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0화 전설의 시작 (1) >
이안은 원래 유명했었다.
특히 한국에서만큼은, 카일란을 플레이하지 않는 사람조차도 이안이라는 이름을 대부분 한 번쯤 들어 봤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해외에서 이안이라는 이름은 ‘아는 사람들만 아는’ 이름이었다.
중간계가 열리기 전까지 카일란에는 다른 서버와 연계할 수 있는 콘텐츠 자체가 없었으니, 다른 서버의 랭커가 얼마나 뛰어나건 대부분의 라이트 유저들은 관심 밖의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세계 유저들이 함께 경쟁할 수 있는 중간계라는 통합 서버 개념의 콘텐츠가 만들어졌고, 그것이 마치 E스포츠처럼 세계 카일란 유저들의 ‘즐길 거리’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신의 말판’ 전장의 전투에서 이안은 그야말로 ‘슈퍼 플레이’를 전 세계 유저들에게 선물하였다.
그 파급력이 얼마나 컸는지는, 각종 외신들이 쏟아낸 헤드라인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한국 서버의 랭커 이안, 세계 무대를 평정하다!
-신의 말판, 그곳은 사실상 이안의 말판이었다.
-각국 랭커들의 자존심 대결. 그 첫 번째 승자는 한국 서버의 랭커 이안!
-한 병사의 진격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 가장 큰 항공사인 아메리칸 에어.
호화스럽기 그지없는 기내의 퍼스트 클래스에서 태블릿으로 기사를 읽던 한 남자가 짧은 감탄사를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크으! 헤드라인 한번 요란하네. 하긴, 졸병으로 시작해서 대장군 목까지 따 버렸으니, 사람들이 열광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수준이지.”
까만 머리에 새하얀 피부.
이국적이고 귀티 나는 외모의 남자는 태블릿을 탁자에 올려놓고 의자 옆의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아래로 밀려 내려간 의자는 어느새 침대가 되어 남자의 몸을 편안하게 뉘여 주었다.
“이안이라……. 어서 그를 만나고 싶은데.”
마치 산타할아버지에게 받은 선물상자를 여는 다섯 살 배기 어린아이처럼, 초롱초롱 눈을 반짝이는 남자.
불이 꺼진 태블릿에는, 남자의 이름인 듯 보이는 올리버Oliver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 * *
세계 랭커들이 본격적으로 격돌한 첫 번째 콘텐츠인 신의 말판 전장.
이안은 이곳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세계적인 스타로 급부상하였지만, 정작 본인은 그러한 사실이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전장 최후의 전투가 끝난 지 벌써 꼬박 사흘이 다 되어 가지만, 이안은 집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집 바깥은커녕, 캡슐에서조차 거의 나오지 않는 이안.
다만 이안의 관심사는 용사의 마을 공적치를 조금이라도 더 쌓는 것뿐이었다.
“으, 이제 드디어 진급인가.”
정보 창에 떠올라 있는 공적치를 확인한 이안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중얼거렸다.
신의 말판 전장을 캐리하고 이안이 받은 공적치는, 무려 2천을 육박하는 수준.
마지막 요일전장에서는 그만큼 많은 공적치를 얻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도합 3천이 넘는 경험치를 쌓는 데 성공했다.
전투병을 넘어 ‘정예병’의 계급에 드디어 도달하게 된 것이다.
정예병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다른 랭커들과 마찬가지로 메인 퀘스트에 합류할 수 있게 된 것.
띠링-!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정예병’ 계급으로 진급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장비 상점에서 ‘정예병’등급의 아이템을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군단장’이 지휘하는 ‘차원의 거인 레이드’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후략……
아직까지 정예병에 도달한 랭커가 열 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메인 퀘스트를 하지 못한 이안이 벌써 정예병이 되었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속도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어마어마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전혀 만족할 수 없었다.
아직도 그의 공적치는 훈이에 비해 많이 뒤쳐져 있었으니 말이다.
