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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의 전장 (2)
* * *
‘이번에는 또 어떤 방식의 전투일까?’
수요일의 요일 전장에 입장하기 위해, 광장에 모인 직후.
이안이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바로 이것이었다.
‘거울전장보다 더……. 아니, 그만큼 참신한 콘텐츠가 또 나올 수 있으려나?’
‘차원의 거울’ 전장은, 이안조차 감탄할 정도로 참신한 콘텐츠였다.
그런 콘텐츠를 한 번 겪고 나니, 이번 요일 전장에도 기대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안의 귓전에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 모두 모였는가?”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와 함께, 광장의 단상에 올라서 있는 한 남자의 모습.
이안이 생각하기에 그는, 지금껏 이 용사의 마을에서 만났던 어떤 NPC보다도 직책이 높은 것 같았다.
‘파커의 직책이 중대장이었으니, 저 녀석은 대대장쯤 되려나?’
용사의 길에 있었던 카미레스에 비교할 바는 아니었지만, 착용하고 있는 갑주를 비롯한 군장들이 무척이나 화려하고 번쩍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안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천룡부장天龍副將 한센이다. 난 지금부터 여러분들 중, 전장에 참여할 용사를 선출할 것이다.”
한센이라는 남자의 말을 들은 좌중은 동시에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당연히 다 같이 전장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는데 ‘선출’ 한다는 이야기를 하니 말이다.
그리고 유저들이 뭐라 판단을 하기도 전에, 한센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여기 너, 너. 그리고 너. 이쪽으로.”
유저들이 벙 쪄 있는 사이, 한센의 용사 선출은 무척이나 신속하게 이뤄졌다.
그리고 이안 또한 그에게 불려, 단상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흠, 그래. 여기 이 친구까지 스물넷. 맞지?”
한센의 물음에, 중대장 파커가 바짝 군기 든 모습으로 대답했다.
“예, 장군님!”
그리고 좌중을 한번 둘러본 한센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떼었다.
“좋아, 그대들은 이쪽 푸른 게이트로. 나머지는 그 뒤쪽에 있는 백색의 게이트로 들어가도록.”
이안뿐 아니라 그 누구도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 착착 진행이 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상황에 대한 설명은 일체 없었으니 말이다.
NPC들이 너무 불친절하달까.
‘지금 이 광장에 모인 인원이 총 오십 명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스물네 명만 따로 뽑은 이유가 뭐지?’
이안은 머리를 열심히 굴려 추측해 보려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안의 옆에 있던 훈이도 마찬가지였다.
“형, 이게 지금 대체 뭐하는 걸까?”
“글쎄…….”
“이거, 뽑힌 게 더 좋은 건 맞는 거겠지?”
“아마 그럴 것 같은데. 뽑힌 유저들이 전부 전투병 이상의 계급인 걸 봐선 말이지.”
“형은 신병인데 뽑혔잖아?”
“음? 그러고 보니 그러네.”
훈이와 대화를 하던 이안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천룡부장 한센이 뽑은 열여섯 명의 유저들은 이안을 제외하곤 전부 전투병 계급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전투병임에도 불구하고 안 뽑힌 유저도 한둘 정도 있었으니, 도무지 기준을 알 수 없었던 것.
하지만 더 이상은 추론할 수 있는 근거도 부족할뿐더러, 생각할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았다.
“거기, 친구. 뭐해? 빨리 들어가지 않고.”
중대장 파커의 말에, 이안은 하던 생각을 멈추고 빠르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아, 옙. 갑니다.”
이안은 한센의 선택을 받은 스물넷 중 하나.
때문에 그가 들어설 곳은, 푸른 빛깔의 게이트였다.
그리고 이안이 그 푸른 게이트에 발을 디딘 순간.
위이잉-!
커다란 공명음과 함께,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신의 말판’ 전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
대부분의 학생들이 퇴교한, 저녁 아홉시의 한산한 한국대학교 캠퍼스.
하지만 유일하게 북적이는 곳이 한 군데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가상현실과의 대 강의실이었다.
무려 이백여 명이 넘게 수용 가능한, 가상현실과에서 가장 큰 강의실인 이곳 대강의실.
