이 생성된 것이다.
‘이 악령들은, 차원의 마력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미리 알고 있었던 거야.’
이안이 악령들을 쫓아온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어딘가를 향해 정신없이 이동하는 악령들을 보며, 그들이 차원 마력이 움직이는 방향을 향해 이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악령을 쫓는 과정에서, 한 가지의 사실도 더 유추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몬스터들 중 ‘차원의 악령’만이 차원 마력의 이동을 미리 느낄 수 있다는 사실.
서쪽의 텅 빈 광맥을 향해 정신없이 움직이는 악령들과 달리 다음에 만난 다른 몬스터들은 이미 차원 마력이 들어차 있는 광맥으로 이동하고 있었으니, 차원 마력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은 ‘악령’들 뿐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안의 짐작들은, 보다시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크, 이 사실만 잘 이용하면, 제법 많은 시간을 세이브할 수 있겠어.’
차원의 마력이 어떤 광맥으로 이동할지 알 수 있다는 것은 퀘스트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엄청난 이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마력이 발현될 광맥에서 미리 기다렸다가 채굴한다면, 못해도 10분 정도는 시간을 세이브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마력이 광맥에 머무는 시간은 고작 30분밖에 되지 않으니, 그 10분은 무척이나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카카에게 악령을 찾아다니라고 명령을 내려 둬야겠어. 이렇게 하면 시간 낭비 없이 옮겨 다니며 채굴을 할 수 있겠지.’
생각지도 못했던 발견에, 이안은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다.
‘이거, 시작부터 운이 따라 주는데?’
이것은 물론 이안이 신중하게 움직인 덕에 발견해 낸 사실이었지만, 우연적인 요소도 무시할 수 없었다.
만약 이안이 처음 만났던 몬스터가 악령이 아니었다면, 높은 확률로 이런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심지어 이러한 트릭은 콘텐츠를 개발한 기획자들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기획자들은 단지 몬스터들을 순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이런 요소를 만들었던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그저 몬스터 별로 차원 마력에 반응하는 속도를 다르게 설정해 놓았던 것일 뿐이었는데, 이안처럼 그 차이점을 이용해 퀘스트를 공략하는 유저가 있으리라고는, 아마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었다.
어쨌든 의외의 수확에 기분이 좋아진 이안은, 망설임 없이 광산의 안쪽으로 진입하였다.
광산의 안쪽에는 어느새 쏟아져 들어온 악령들이 정신없이 광물들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진짜 게걸스럽게도 처먹는군.’
그런데 재밌는 것은, 녀석들이 광물을 흡수하는 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이안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면 혹시……. 이놈들이랑 싸우지 않고도 광물을 채굴할 수 있는 건가?’
하지만 이안의 기대는 금방 깨어지고 말았다.
이안이 광물을 채굴하기 위해 곡괭이를 꺼내 든 순간, 악령들이 일제히 적의를 드러낸 것이다.
“후, 돼지 같은 놈들. 밥그릇 뺏기기는 싫은가보네.”
피식 웃은 이안은 다시 곡괭이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일전에 만들어 두었던, ‘천룡군장의 보주’ 아이템을 장착하였다.
“좋아. 이놈들부터 먼저 쓸어 버리고, 나도 슬슬 채굴을 시작해 볼까?”
그러자 이안을 적으로 인식한 악령들이 서서히 그를 둘러싸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안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다수의 일반 필드 몬스터를 상대로 한 PVE는 이안의 전문 분야였으니 말이다.
크륵- 크르륵-!
기괴한 울음소리를 흘려 대며, 점점 이안을 구석으로 몰아넣는 악령들.
그런데 그 순간.
“……!”
이안의 눈앞에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내용을 담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광맥을 타고 차원의 마력이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광산이 머금은 차원의 마력이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에픽 몬스터 ‘마력의 아이언스웜’이 깨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