무려 중간계의 모든 인간 유저들 중 가장 많은 공적치를 보유하고 있는 훈이!
‘다른 유저는 몰라도 훈이보다는 앞서가야 체면이 서는데…….’
충복(?)보다 주군이 뒤처진다는 것은 자존심상 용납할 수 없는 법이었으니, 이안은 더욱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사실 훈이가 아직까지 공적치 선두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이안의 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최후의 전투에서 이안이 훈이와의 퓨전클래스를 이용한 덕에, 전투 기여도가 엄청나게 높게 책정되었으니 말이다.
이안 덕에 무려 1,340이라는 어마어마한 공적치를 획득한 훈이.
총 1950의 공적치를 획득한 이안 다음으로 많은 공적치를 획득한 데다 계속해서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했으니 훈이의 공적치가 압도적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자, 그럼 나도 이제 메인 퀘스트에 발을 한번 담가 볼까?”
기분 좋게 웃음 지은 이안은, 곧바로 용사의 마을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안의 목적지는 레이드 포털이었다.
용사의 마을 여섯 번째 메인 퀘스트인, ‘차원의 거인 레이드’ 퀘스트에 참여하려는 것이다.
‘다른 랭커들이 이십분 쯤 전에 들어갔을 테니, 최대한 서둘러 움직여야겠어.’
차원의 거인 레이드 포털은 용사의 마을 광장의 북쪽에서 매일 정오에 오픈된다.
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정예병’ 계급을 단 유저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오늘 정오에 열린 포털이 처음 열린 포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포털 앞을 지키던 NPC ‘프라임’이 이안을 알아보고는 반갑게 인사하였다.
“오오, 이안. 그대도 드디어 정예병으로 진급하였군.”
“예, 방금 진급했습니다.”
“축하하네. 자네 정도 실력자는 진즉에 진급되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의아했었다네.”
프라임의 말을 들은 이안은 순간 욱 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이안을 훈련소에 넣어 주기만 했었다면, 지금쯤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은 훈이가 아닌 이안이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안의 부글거리는 속을 알 리 없는 프라임은 호의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온 이유는 역시, 레이드에 참여하기 위함이겠지?”
NPC와 실랑이해 봐야 손해 보는 것은 유저일 뿐.
잠깐 치밀어 오른 분노를 삭인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조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원정대에 합류하고 싶습니다.”
이안의 말에, 프라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뭐, 정예병이라면 제 앞가림 정도는 알아서 할 테니……. 좋아. 게이트를 열어 주도록 하지.”
말을 마친 프라임은, 천천히 손을 뻗어 포털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푸른 기운이 포털에 휘감기기 시작하더니, 닫혀 있던 게이트가 스르륵 하고 열렸다.
그 앞에 다가선 이안은 걸음을 내딛기 전 프라임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건네었다.
“고맙습니다, 프라임. 차원의 거인인지 뭔지, 목 따서 돌아올게요.”
“후후, 그 전에 자네 목이나 안 달아나게 잘 지키시게. 어차피 오늘은, 거인 그림자도 만나기 힘들 테니 말이야.”
“…….”
프라임의 의미심장한 말을 들은 이안은, 곰곰이 머리를 굴려보았다.
‘거인 그림자도 볼 수 없다는 게, 과연 어떤 의미인 걸까?’
그리고 이안이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그의 그림자는 어느새 포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 * *
띠링-!
-‘차원의 요새’에 입장하셨습니다.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차원의 거인 레이드’ 퀘스트가 자동으로 시작됩니다.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이안의 눈앞에 주르륵 하고 시스템 메시지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메시지들이 지나간 뒤, 처음 보는 종류의 퀘스트 창이 이안의 눈앞에 번쩍 나타났다.
–(F)차원의 거인 레이드–1
퀘스트 분류 : 메인 퀘스트.
퀘스트 발생 조건 : ‘정예병’ 계급의 유저.