그런데 지금 이 대강의실은, 정말 한 자리도 빠짐없이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이백이라는 숫자는, 가상현실과의 전 학년 학생들이 다 모여야 가능한 수준.
그들 중에는 당연히, 세미와 영훈도 앉아 있었다.
“흐으, 기대된다. 세미 너, 이벤트 응모는 잘 하고 온 거지?”
“당연하지.”
“답안 어떻게 적었어?”
“아마 여기 있는 모든 학생의 답이 같을걸?”
“흐흐, 너무 당연한 건가?”
평소의 강의 시간과는 달리, 어쩐 일인지 맨 앞줄에 앉아 키득거리는 두 사람.
두 사람의 표정은 결코, 강의를 기다릴 때의 우울하고 생기 없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학생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수업도 없는 이 시각에, 대체 이 많은 학생들이 왜 강의실에 모여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강의실 앞에 켜져 있는 거대한 스크린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었다.
-자, 방금 LB사로부터 문서가 도착했습니다.
-오오, 하인스 님, 어서 열어 보도록 하죠. 카일란 기획 팀에서 이번에는 또 어떤 콘텐츠를 내놓았을지 궁금해 죽겠네요.
-하하, 저도 마찬가집니다, 루시아 님. 그럼 지금부터, 이 새로운 전장의 룰에 대해 같이 살펴볼까요?
-얼른요. 지금 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 없다고요.
강의실 스크린에 떠올라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게임방송 YTBC.
지금 가상현실과의 학생들은, 용사의 협곡 전투를 시청하기 위해 이 대강의실에 모여 있었던 것이다.
-오호, 전장의 이름은 ‘신의 말판’이라고 하네요.
-‘신의 말판’이라……. 대체 뭘까요?
-글쎄요? 말판 하면 떠오르는 건 장기판, 체스판밖에 없는 것 같은데.
-호오, 그러네요. 정말 체스와 관련이 있을까요?
-그건 열어 봐야 알겠죠.
이백 명이라는 많은 인원이 모여 있어 다소 시끌벅적하던 강의실은 갑자기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스크린에서 본격적인 전장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세미와 영훈도,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대화했다.
“뭐지? 체스라고? 대체 뭘 하려는 걸까?”
“그러게. 진짜 상상도 안 되네.”
이어지는 하인스와 루시아의 대화.
-자, 그럼 LB사에서 보내 온 파일을 시청자 여러분들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이거 참 설레네요. 직접 참전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두근거릴까요?
-후후, 그야 한국 랭커들이 활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닐까요?
그리고 하인스와 루시아가 떠올라 있던 스크린의 화면이, 새로운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영웅의 협곡 한쪽에 뾰족하게 솟아 있는 하나의 봉우리와 그 주변에 걸려 있는 신비로운 은청빛의 구름들.
신비로운 풍경을 멀찍이서 보여 주던 화면은 점점 확대되었고, 그것을 확인한 세미는 저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엇, 저거 진짜 장기판 같은데?”
영훈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 그러네? 장기판인 것 같기도 하고 체스판인 것 같기도 하고……. 좀 특이한데?”
“아냐, 자세히 보면 장기나 체스와는 좀 달라.”
“뭐가?”
“말판이 훨씬 더 촘촘하고 많거든.”
“그런가?”
봉우리의 꼭대기에 얹혀 있는 거대한 바위.
바위의 상단은 평평하고 매끈하게 잘려 나가 있었고, 그 위에는 익숙한 형태로 홈이 패여 있었다.
세미와 영훈의 말처럼, ‘장기판’을 그리듯이 말이다.
시청자들로 하여금 호기심을 자극하는 신비로운 광경.
이어서 그 말판 위로, 마치 ‘장기짝’처럼 실루엣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웅- 우우웅-!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인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용사의 협곡 수요 전장의 이름은 ‘신의 말판’. 지금부터 이 전장의 룰에 대해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차례 마른침을 삼킨 하인스는 LB사로부터 받은 문서를 읽기 시작했고, 그것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한 번 들은 것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이 콘텐츠가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것이었다.
“와, 이거 대박인데!”
영훈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하인스가 설명한 내용들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1. 천계 진영과 마계 진영에서, 각각 스물넷의 가장 뛰어난 유저를 선출한다.