획득 가능 공적치 : 600~1,200
용사의 마을 북쪽 끝에는 흉포하기 그지없는 ‘차원의 거인’이 잠들어 있다.
그리고 마을 북쪽에 지어져 있는 차원의 요새는 이 거인의 난동을 막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견고했던 요새는 무척이나 노후되었다.
거인이 잠들어 있는 동안 관리에 소홀했던 나머지, 곳곳이 낡고 부식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차원의 숲 안쪽에서 하나둘 몬스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분명, 거인이 깨어나기 시작했다는 의미.
거인이 깨어나기 전에 요새를 전부 수리해야 거인의 공격으로부터 용사의 마을을 지킬 수 있다.
그리고 요새를 수리하기 위해선 차원의 숲 곳곳에 있는 ‘차원의 마력석’을 채굴해 와야 한다.
요새에서 숲을 향해 보내는 ‘파견대’에 지원하여 충분한 양의 마력석을 채굴해 오자.
많은 양의 마력석을 채굴할수록, 요새의 방어력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퀘스트 성공 조건 : 생존, 여섯 개 이상의 마력석 채굴.
퀘스트 보상 : 마력석 한 개 당 공적치 100포인트.
*임무 과정에서 도태될 시, 획득 공적치가 100퍼센트 삭감됩니다.
*임무 진행 도중 사망 시 퀘스트에 실패하게 됩니다.
*퀘스트 실패 시 일주일 뒤에 다시 도전이 가능합니다.
퀘스트 내용을 단숨에 읽어 내려간 이안은, 순간 의아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레이드라더니, 갑자기 웬 요새건설 퀘스트가 뜨는 거야?’
‘레이드’라는 수식어를 가진 퀘스트의 내용이 뭔가 그 단어의 뜻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퀘스트 창을 세심히 살펴보자, 몇 가지 사실을 추측해 낼 수 있었다.
‘일단 퀘스트 이름 뒤에 –1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는 걸 보니, 며칠 동안 연계되는 퀘스트인 것 같고……. 실패 시 일주일 뒤에 재도전 가능한 걸 보니, 연계 퀘스트 리셋 주기가 일주일인가 보네.’
당장 도움이 될 만한 정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질구레한 정보들까지 머릿속에 꼼꼼히 기억해 두는 이안이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이안은, 요새 안쪽에 있는 막사를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차원의 마력석’이라는 것이 요새의 바깥쪽에 있는 것은 분명했으나, 최소한의 정보는 수집하고 나가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었다.
먼저 퀘스트를 진행 중일 훈이에게 정보를 얻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퀘스트 중에는 개인 메시지가 차단되는 듯했다.
‘하다못해 마력석인지 뭔지, 채굴할 곡괭이라도 얻어 가야 될 거 아냐.’
복잡한 구조를 가진 요새를 빙그르르 돌아 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안은, 사령관 깃발이 꽂혀 있는 막사를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이안이 막사에 들어서기 전.
막사를 지키는 경비병들이 엄중한 표정으로 이안을 제지하였다.
“이곳은 사령관님의 막사이다. 정예병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야.”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기는 했으나, 이안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안에게 필요했던 것은 사령관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마력석을 채굴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 말이다.
이안은 앞을 막아선 경비병을 향해 곧바로 궁금한 부분을 물어보았다.
“난 용사의 마을에서 지원 나온 병력입니다. 차원의 마력석을 채굴하고 싶은데, 정보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안의 공손한 물음에, 경비병은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대답하였다.
“아하, 마을에서 지원 나온 친구였군. 마력석 채굴은 해 본 적이 없나 보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여기가 아니라 저쪽 붉은 깃발이 꽂혀 있는 막사로 가 보시게.”
이안의 시선은 자동으로 경비병이 가리킨 곳을 향했고, 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마침 대장장이 ‘티버’가 지원을 나와 있으니, 그에게 물으면 친절히 설명해 줄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