(유저의 선출 기준은 ‘전투력’과 ‘계급’이며, 전투력은 유저의 스텟과 장착한 장비에 의거해 측정된다.)
(선출되지 않은 유저는, 속해있는 진영이 승리할 시에만 일괄적으로 100의 공헌도를 획득할 수 있다.)
2. 선출된 유저들은 푸른 게이트를 통해 전장으로 이동되며, ‘신의 선택’에 따라 말판에 배치된다.
3. 말판의 위치에 따라 유저의 직책이 결정되며, 직책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달라진다.
*직책
-대장군 : 가장 뒤 열의 중앙에 위치하며, 한 턴에 최대 다섯 칸을 움직일 수 있다.
대장군이 사망할 시, 전투에서 패배한다.
(적을 처치할 시 추가로 두 칸 이동 가능하며, 전투를 한 번 더 할 수 있음.)
-보좌관 : 대장군의 좌우에 위치하며, 한 턴에 세 칸을 움직일 수 있다.
적에게 공격받을 시, 능력치가 10퍼센트 상승한다.
(대장군의 주변에 서 있을 시, 대장군의 전투를 지원할 수 있음.)
-돌격대장 : 후열의 양 측방에 위치하며, 한 턴에 최대 열 칸을 움직일 수 있다.
적을 공격할 시, 능력치가 5퍼센트 상승한다.
(이동 경로에 아군이나 적군이 있을 시, 1회에 한해 뛰어넘을 수 있다.)
-의무대장 : 양쪽 보좌관의 옆에 위치하며, 한 턴에 최대 다섯 칸을 움직일 수 있다.
모든 영웅들 중 유일하게 회복 계열 스킬 사용이 가능하며, 한 턴에 최대 2회 아군을 치료할 수 있다.
한 번 아군을 치료할 때마다, 대상의 30퍼센트만큼의 생명력을 회복한다.
(‘사제’클래스만 선출될 수 있는 직책이다. 적을 먼저 공격할 수는 없지만, 공격받았을 시 전투는 가능하다.)
-병사 : 각 진영의 최전방에 배치되며, 한 턴에 최대 두 칸을 움직일 수 있다.
4. 천계 진영과 마계 진영이 번갈아 가며 말을 움직일 수 있고, 시스템이 정해 주는 순서에 따라 차례가 오게 된다.
5. 말끼리 만나 전투가 벌어지면 말판의 중앙에 대전장이 생성되며, 두 유저 간의 대전이 시작된다.
대전에서 패배한 유저는 ‘죽은 말’이 되어 전장 밖으로 소환된다.
대전 중에는 ‘의무대장’을 제외하면 생명력을 회복할 수 없으며, 전투가 끝나더라도 입은 피해가 회복되지는 않는다.
* * *
천룡부장 한센의 설명을 전부 들은 이안의 얼굴에는 흥미진진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와, 이거 무슨 보드게임 같잖아?’
이안이 보기에 ‘신의 말판’전장이야말로, 기획력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었다.
매 턴 벌어지는 전투는 마치 1:1 ‘토너먼트’식 대전 같으면서도 그 룰과 방식은 마치 장기나 체스를 연상케 하는, 그야말로 신박하기 그지없는 방식의 전투.
대략적으로 룰을 이해한 이안은, 한껏 들뜬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직책이 정말 다양하네. 기왕이면 대장군이나 돌격대장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전장의 중심이 되어 신나게 킬 포인트를 올리고 싶은 이안은,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전투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직책만 제대로 얻어걸리면, 그야말로 슈퍼플레이를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발 대장군……!’
그리고 잠시 후,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각 진영 유저들의 직책이 정해집니다.
한 줄의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한명씩 호명되기 시작하는 천군진영의 유저들.
-……유저의 직책이 ‘대장군’으로 설정되었습니다.
-……유저의 직책이 ‘보좌관’으로 설정되었습니다.
-……유저의 직책이…….
그리고 그 메시지들의 끝에.
-‘이안’ 유저의 직책이 ‘병사’로 설정되었습니다.
이안을 우울하게 만드는 한 줄의 메시지가 떠올랐다.